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효자제일교회 목사:홍 순관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개역, 요한계시록 1:4~8]

예수님의 12제자 중에서 최후까지 살아남아서 오래도록 교회를 돌본 사람은 요한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다 순교한 뒤에도 혼자 남아서 교회를 돌아보고 있는 것이 영광이었을까요, 고난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요한에게 특별히 모친을 부탁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위험이 닥치면 제일 먼저 모친을 들쳐 업고 도망을 갔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그런 위험에서 순교를 하게 되었지만 요한은 순교할 수도 없었습니다. 모친을 돌봐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제일 늦게까지 살아남았습니다. 영광이었을까요, 고난이었을까요?

박해가 시작되면서 밧모 섬에서 외로운 유배생활을 했습니다. 고생을 많이 했겠지요. 말년에는 기력이 다해서 설교할 힘이 없을 때에도 제자들이 사도요한에게 말씀을 부탁하면 의자에 앉아서 그냥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제자들이 다 사라진 후에 혼자 남아서 교회를 돌보는 일이 영광이었을까, 고난이었을까 생각을 해보면, 참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그 어려움들을 어떻게 이겨내면서 힘든 제자의 삶을, 사도의 삶을 성공적으로 걸어갈 수 있었는지 한 번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4절 앞부분,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하시는 것을 보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편지의 인사말입니다. 요한이 교회들에게 뭐라고 인사를 했습니까? 요한도 그렇고 바울도 그렇지만, 편지 서두에 으레 쓰는 문구가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편지를 쓰면서 서두가 너무 긴 듯한데 간단하게 요약하면,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바라노라’입니다. 5절 중간쯤에 있지요.

이 말 앞 뒤에 다른 말이 많이 붙어서 편지의 서두인지 알 수 없도록 되어있는 겁니다. 어떤 은혜와 평강을 말합니까? 아니면 누가 주시는 은혜와 평강을 바라고 있는 겁니까? 누구로 말미암은 은혜와 평강입니까? 바로 그 앞부분만 보시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평강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만은 아닙니다. 그 앞에 또 있거든요.

4절 첫 문장은 빼고 봅시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한 분 나왔습니다, 그 다음에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두 분 나왔습니다, 그 다음에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러니까 세 분  나온 겁니다. 어떤 은혜와 평강이라고요? ‘이 세 분으로 말미암은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이런 인사입니다.

이 세 분을 간단하게 말하면 ‘앞으로 오실 이와 그 분 앞에 있는 일곱 영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입니다. 이 세 분을 압축하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을 쓴다면 ‘성부와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사도 요한이 편지를 쓰면서 서두에 한 말입니다.

진정한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에게서만 옵니다. 아니, 하나님에게서 오는 은혜와 평강만이 진짜입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하나님 아닌 다른 어떤 것에서 평강을 누리려고 애를 많이 씁니다. 최근에는 돈에 너무 많이 매여 있는 것이 비극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돈 때문에, 돈이 우리에게 주는 기쁨, 거기에 빠져 있다가 어느 날 문득 돈 만들기가 어려워지고 돈이 없어지니까, 오늘날 우리 한국사회가 너무 심각하다 싶을 만큼 많이 깨어져 나가고 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너무나 아픈 현실들이 있습니다마는, 돈에 너무 매여 살다가 당하는 위기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 아닌 안정된 직장 때문에 내가 평강하다고요? 좋지요, 그러나 위험할 수 있습니다. 남보다 지위가 우월하다고요? 그래서 기분도 좋고, 평안합니까? 어느 날, 그 지위를 잃어버렸을 때, 하루 아침에 무너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재산이 많아서 평안을 누린다고요? 그런 사람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그 재산이 어느 한 순간에 무너질 때에는 돌이킬 방법이 없어집니다.

이런 세속적인 이유로 말미암은 평강은 진정한 평강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야 말로 진정한 은혜요, 진정한 평강인데 사도들이 편지를 쓸 때에 늘 그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평강이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바라노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인사말에 추가된 것이 한, 두 가지 더 있어 보입니다. 5절에 ‘원하노라’ 다음부터 보세요.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하나가 더 있죠? 여기에 나오는 ‘그에게’ 하는 ‘그’ 분이 누구입니까?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부, 성령, 성자’ 세 분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이 제일 깁니다.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어떤 면에서 피로 범벅이 된 책입니다. 구약에 짐승들의 피 이야기가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 신약에도 곳곳에 예수의 피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심지어 식인종이라고 오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모일 때마다 “이것은 예수님의 피요” 하면서 마셨단 말이에요. “이건 우리 예수님의 살이요” 하면서 뜯어먹었단 말이에요. 그런 오해를 받으면서도 예수의 피를 마시고 예수의 살을 먹었습니다.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시는데 그 피가 꼭 필요한 겁니까? 왜 그렇습니까? 피는 생명을 가리키는 겁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세기 2:17)’고 선언하신 말씀을 어겼기 때문에 모든 인류는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비극적인 것은 자신이 죽어도 자신을 구원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죄 값으로 죽어야 했기 때문에 죽는다는 것은 죄 값을 갚는 것에 불과합니다. 다시 구원을 받을 만한 방법이 없는 겁니다.

