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서울시민교회 부목사:홍 순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히브리서 11:1~10]

‘바라봄의 법칙’이라는 말을 혹 들어보셨나요? 간절히 바라보고 마음에 그 꿈을 품고 있으면 이루어진다는 뜻이죠. 그 전에는 ‘긍정의 힘’이라는 책이 있었죠. 된다고 믿으면 된답니다.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적극적 사고방식’이 유행을 했죠. 된다고 믿고 적극적으로 일을 해 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요즈음 이런 책들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가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점에 있어서 분명하게 해야 될 필요가 있다 싶어서 1, 2, 3절 말씀을 근거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일단은 이런 책들이나 이런 가르침들이 좋은 가르침이고 또 실제로 그대로 따라 했다가 좋은 결과를 가져온 예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가르침을 따라서 성공한 사람이 적지 않다는 뜻이죠. 안 된다고 생각하면 될 일도 안 되죠. 그런데 되지도 않을 일이지만 된다고 믿고 나서면 안 하는 것보다는 뭐가 되도 돼요. 그래서 차라리 못해요, 안 해요, 안 돼요 하며 아무 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순 엉터리라도 하면 된다, 할 수 있다고 나서는 것이 좀 더 나을 수는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라봄의 법칙도 좋고, 긍정의 힘도 좋습니다만 혹시 이런 것에 대해서 비판의 소리가 좀 있기는 하더라도, 그 비판의 핵심이 무엇인지, 뭐가 잘못되었는지를 잘 살피면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하는 히브리서의 말씀과 믿는다면 ‘간절히 바라보고 사모해야 된다, 할 수 있다고 믿으면 된다.’ 이런 말의 차이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말은 참 좋은데 방향이 조금 비뚤어지면 결과가 더 나빠질 수도 가끔 있습니다. 게으른 것보다는 부지런한 게 낫잖아요?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커서 정말 못된 짓만 하는 거예요. 그런데 배운 게 ‘게으른 것보다 부지런한 게 낫다’ 라서 참 부지런한 거예요. 못된 짓 하면서 부지런하면 어떻게 돼요? 부지런해야 된다는 말이 맞기는 맞는데 방향이 약간 비뚤어지면 오히려 더 나빠질 가능성이 있기도 하는 겁니다. 그래서 방향을 잘 잡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씀하면서 그렇게 살았던 선조들의 예를 죽 전해 줍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의 삶이 가끔 들었던 바라봄의 법칙이라는 책에서 설명하는 가르침과 일치하는지, 만약 다르면 어떻게 다른지, 이걸 알아두실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장이라고 하는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사람들도 정말 간절하게 소망하고 꿈을 품고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과연 무얼 바라고 살았는지, 하면 된다고 하는 그 생각처럼 그렇게만 살았는지 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믿습니다’란 말을 함부로 쓰는 경향이 있어요. 덮어놓고 “믿습니다!” 하거나 “믿습니까?” 그러면 “아멘”이라고 그러는데 어떨 때 보면 ‘그건 믿는다고 말하는 게 아닌데?’ 이런 생각이 들 때가 더러 있습니다. 보고 알 수 있는 것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거나 아니면 들어서 바로 아는 것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에요. 그래서 11장 1절을 보면 믿음의 대상을 두 가지로 명시해 줍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합니다. 믿음의 대상은 바라는 것, 즉 지금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했으니 볼 수 없는 거예요. 지금 나한테 없는 것, 볼 수 없는 것, 이게 믿음의 대상이란 얘기죠.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라는 말은 믿음은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질 수 있게 하는 방법이라는 말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는 것은 믿음은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게 하는 방법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믿음으로만 가질 수 있고, 믿음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믿음의 대상이 되는 것은 보거나, 만지거나, 배워서 알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믿는 수밖에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적절한 도구를 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키를 알려면 자를 써야죠? 그런데 체중계를 가지고 오면 짐작은 할 수 있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잖아요. 맛을 알고 싶으면? 맛을 아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먹어보는 겁니다. 그런데 다른 도구 쓰면 알 수 있나요? 요즈음 수박 같은 경우는 워낙 익숙해지면 귀를 가지고 맛을 알 수 있죠? 두드려 보면 맛이 있겠다, 없겠다, 짐작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수박의 맛을 알기 위해서 귀를 사용하는 것과 입을 사용하는 것을 비교하면 입을 사용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입을 사용할 수 없을 때 귀를 쓰는 것이죠.

