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손그늘


여러 번 망설이다가 하나님의 영광과 후배들의 신앙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어서 자신의 얘기를 적어본다. 경주에서 40리 떨어진 내남면이 나의 고향이다. 거기서 사라호 태풍 때 우리 누나가 머리카락을 잡고 물에 둥둥 띄워서 데리고 나왔단다. 그 후 포항으로 이사해서 술찌기와 구호용으로 나왔던 옥수수 가루로 몇 년을 살았던 모양이다. 술찌기를 얻기 위해 꼭두새벽에 집을 나서던 엄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언젠가는 5원짜리 건빵 한 봉지로 영근이와 나눠 먹고 점심을 때운 기억이 난다.

지금은 큰 학교가 되었지만 국민학교 3년까지는 변두리 학교에서 다니다가 4학년 때 시내 중앙의 큰 국민학교로 전학을 하게 돼서 만화책에 재미를 붙였다. 1년 동안 열심히 읽었던 모양이다. 비용은 누나 돼지 저금통에서 몰래 나오기도 했고, 엄마 치마에서도 나왔으리라. 몰래 나온 것만큼 야단도 많이 맞았지만 일년 동안 열심히 보다가 4학년 마지막 시간에 담임 선생님의 한 마디에 자극을 받아 만화와는 손을 끊었다. 6학년 말이었던가 보다 "엄마, 중학교만 보내주면 고등학교는 내가 벌어서 다닐께" 그랬는데 그때 담임이셨던 김 복원 선생님과 윤 명달 교장선생님 덕택에 장학금으로 중학교를 마칠 수 있게 되었다. (감사의 뜻으로 밝혀둔다. 이 글을 쓸 때 이 분은 대구 성북교회의 장로님으로 계셨다)

6학년말 학교에서 시험이 있다고 등교하란 말을 듣고 두 번이나 주일날 학교에 간 적이 있었다. 막상 가니까 시험도 없고 일찍 집에 갈려니 교회 안간 것이 아버님께 미안해서 집에도 못 가고 해서 간 곳이 거의 2년 전의 단골 만화방이었다. 얼마 후 중학교 입학 시험에 1점 차이로 2등을 했다. 밭 가는 기구가 호미가 아니라 쟁기라고만 썼더라도 3점 차이로 1등 할 수 있었는데... 약간 억울해서 내린 결론이 두 주일 예배 결석한 것이 원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다시는 주일을 어기지 않겠다는 나의 고집은 이래서 싹이 텄다. 중고등학교 6년 동안 이 고집 때문에 학교 성적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것은 자세히 기록치 않으련다. 다만 온갖 자격 시험을 주일에만 치르는 것과 자격증이 없으면 실력이 있어도 좋은 성적을 주지 않는 상고의 특성만 생각해 보면 얼마나 유혹이 컸을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은행에 들어 갈려고 상고로 진학했다. 1학년말에 은행시험이 주일에 있다는 것을 알고 께름칙해졌다. 2학년에 진급하면서 진학반과 취직반 중에서 취직반을 택했다. 마음 한편으로는 께름칙하기도 했지만.

우리 집 생활은 그야말로 최하위의 생활이었다. 중학교 면접 시험 때 입고 간 바지는 사실 누나 것이었는데 조금 고쳐서 내가 입고 갔던 모양이다. 면접하시던 선생님이 "너 누나있지? 내가 잘 안다." 그 때 밖에서 보고 섰던 엄마가 돌아서서 그 선생님 욕을 하며 울었단다. "그 놈의 선생 알기는 잘도 안다." (대학 3학년 때 들음) 고등학교 때에는 더욱 생활이 어려워져서 도시락을 싸갖고 다닐 수가 없었다. 도시락 반찬이란 것이 생된장이거나 그 비슷한 것이 고작이었고, 쌀이란 것은 보지도 못했으니까. 혼자서 돌아앉아 도시락을 먹는 게 보통이었다. 그래도 효자 소질은 있었던 모양이다. 이런 도시락을 싸주는 엄마 마음은 어떨까? 하면서 도시락에 대해선 일체 언급을 하지 않았으니까. 주일 문제로 은행시험을 치지 않아야겠다고 결심을 하던 그 때가 가장 비참한 생활을 했었다. 74년이니까 재수하던 땐가보다. 그 때까지 세도 주지 않고 엄마가 일을 거들어 주면서 살던 집에서 엄마가 남의 일을 도와준 것이 오해가 돼서 쫓겨났다. (물론 나중에 그 분이 사과는 했지만) "엄마, 방세도 없이 어떻게 이사를 가?", "쫓겨날 생각하고 가는거지. " 맏이란 놈이 이런 가정 형편을 무시하고 공부한답시고 집에 붙어 있기란 정말 괴로운 일이었다. 좌우간 이렇게 얻은 단칸방에 일곱 식구가 지낼려니 공부할 공간이 없었다. 이런 단칸방에 장농과 책상을 들여놓고 7명이 눕는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했었다. 저녁 일찍 걸상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그 밑에서 자다가 새벽녘에 의자를 내려놓고 공부를 하곤 했다. 물론 내 엉덩이 밑에는 영근이 얼굴이 와 있는 게 보통이고, 그런 생활 속에서 안경 도수가 높지 않은 것만도 축복이겠지.