우리에게 우리 자신이 다시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는 길이 없으니, 결국은 누군가가 우리를 대신해서 죄 값을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대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대신 죽어야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온통 피 얘기가 범벅이 되어 있는 겁니다. 구약에 나오는 모든 피 이야기들, 짐승을 잡아서 뿌리고 발랐던 모든 피가 사실은 훗날 이 땅에서 우리를 위해서 흘리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상징입니다. 훗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있기 때문에, 구약의 짐승들의 피가 효력이 있는 겁니다.

결국,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는 이 말씀은, 뒤집어 보면 ‘네가 잘못하면 내가 죽는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들어 두시고, ‘네가 잘못해서 범죄하게 되면, 내가 죽는다’는 말을 하신 겁니다. 왜 그랬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너무나 끔찍하게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그렇게 사랑스러운 존재로, 사랑의 대상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결국엔 하나님께서 이 아픔을 겪으셔야 했던 거죠.

사람의 예를 든다면, ‘낳은 죄’라는 말이 있죠? ‘낳은 죄’ 이것 참 무섭습니다. 물릴 수도 없고, 용서되는 것도 아니고, 죽을 때까지 따라다니는 것이 ‘낳은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고생을 하셨느냐?’ 하니까,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걸 생각해보면,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시고’ 하는 말씀이 얼마나 대단한 감격이었겠느냐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바라노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왜 피를 흘리고 고난을 당하셔야 했느냐?’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셨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드립니다마는, 이 본문에 보시면 좀 특이한 표현이 또 하나 있습니다. 6절을 보겠습니다.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라고 하죠? 우리를 그의 나라와 그의 제사장으로 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셨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가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뜻이 온전하게 이루어진다’, 혹은 ‘우리 속에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가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온전하게 이루어집니까, 내 뜻이 우선입니까? 여러분, 믿는 우리만이라도 내 속에서 내 욕심이나, 내 생각이나, 내 고집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더 우세하게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믿는 성도들끼리 사이가 좋지 않아서 싸울 때에 대체로 하나님의 말씀은 뒷전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전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싸우고 싶고 싸워야 할 이유가 충분히 있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이게 아니다 싶으면 내 자존심, 내 체면이 깨끗이 물러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피 흘리신 이유가 바로 그것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우리가 날마다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 땅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할 땅에서 제 1번지는 내 속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내 속에서 이루어지이다’ 그런 뜻으로 알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셔서 우리를 제사장으로 삼으셨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제사장의 역할은 두 가지입니다.

제사장은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또 중요한 것 한 가지는 제사를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나아올 수 없는 사람들의 죄를 대신 속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성전에 휘장이 찢어져 버렸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 놓여 있던 그 휘장을 우리 예수님께서 찢어버리셨습니다. 누구나 하나님께 나올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제사장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드셨다는 뜻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께서 피 흘려 돌아가셨으니, 그 분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바라노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7절에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구름타고 오신다고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믿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심지어 통일교에서는 이걸 이렇게 풀었습니다. ‘구름은 곧, 물을 의미하는 거다. 사람은 90% 이상이 물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구름타고 오신다는 얘기는 예수님께서 다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다는 얘기다.’ 자신이 재림 예수라고 주장하기 위해서 그렇게 억지로 풀어냈겠죠.

도대체 구름타고 오신다는 게 무슨 말씀인가요? ‘구름타고 오신다’라는 구절이 성경 어디에 있는가를 찾아보시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다니엘서 7장, 마태복음 16장, 사도행전 1장에도 나옵니다. 종합해보면, 구름타고 오신다라는 것은 아주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오신다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께서 오신다!’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모습으로 오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기쁨으로 환영을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는 그런 모습으로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7절 뒷부분을 보세요,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하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이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도록 오신다는 뜻이 구름타고 오신다는 겁니다. 우리나라에만 해도 재림 예수가 꽤 많이 있습니다. 자칭 재림예수요. 오래 전 한 150명 된다고 그랬으니까 얼마나 늘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상상보다 훨씬 많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하나는, ‘내가 재림 예수다’라고 남에게 설명하고 가르쳐야 하는 분들은 전부 가짜입니다.