고기가 맛이 있을지, 없을지 어떻게 아나요? 옛날 제 친구 중에 고기 파는 친구가 있었는데 고기에 칼을 대 보면 안대요. 특수한 예죠. 먹어봐야 아는 거죠. 그림이 값어치가 있는 그림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아나요? 혀를 대보고 아나요, 눈으로 아나요, 귀로 아나요? 그림을 아는 데는 입이고 눈이고, 혀도 전혀 도구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감각을 동원해서 주변 사물을 인식하지만 감각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들이 있어요. 그림은 감각으로 안 돼요. 눈이라고 다 같은 눈이 아니에요. 어떤 사람은 “와!” 하는데 어떤 사람은 아무리 봐도 몰라요. 그걸 깨달아 아는 사람의 눈은 눈이 아니고 머리예요. 머리로 그림을 보아야 그 진가를 알게 되는 겁니다.

외국어도 그래요. 어떤 사람은 외국말을 듣는 순간에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요. 그런데 모르는 우리는 몇 번을 들어야 그 말을 이해할까요? 모르는 말은 평생을 들어도 몰라요. 아는 사람은 한 번 들으면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요. 들어보면 안다? 아니오! 아는 사람은 신경 안 쓰고 금방 들어도 알아듣는데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신경 써서 들어도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요. 이런 예가 우리 주변에 굉장히 많아요. 저는 피카소 그림을 볼 때마다 감동은 안 오고 ‘이상하다? 우리 애들 호작질[낙서]보다 더 나은 게 없는데 저게 몇 억씩 할까?’ 이해가 안 돼요. 그림을 보고 평가할만한 눈이 없는 거예요.

어떤 분이 우리 집사람에게 가방을 하나 선물했는데 명품 흉내를 낸 것이었나 봐요. 그런데 사 온 사람도 모르고 받은 사람도 몰라요. 우리 집 사람이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어머, 이거 열어봐도 돼요?” 남의 핸드백을 왜 열어가지고 안을 뒤지느냐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 집 사람이 놀랐답니다. 사 준 사람도 모르고 들고 다닌 사람도 모르는데 남이 왜 그러나요? 아는 눈, 엄밀히 말하면 머리가 있거든요. 저도 시내에서 핸드백을 많이 봤지만 “야, 그거!” 하는 백은 하나도 안 보이던데요? 왜요? 저는 봐도 아무 감동이 없어요. 명품 중에 제가 아는 게 하나도 없으니 그렇죠. 볼 줄 아는 사람은 보는 순간 눈이 반짝 반짝 뜨인다네요.

우리 집사람도 교회 못 입고 오는 옷이 있어요. ‘사모님이 저렇게 고급 옷을 입고 다녀도 되나?’ 그래서 못 입고 있는 옷이 더러 있어요. 학교 근무할 때 보따리장수에게 산 거예요. 7만원 주고 산 옷인데 교회에서 “사모님, 이거 얼마 주고 산 옷이에요?” “7만원” 하니까 “아, 70만원 줬구나.” 이러더랍니다. 그걸 어떻게 입고 다녀요? 보따리장수한테 샀으니까 명품흉내 낸 것이겠구나 싶어요. 그런데 그걸 비싼 명품이라고 보니까 못 입고 나가는 거예요. 이처럼 우리 주변에는 어떤 사람은 봐도 아무렇지도 않은데 어떤 사람들의 눈에는 번쩍 뛰는 게 굉장히 많아요.