고2 때부터 고민은 현실화됐다. 이런 가정형편을 무시하고 대학진학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주일에 시험치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결국 3학년 진급하면서 진학반으로 반을 바꾸고 말았다. 이때 수양회에서 많은 용기를 얻은 것도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다. 그때의 기도는 "하나님, 만약 당신의 아들이 하는 이 행동이 옳다면 대학진학을 허락하시고, 만약 허락치 않으신다면 그 후의 주일 문제에 대해선 책임을 질 수 없습니다. " 이런 기도가 사실 당돌하기도 하지만 내게는 분명히 자신이 있었다. 만약 옳은 판단이면 하나님께서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이요. 사실 이것을 믿은 것이지만 만에 하나 그릇된 판단이라 해도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했으니까 축복해 주시리라 믿었다. 그로 인해 고3 한해는 아버지에게서도 버려진 아들이 되고 말았다. 툭하면 아버지와 싸우고는 (싸운댔자 잔소리만 듣고 앉았는거지만) 교회 가서 울다가 오곤 했다. 집사란 분이 신앙으로 살려는 아들을 이렇게 이해 못할까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오죽했으면 집사의 입장에서 주일이라도 시험만은 쳐보라고 강요하지 않을 수 없었을까 싶어 미안해서 낯을 들 수가 없었다. (아버지만큼 이해심 많은 분도 실은 보지 못했다) 진학반에 있어도 실력만 있으면 은행시험을 칠 수 있었다. 선생님들이 많이 권하기도 했지만 실력에 관련된 문제가 아니기에 완강히 거절하고 말았다. 또 하나 부언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있으리란 것은 확신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대학에 갈 만한 실력이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우리 학교를 수석 졸업한 선배가 경대에 떨어지는 것을 보았고 사실 학교 수준도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경북대 입학 정원이 1,600명이었는데 포항에 있는 고등학교를 전부 통털어서 재수생까지 포함해서도 4명밖에 가지 못했다. 거창고등학교에서 잘 하는 애들은 서울로 가고 2진 그룹만 해도 70명이 왔다는 판에) 그런데다가 2년 동안이나 주산만 만지다가 고3 일년 동안 공부해서 대학 간다는 것은 무리도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교대라도 갈려고 했었다. 일년 동안은 좌우간 열심히 공부했다. 두 달 만에 엉덩이에 멍이 들도록 의자에 앉아 있기도 했고, 변소가는 시간이 아까워 여름에 국이나 물조차 먹지도 않을려고 했었으니까. 거의 초죽음 상태가 돼서 입학원서를 쓰게 됐는데 등록금도 싸고 적성이 맞는 사대를 택해서 영어과로 내려다가 도무지 겁이 나서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좀 약한 곳에 낸다는 것이 지리과였다. 시험 치러 오는 차 안에서 친구 녀석이 "순관이 너 색맹 아니니?" 아차 하는 순간의 실수로 합격할 수 없는 과에다가 원서를 쓰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도 2지망이 있으니까 시험이나 치자 싶어서 필기시험은 쳤다. 그 때 지리과가 9:1이었고 겁을 먹었던 영어과가 2:1이었다. cut line은 지리과가 650점 만점에 영어과보다 30점 정도 높았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래도 용케 필기시험은 합격하고 행여나 싶어 신체검사를 받았지만 결국 합격통지서는 나오지 않았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엄마가 그 소식을 듣고 정말 기뻐했단다. 눈 때문에 떨어졌으니 핑계거리는 있고 합격했더라면 등록금이 없어 못 보냈을텐데 남부끄러워 어떻게 사느냐는 얘기였다. 하나님께 했던 기도는 요구하지도 않은 샛길로 빠진 셈이다. 기도가 부족한 탓인 줄 알고 또 한 해를 지나기로 했다. 엄마의 격려도 있고 해서. 그 원인을 이렇게도 생각해 보았다. 애당초 실력이 돼서 대학 갈려고 한 것도 아니면서 과 선택에 너무 신경을 쓴 게 잘못이 아닐까?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아들은 가장 좋은 것을 요구해야 한다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믿는 것은 하나님뿐인데 그렇게 소심해서야 하는 생각도 들었다. 원서를 쓸 때 이런 생각을 안한 것은 아니지만 설마 했더니 그렇게 되고 말았다. 신앙으로 살려거든 배짱이나 크게 가져라.