초림 때의 예수님은 아무도 알아볼 수 없는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지만, 재림 때의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바로 알 수 있는, ‘아! 오시네? 그럼 빨리 회개하고 돌아서야지’ 이럴 겨를도 없이 오십니다.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있어봐야 소용도 없겠지만 한국에 있는 재림 예수라고 하면서 소개를 하거든, 설명이 필요한 분은 재림 예수가 아니라고 아십시오. ‘설명도 필요 없고 감히 이런 말 저런 말 할 겨를도 없고, 그 앞에서 펑펑 울던지, 아니면 기쁨으로 그 분을 맞이하던지 둘 중에 하나’라는 의미로 구름 타고 오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사말이 긴데요, 좀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4절 뒷부분을 다시 한 번 보십시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는 표현에서, 장차 오실 이가 누굽니까? 예수님이요? 표현을 예수님이라고 하시면, 5절에 길게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합니까? 4절 부분이 이해가 잘 안 되시면, 8절을 보세요.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여기에 ‘장차 올 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시지요? ‘장차 올 자’는 성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4절로 다시 가 보겠습니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장차 오신다는 이 표현 때문에 예수님이라고 하시는데, 이 부분은 분명히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 다음에 성령이 있고 그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왔잖아요. 그런데 7절에 오시리라 하는 분은 누구시죠? 예수님이시죠? 그럼 장차 예수님께서 오시는 거예요, 성부 하나님께서 오시는 겁니까? 4절, 5절이 성부 하나님, 성령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이렇게 연결 되지 않습니까? 세 분이 대등한 위치에 놓여 있다는 뜻입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이 편지의 밑바탕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겁니다. 성부 하나님이 오신다고 하시면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곧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이 곧 하나님께서 오시는 겁니다. 요한이 특별한 의도가 있어서 이렇게 쓴 것이 아니라 너무나 자연스러웠던 겁니다.

훗날 이단으로 찍힌 어떤 이들이 ‘예수는 위대한 인간이었다’라고 하는데 이 말은 참 조심해야 합니다. 이 말은, 뒤집으면 ‘하나님이 아니었다’라는 말입니다. 또 어떤 이는 ‘실제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온 인간이 아니라 영으로만 존재했다가, 잠시 존재했다가 사라지신 분이다. 영으로 이 땅에 왔다 간 것이지 실제로는 인간은 아니었다.’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 있었던 무서운 이단입니다마는,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거나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이 훗날 등장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우리는 쉽게 씁니다마는, 이 말이 받아들여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성도님들이 피를 뿌렸는지 모릅니다. 쉽게 얻은 표현이 아닙니다. 그런 어려운 싸움을 겪고 우리는 쉽게 이런 믿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도 요한이 전해주는 이 말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사도 요한이 전해주는 이 말은 굉장히 신임할 만한, 신빙성이 높은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요한이 어떤 인물인지 생각해 보세요.

 

요한복음을 다 읽어봐도 요한이라는 사람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혹시 요한이 보이면 세례 요한입니다. 요한이 요한복음을 쓰면서 자기 이름을 쓰지 않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품에 안겨서, 예수님께 꼭 응석을 부리는 듯 하는 제자가 나옵니다. 요한입니다. 두 번 그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고 하실 때에, 베드로가 옆구리를 쿡 찌릅니다. ‘얘, 예수님께 물어봐, 누군가?’ 그 때 예수님 품에 의지해서 ‘예수님, 예수님을 팔 자가 누굽니까?’ 응석부리듯이 물어봤던 제자가 요한입니다.

훗날 예수님께서 다시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을 때에도 예수님의 품에 안겨 있던 제자가 요한입니다. 예수님을 그렇게 좋아했던가 봐요. 그런 면만 있는 게 아니고, 그 엄마가 치맛바람을 일으켜서 한 아들은 좌의정에 한 아들은 우의정에 앉혀주기를 요청했던 아들도 요한입니다. 여하튼 그 형제에게 예수님께서 붙여준 별명이 ‘우뢰의 아들’ 아닙니까? 보아너게요. 도대체 얼마나 시끄러웠으면 별명을 ‘우뢰의 아들’이라고 했겠습니까?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그 모친을 부탁했던 제자도 요한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종합해보면, 예수님의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목격한 사람이 요한입니다. 예수님도 안 먹으면 배가 고팠고, 주무시지 않으면 몹시 졸렸습니다. 오죽하면 태풍이 치는 그 배 위에서 주무셨다고 합니까? 때로는 슬퍼하며 때로는 고통 가운데서 기도하던 인간 예수를 직접 목격하기도 했으며 그 품에 안겨 있었던 사람이 요한입니다. 그 요한이 예수를 가리켜서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일반적으로 선지자가 고향에서 대접을 잘 못 받아요. 예수님께서도 고향에 가셨을 때, 사람들이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냐?’ 이거 참 안 좋은 표현입니다. 아버지가 혹 돌아가셔서 안 계셨을지라도, 왜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합니까? 요셉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요. 빈정거리는 의미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예수의 누이와 동생들이 여기에 있지 않느냐?’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지나 내나 다를 것이 뭔데?’ 그러면서 예수를 배척해 버렸던 적이 있습니다.