성가대 지휘자가 제일 많이 하는 말이 “목에 힘 빼세요. 턱에 힘 빼세요.”죠? 본인들은 ‘힘 안 줬는데, 힘 뺐는데?’ 하지만 지휘자는 매일 힘 빼래요. 자기 턱에 힘이 들어갔는지 안 들어갔는지 자기도 몰라요. 그런데 지휘자는 소리만 듣고도 알아요. 힘이 들어간 소리인지 빠진 소리인지를 아는 귀가 있는 사람은 듣는 순간에 알아요. 그런데 정작 본인은 몰라요. 이런 것들은 내가 본다고 아는 것 아니고, 듣는다고 아는 것 아니에요. 아는 사람의 말을 믿고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귀가 뜨이거나 눈이 뜨이거나 이렇게 되면 그 때부터는 보여요.

감각과 관계된 것은 보든지 만지든지 맛을 보면 저절로 알아요. 그러나 지식이나 두뇌와 관계된 것은 부지런히 배우고 갈고 닦아야 알 수 있어요. 귀나 혀나 손을 대는 것은 바보입니다. 그림이 얼마나 좋은 건지 알려고 혀를 갖다 대면 세상에 이런 바보 없잖아요? 머리가 그 수준을 따라가기 전에는 절대로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사람을 보고 머리를 쓰라고 그랬더니 벽에 못을 박는데 이마로 쿵쿵 찧더랍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머리 쓰라고 했잖아?’ 그거 머리 쓰는 거예요? 대상과 적절하게 도구를 못 맞추면 이런 바보짓을 하는 겁니다.

감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있고 그 위에 머리로 알 수 있는 게 있고 그 위에 영적인 부분이 있어요. 이 부분은 믿어야만 알지, 배우거나 느껴서 알 수 없습니다. 사람을 어떻게 아나요? 보면 알죠? 그러나 보면 안다는 것은 가장 피상적인 겁니다. 껍데기만 알고 짐작할 뿐이지 제대로 아는 게 아니에요. 겪어봐야 알죠? 맞아요. 그런데 몇 년이나 겪어보면 알아요? 결혼하고 30~40년 사시면 서로를 완벽하게 다 잘 아실 것 같아요? 죽을 때가 돼도 모르겠답니다. 사람을 알려면 겪어봐야 안다고 하는데, 이것조차도 사람을 완벽하게 아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은 참 묘한 영적인 부분이 있어서 믿어 줄 때만이, 그 사람을 믿어줘야 그 사람의 진가가 드러나고 그 사람과 바른 관계를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보는 것도 중요하고 겪어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믿어줘야 그 사람이 제 역할을 하고 그 사람과 나와의 관계가 제대로 됩니다. 가정에서나 회사에서나 어디에서나 사람을 믿어 주면, 믿어주니까 사기 치던데... 이러는 경우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믿어 주지 않으면 제대로 된 관계가 어렵습니다.

병중에 가장 골치 아픈 병이 의처증이나 의부증입니다. 못 믿는 병이죠. 의처증을 무엇으로 고치나요? 약이 없습니다. 의부증도 약이 없습니다. 사모님이 남편을 의심하는 거예요. ‘우리 목사님이 요즈음 다른 집사님하고 ...’ 혼자 온갖 상상을 다 하는 거예요. 어떡합니까? 목사님이 사임해야죠. 고치는 유일한 방법이 믿어야 돼요. 안 믿어지는데도 고치려면 믿어야 돼요. 사람 사이에도 믿음이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일단 이런 식으로 병이 들면 고치는 방법이 없으니 정상일 때 관계를 잘 다져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세상에 믿을 놈이 어디 있다고 해서 불안해지기 시작하면 길을 못 나가요. 실내에도 있어도 갑자기 천장이 내려앉으면 어떡하지? 이게 심해지면? 갈 곳이 전혀 없어요. 들판에 혼자 앉아 있을까요? 하늘에서 비행기가 떨어질까 겁이 나서 어떻게 다녀요?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을 잃어버리면 정신병자가 되는 겁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믿음이 굉장히 중요한데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요? 보고 알겠다구요? 하나님은 우리의 감각의 범위 안에 들어오는 분이 아니에요. 우리의 머릿속에 들어오실 분도 아니에요. 영적인 그 분을 우리의 감각이나 눈으로 알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겁니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이 “하나님을 알고 믿으려 하지 말고, 알기 위해서 믿으라.”고 하신 겁니다.