한 해 동안 눈치밥 먹고 지내기란 여간 괴로운 것이 아니었다. 집안의 어려운 사정을 눈으로 보아 가면서 돕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괴로웠다. 그 때의 일기장 한 페이지를 그대로 적어본다.

- 1974. 8. 28 wed. windy -
거의 반년 가까이 취직에 대해선 아무 말씀 안하시던 아버지. 어제 건국대 특차모집에 응해 보려니까 "해봐라" 하시던 아버지가 저녁에 이번이 마지막이다 하시면서 심하게 꾸중하셨다. 집안 사정을 내가 잘 알지만 빚이 ?만원이라는데 너무 놀랬다. (지금 생각해 보면 대학 등록금의 두, 세배 정도되는 금액이었다) 거의 없는 줄 알았는데... 마음이 너무 괴롭다. 아버지 말씀에 순종하려니까 주일 시험이 너무도 걸린다. 안 듣자니 집안 형편이 말이 아니고, 그래도 겨우 버티어나갈 정도만이라도 된다면 했는데...(후략)

- 그 다음날 일기 -
주산을 하나 사서 연습을 해보고 1급은 되겠다고 안심했다. 주산 연습을 하고 있으니 엄마가 그러다가 두 쪽 다 실패하면 안되니까 은행은 포기해 버리라고 하셨다. 그 자리에 앉아서 두 모자는 서러움에 겨워 울고 말았다. 엄마의 위로에 힘을 얻고 다시 공부를 계속했다.

일기장 밑에는 주의 뜻대로, 하나님의 뜻, 나를 인도하소서, 진학? 취업? 투성이다. 어쨌든 다시 입학원서 쓸 때가 되었을 때 또 망설여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과 선택에 겁이 나서 쓰기가 힘들었지만, 언제 네가 실력으로 대학가려 했더냐는 자문에 신앙으로 살려거든 배짱도 한번 내밀어 보라는 자답으로 영어과에 냈다. 그리고는 합격했다. 일년 동안 아이들 몇 명 가르치면서 조금 벌었지만 써버린지 오래였고 입학금은 그나마 은행의 학자금 융자 제도가 그 해 생겨서 빌려서 낼 수 있었다. 대구로 오기 직전에 하나님은 내 기도의 응답을 정확하게 해주셨다. 영근이가 하루는 "형이 은행 시험을 쳤더라고 신체검사에서 떨어졌을 거라던데" 색맹은 은행에도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아찔함과 감사는 정말 표현하기 힘들었다. 계속 취직반에 있었더라면 5급 공무원이나 (지금의 9급: 혹시 공무원 되시는 분이 이 글을 보시더라도 오해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그 때 분위기나 제 생각이 그랬다는 뜻일 뿐입니다) 놈팽이를 면치 못했으리라는 생각에... 동생이 내가 졸업한 그 학교에 들어가니까 선배들이 실수한 이야기를 선생님들이 해 주는데 들어보니까 자기 형 이야기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해준 이야기였는데 내게는 수년동안 치열한 전투를 겪은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그리고는 대구로 왔다.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과 새로운 환경 속에서 나의 신앙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단련시켜 주실까?라는 의문을 품고...

이후의 변화는 이 곳을 떠난 후 언젠가 쓸 기회가 있기를 바라며 결론을 내리고 싶다. 고전 1:27∼29을 결론으로 대신하고 싶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색맹이란 handicap을 안고 계속 은행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더라면 그만큼 지혜없고 약하기만한 내가 되었을 것이다. 완전히 무(無)로 돌아갈 결과를 위해 밤낮을 노력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믿음은 이 어리석음을 극복하게 했고, 말씀대로 하나님 앞에서 자랑치 못하게 되고 말았다. 성북교회 학생들에게 꼭 이렇게 하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효도의 방법이 다르듯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도 개인에 따라 다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애 태우며 피해버렸던 그 길을 내 동생은 밟아 왔고 나 역시 말리지도 않았으니까. 억지가 아니라, 또 남이 그렇게 했으니까가 아니라 믿어진다면 그렇게 하라고 권하고 싶다. 믿는대로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니까 크게 믿는 자에게는 큰 것으로 채워 주시리라. 너무 가정 형편이 어려워 취직하고 싶어했었다. 그러나 나의 신앙은 취직을 막아버리고 대학진학을 강요했고,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신앙대로 살아온 지금은 가난의 추격에서 벗어나 한숨 돌리고 있다. 그렇게도 가슴 아파 하시던 아버지도 결국 아들에게 한마디의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네가 옳았다." "아버지, 제가 옳은 것이 아니라 내 속에 계시는 하나님이 옳으신 것입니다."
어리석은 내 속에 하나님이 계시는 한 나는 평생 올바른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1976년 대구 성북교회 학생지 에덴 4호에 실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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