어릴 때, 함께 자란 사람이 나중에 훌륭한 목사가 되었어도, 존경하기보다는 어릴 때 한 짓을 생각하며 흉보기가 쉽습니다. 반면에 인간적인 모든 모습을 직접 본 요한이 ‘이 분은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하면 신빙성이 아주 높은 겁니다. 직접 목격하고 직접 체험한 증인이 여기에 살아 있는데도 후대에 어떤 자들이요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동거할 수 있겠느냐?’ 이건 자기 생각입니다. 만약에 후일에 그런 사람들을 직접 만나게 된다면 요한은 분명히 말할 겁니다. ‘누가 뭐라 해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요한1서 1장 1절에 보시면,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고 합니다. 눈으로 봤을 뿐만 아니라, 주목하고 자세히 봤고 손으로 더듬어 만져봤다고 합니다. 그랬는데도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라고 고백하는 겁니다.

다른 모든 제자들이 사라진 후에 혼자서 교회를 돌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이었겠습니까? 모든 권력을 다 가진 대통령도 못해먹겠다는데, 교회 지도자가 무슨 힘으로 교회들을 돌아보겠습니까? 권력이 있어요? 재력이 있어요?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온갖 어려움과 고통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라는 이 감격으로 이겨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돼서 이 땅에 와서 나를 그 품에 품어주셨다는 이 감격, 이것만 가지고도 모든 어려움들을 다 이겨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생애를 다 바쳐서 헌신할 수 있었던 것,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감격, ‘하나님이셨던 그 분이 인간이 돼서 이 땅에 오셔서 나와 함께 그렇게 지내셨다’ 이 감격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을 자세히, 자세히 다시 들여다보면, 사도요한이 하고 싶었던 편지의 서두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라는 것입니다. 이걸로 서두를 끝내야 하는데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신 그 예수님의 생각 때문에 감격에 벅차서 말을 추가로 해 놓은 것이 5절 끝 부분부터 7절입니다. 그 말이 왜 들어갔는지 유심히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5절 중간쯤에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했으면 편지 서두는 끝났습니다. 그 다음에 바로 8절로 이어지면 정상입니다. 그런데 그 중간에 있는 것 보세요. 안 들어와도 될 건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한 감격이 쏟아져서 이 엉뚱한, 엉뚱하다 하면 이상하지만, 이 감격스러운 말이 삽입된 겁니다.

보세요.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왜 아멘이 붙었습니까? 감격스럽단 얘기 아니에요? 바로 그 예수님을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감격입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한 이야기를 잠시 했는데, 그 감격에 겨워서 이 몇 부분을 ‘아멘, 아멘!’ 하면서 삽입을 시켜 놓은 것입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요한이 여기서 얼마나 감격하고 감사했을 지를 상상해보셔야 합니다.

 

요한은 이 감격 때문에 평생의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잘 감당해 나갔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사랑하면 수고스럽지가 않습니다. 사랑하면 시키지 않은 일도 스스로 알아서 합니다. 혹시 직장 생활도 먹고 살기 위해서 억지로 하는 일이 아니고, 회사나 맡고 있는 일 자체를 사랑하세요. 그게 힘이 덜 드는 방법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면 음식물 쓰레기통을 들고 엘리베이터 타고 20층을 오르락내리락 해도 쪽팔리지 않습니다. 선생님을 사랑하면 공부하기가 참 쉽습니다. 선생님을 사랑하면 심부름도 하고 싶어서 못 견딥니다. 스스로 하는 일은 피곤해도 즐겁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 우리 속에 살아있다면, 우린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이 그렇게 힘들지 않습니다. ‘내가 모시고, 함께 어울리고, 뒹굴었던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더라!’는 이 감격 때문에 요한은 그 모든 어려움들을 이겨낼 수 있었을 겁니다. 품에 안겨서 응석을 부렸던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그래서 요한은 죽을 때까지 가르쳤던 말씀이 ‘서로 사랑하라’였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그걸 잊지 않았기 때문에, 때가 되고 기회 있을 때마다, 서로 사랑하라고 그렇게 열심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여러분도 우리 하나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이 사랑을 누리며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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