당신 나 정말 사랑해? 증거 한 번 대 볼래? 이래서는 진짜 사랑하는지 절대 몰라요. 믿고 지내보면 알 수 있는 것이지, 증거를 대서 이만하면 됐나? 응. 그래가지고 사랑한다? 애당초 안 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믿는다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아는 방법입니다. 내 눈, 내 손, 내 머리로도 볼 수 없는 것,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죠. 그래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믿는 것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관계되는 말도 아닌데 “믿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번에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떼돈이 들어올 줄 믿습니다.” 그런 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좋게 말해서 ‘자기 확신’일 뿐이죠.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면서 그렇게 살아갔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11장에 죽 이어가는 겁니다. 믿어야만 알 수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무엇을 믿어야 하느냐? 첫 번째로 말씀 하는 것이 3절입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이렇게 말하죠. 믿어야 한다면 제일 처음 믿어야 할 게 뭐예요?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다. 이것을 믿으라고 말하는데 이 구절이 조금 어려운 점이 있죠.

3절 뒤편에,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이 구절이 조금 어려워요. 보이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물건을 말하는 것이니까 금방 알겠는데 그럼 나타난 것은 뭐냐? 옛날 희랍사람들이 이런 것을 많이 가르쳤어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실제 세상이 아니고 저 어느 곳에 따로 있는데 그 세상이 여기에 그림자처럼 비쳐진 것, 이게 우리 세상이다. 그러니까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저 다른 어느 세상에서 이쪽으로 보인 것이 나타난 거예요. 이것 때문에 우리 세상이 만들어졌다. 그렇게 가르친 사람들이 있었다는 얘기죠. 그런데 히브리 기자는 세상은 그렇게 만들어진 게 아니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타난 것’을 이해하기 쉬운 말로 한다면, 창조 이전의 창조 재료라고 이해하시면 될 듯합니다.

그러면 보이는 것은 이 물건을 만들기 전에 어떤 재료가 있었는데 그걸로 말미암아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말이에요.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은 그렇게 만들어진 게 아니다. 그럼 어떻게 만들어졌는데요? 바로 그 앞줄에 있잖아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이렇게 말하죠. 여러분,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우주 만물은 원래 뭔가가 있었는데 그것이 어떻게 형태를 바꿔서 우리에게 나타났다. 이게 아니고 어떻게 됐다고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겁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해요. 우주의 기원을 설명할 때에 제일 많은 지지를 받는 이론이 ‘대폭발’ 이론입니다. ‘빅뱅’이라고 말하죠. 이 우주는 원래 한 점, 아주 무거운 한 점이었는데 어느 날 이것이 뻥 터지는 바람에 지금도 그게 터져 나가고 있는 중이예요. 그렇게 해서 이 우주가 만들어졌다고 말해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터지기 전에 있던 것, 그게 뭔지는 몰라요! 모르지만 뭔가가 있었는데 이것이 터지면서 우주가 생겨났다. 이게 오늘날 가장 많은 과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이론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그렇게 된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이게 창세기 1장 1절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이 믿어져야 그 다음 성경을 믿을 수가 있는 거예요. 성경을 읽으려고 펴는데 창세기 1장 1절이 도전을 합니다. 이거 믿을래? 말래? 이게 믿어지면 성경책 그 뒤에 있는 것을 다 믿을 수 있고, 이게 안 믿어지면 성경의 기적들 많이 나오잖아요? 다 믿을 수 없는 거예요.

한동대 예전의 김영길 총장이 자기가 예수 믿게 된 간증을 하게 된 이야기 중에, 미국에 있다가 사모님을 따라서 교회 붙들려 나갔나 봐요. 성경 읽으라고 해서 신약성경부터 읽었답니다. 제일 먼저 믿을 수 없었던 것이 가나 혼인잔치에 물로 포도주 만든 거예요. 자기 생각에 그랬겠죠. 무식한 사람들이 물이나 포도주나 다 물이니까 물로 포도주 되는 것은 쉽게 생각되는지 몰라도 과학자의 눈에는 물과 포도주는 전혀 다른 것이에요. 물은 H2O잖아요. 수소, 산소가 들어 있는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포도주는 C2H5OH 저도 이거 외운다고 애 먹은 겁니다. 포도주에는 H와 O와 C, 탄소가 들어있단 말이에요. 이런 것을 잘 모르는 무식한 대중은 물이나 포도주나 비슷해 보이지만 그래도 과학자인 자기 눈에는 C가 그냥 들어왔다는 것은 말이 안돼, 믿을 수 없어. 무식한 사람들이나 믿는 것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이랬다는 거예요.

좀 더 넘어가면 기가 막히는 것 있죠? 이 사람들 생물 배우지도 않았나? 어떻게 여자 혼자서 아이를 낳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성경을 모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걸 미주알고주알 자세히 설명을 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믿을래? 말래? 이거거든요. 왜요? 설명해서 될 문제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역사나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렇게 설명하고 보여줘서 될 문제가 아닌데 이 분이 어쩌다가 창세기 1장 1절을 앞에 놓고 고민을 많이 했나 봐요.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고?’ 과학자로서 많은 것을 살피고, 살피고 하는데 ‘아, 과학의 한계가 여기까지고 이 너머는 과학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구나!’ 어느 날 거기서 깨달음을 얻고 창세기 1장 1절이 믿어지더랍니다.

그걸 믿고 나니까 그 전에 안돼, 안돼, 말 안돼! 이랬던 것들이 전부 다가 ‘아니, 만물을 창조할 수 있는 그 분 같으면 이거는 아무 문제가 아니잖아?’ 그게 풀려 버렸다는 거예요. 어떻게 해서 풀렸냐고요? 이게 설명이 안 돼요. 믿음이라는 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렇게 됐는지 설명이 안 되는 거예요. 참 묘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을래? 말래? 이걸 요구하시고 계시는데 여기 계시는 분들은 어떻게 그걸 믿어요?

믿어지면 복이고, 안 믿어지면 안타까워해야죠. 마가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믿으면 아이를 고칠 수 있다고 말했을 때 그 귀신들린 아이 아버지 있죠?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고 예수님께 아이를 맡겼던 그 분, 무조건 ‘믿습니다’ 해 놓고 자기 속을 보니까 별로 믿는 것 같지 않아. ‘예수님, 지금 내가 믿어야 이 아이를 고칠 수 있는데 내가 보니까 믿음이 없는 것 같아요. 나의 이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믿게 해 주세요!’ 이런 거거든요.

이런 마음조차도 예수님께서는 믿음으로 인정해 주시고 그들을 고쳐 주셨던 거죠. 믿는 것도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믿을래? 말래? 라고 물을 때에 믿어지게 해 달라고 하는 간절함, 아니 믿고 싶은 이 간절함, 이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허락하시고 믿게 해 주셨다는 사실을 얼마나 감사해야 되는지 모릅니다.

믿는다고 한다면 하나님과 그가 만드신 이 창조세계, 이걸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거죠. 그러면서 그 사실을 믿고 그 하나님을 따랐던 우리 믿음의 선조들의 이야기를 죽 길게 이어갑니다. 아벨이나 에녹이 나오고 노아나 아브라함이 나와요. 이 분들은 전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을 믿은 거예요. 노아의 경우에 120년 후에 홍수가 온다? 그걸 누가 믿어요? 도무지 말도 안 되고 믿을 수 도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믿는다. 이런 겁니다. 증거가 있어서 믿은 것이 아니에요.

아브라함의 경우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고 말하죠. 내가 지금 가야 할 그 땅이 도대체 어떤 땅인지 알지도 못하고 간다. 이런 것이 믿음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처음에 말씀드렸던 바라봄의 법칙이라는 것, 바라보라는 거예요. 간절히 바라보고 소망하면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무엇을 바라보라고 하는지 주목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그러는데 간절히 바라면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데, 믿음으로 무엇을 얻느냐는 거죠.

성경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나라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간절히 소망하고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얼 소망하느냐에 달린 거예요. 말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하는데 그 바라보는 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다시 말해서 간절히 소망하면 우리가 이 땅에서 성공하고, 출세하고,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고 한다면 이건 성경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좀 전에 봤던 이 사람들이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냐? 아니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이지 않는 약속, 보이지 않는 그 땅을 바라보고 나가면서 얼마나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말씀을 믿고 힘들고 어렵지만 이 땅의 아픔들을 다 이겨내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삶이죠.

‘긍정의 힘’이라는 것,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좋은 생각인 것은 틀림없습니다만 무조건하고 할 수 있다면 된다? 이것은 성경적이지 않아요. 할 수 있다고 믿으면 된다? 그런지 안 그런지 모르지만 저는 해병대 정신이라고 붙여 놨어요. 해병대? 하면 된다! 포항에 해병대 훈련소가 있어요. 지나가다 보면 그런 글자가 많이 붙어 있어요. 여러분, 하면 됩니까? 안 된다고 하는 것보다는 낮습니다. 그래서 안 된다 하지 말고 무조건 하다보면 뭐가 되도 되기는 돼요. 그런데 성경이 가르치는 것도 그런 것이냐? 그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하시는 말씀은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누가 하는 거죠? 내가 하는 것 아니에요. 능력을 누가 주시죠? 하나님께서 주셔요. 하나님께서 내게 능력을 주시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 이런 뜻인데 이게 오해를 많이 받은 문구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왜 그 말을 했는지를 잘 생각 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겁니다. 옥에 갇혀서 그를 돕기 위해서 빌립보 교회가 헌금을 많이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걸 받고 답장을 쓸 때 뭐라고 해야 되나요? ‘고맙다.’ 그래야 되죠? 고맙다고 하는 뜻으로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이 말을 하신 거예요.

무슨 뜻이냐면 ‘여러분들이 어려운 형편 가운데서 내게 헌금을 보내 주지 않아도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그 능력으로 말미암아 내가 가난하든지 부하든지 형편이 좋든지 어떤 지간에 얼마든지 적응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일을 잘할 수 있는데 여러분들이 이런 헌금을 보내줘서 감사하다.’는 겁니다. 할 수 있다고 믿기만 하면 1,000명 모여 있던 교회가 당장에 2,000명이 된다? 이런 개념이 아니에요. 나는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내게 힘 주셔서 내게 맡겨준 사명은 너끈하게 감당할 수 있다. 가난하든지 부하든지 다 할 수 있다. 이런 뜻이거든요.

그런데 이런 문맥은 놓쳐 버리고 무조건 ‘믿고 나서면, 한다 하면 된다’는 것은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내 욕심을 채우는 도구가 아닙니다. 없는 것을 가지게 해 주고,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해 주는 것이 믿음이라고 해도 그 믿음은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도구는 아닙니다.“하나님만 믿고 확 일 한 번 저질러 봐.” 이런 이야기를 종종 듣거든요. 뭐예요? 하나님께서 주실 것 믿고 그 똥차 버리고 새 차 뽑아 버려라. 그런 얘기거든요. 전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건지 안 믿는 건지...

대형교회를 건축하다가 중도에서 포기한 경우가 참 많아요. 그래서 경매에 넘어가고... 왜 그러나요? 자기 능력은 생각 안 하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겠지 하고 미련하게 밀어붙였는데 하나님께서 안 도와 주시더라, 그런 얘기잖아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상관하지 아니하고 용감하게 밀어붙이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다 밀어 주시고 다 도와 주시나요? 옛날에 어떤 영화의 대사가 생각이 나요. ‘친구’라는 깡패 영화죠. 그 영화에서 나오는 유명한 말 중에 이런 것이 있어요. “내가 니 시다바리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는 생각도 안 하고 내 욕심 때문에 일을 무리하게 저질러 놓고 “믿습니다!” 하고 나가면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시겠어요? “내가 너 뒤나 닦아주는 네 종이냐?” 이러시지 않겠어요?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은 내 욕심을 채우는 도구가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섬겨야 하고, 하나님께서 어떤 의도를 가지고 계시는 지를 잘 살펴서 그 말씀 따라 사는 것, 그렇게 살다보니 이런 저런 어려운 일들이 생기더라,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나를 지원하고 계시고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가고 있으니, 이런 아픔이나 어려움들은 이겨낼 수 있다. 그러면서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안락함이나 부귀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따라 갈 수 있다. 이런 것이 참된 믿음이라는 거죠.

이 땅에서 부자로 사는 것, 또 호화롭게 사는 것, 괜찮아요. 능력 있으면 그렇게 사는 것도 괜찮습니다만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이 땅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죠. 그래서 11장에는 하나님의 그 약속을 바라보고 이 땅에서 나그네처럼, 아니면 참 고생하면서 살았던 우리 믿음의 선조들의 이야기를 길게 설명합니다. 마치 계주처럼 설명을 해요.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믿음의 바통을 우리에게까지 이렇게 전해 줬다. 너희들이 나머지 주자들이니까 그 길을 잘 달려가라. 그렇게 당부하는 것이 이 믿음장, 11장의 이야기입니다.

계주 잘 아시죠? 마지막 주자가 바통을 들고 똑바로 가면 되는데 “엄마, 나 여기 있어!” 하다가 엎어지면 끝나는 거예요.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선조들의 이야기를 죽 하면서 이게 마치 계주와 같으니까 마지막까지 잘 가거라. 그러면서 잘 가는 방법을 12장에서 설명을 합니다. 12장 2절을 보시면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에서 ‘믿음의 주’라는 이 주는 주인이라는 주(主) 자가 아니에요. 굳이 우리말로 풀이를 한다면 근원, 혹은 창시자 이런 뜻입니다. 믿음의 근원이요 믿음의 창시자인,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의 출발점입니다.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라는 것은 도착점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우리 믿음의 출발선이기도 하고 동시에 도착점이기도 한 바로 그 예수를 바라보고 잘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이런 의미예요.

예수님만 바라보고 잘 달려가면 문제가 없죠. 그런데 잠시 뛰어 가다가 예수님 아닌 다른 것을 바라보면? 예를 들어서 물에 빠졌던 베드로처럼, 아니면 관중석에 있는 엄마 찾다가 엎어진 아이처럼, 그럴 수 있지 않느냐?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나라만 사모하며, 예수님만 바라보며, 그렇게 열심을 다 하라는 겁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볼 것이 하나님이요, 예수님이다. 히브리서가 그걸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바라봄의 법칙? 좋아요. 무얼 바라보라고 하는지 잘 보시기 바랍니다. 할 수 있다? 예,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굉장히 좋은 겁니다. 그런데 왜 할 수 있다고 말하는지 잘 보셔야 합니다. 무조건 할 수 있다고만 하면 되는 거다? 아니면 내 능력으로 한다? 이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에게 힘주고 계시다는 이 믿음에서 ‘할 수 있다’고 그러고, 그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가라’는 얘기죠. 그래서 우리 삶에 있어서 믿음이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믿음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이게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이 보기에는 이건 말도 안 되는 거예요.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들에게는 정말 어려운 방법입니다. 그냥 믿으라고?! 그러나 특별한 능력이 없는 우리에게는 믿기만 하면 하나님 볼 수 있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참 쉬운 방법이잖아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과목을 왜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보겠다고 하셨는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하나님다운 방법이고, 참 기묘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늘의 별을 따와라, 아니면 돈을 얼마를 내 놔라, 이런 방법을 안 쓰셨어요. 믿음으로! 그 믿음도 굳이 따지면 어린 아이 같은 믿음으로! 그냥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겠다는 얘기입니다. 똑똑하고 능력이 있을수록 불리한 방법이에요. 이런 믿음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참으로 감사하면서 하나님께서 다시 부르시는 그 날까지 이 믿음의 경주를 잘 달려가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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