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과를 왜 만드셨느냐고?


사람을 자신의 형상을 닮게 만드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사람이 순종하는가 안 하는가를 시험하기 위해서 선악과를 만드셨다는 설명은 어딘가 인간적인 냄새가 풍긴다. 하나님께서 왜 사람을 지으셨는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고(창 2:26)'라는 말씀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만들어졌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3차원적인 우리의 육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인격이라고 말하는 지, 정, 의 등을 말하며 그 외에도 하나님의 성품 중에는 사랑, 공의, 자유, 전능, 거룩... 등이 있다. 자기 모습을 닮게 사람을 만드신 이유가 무엇일까? 소요리문답 제 1번 사람의 근본된 목적이 무엇이뇨?라는 질문의 답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이라고 한다.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란 말은 영원하고도 진실된 교제를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신 이유는 아름다운 교제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너무나 현격한 신분의 차이, 즉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진정한 교제가 가능할까? 사람 사이에도 주인과 종, 군에서 고참과 신참은 진정한 교제가 있을 수 없다. 대등한 교제를 위해서는 신분을 벗어던지던가 계급장을 떼내야 한다. 너무나 현격한 차이가 있는 사람 사이에 진정한 교제가 있으려면 한 사람이 내려오던지 아니면 다른 사람을 높이던지 해야 가능하다. 가령 어떤 부자 청년이 너무나 가난한 처녀를 사랑하게 되었다면 그리고 가난 때문에 온 식구가 결혼을 반대한다면 어떻게 일을 처리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 결혼에 필요한 비용이나 체면유지에 필요한 돈을 몰래 주면서 결혼을 하려고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방법은 바로 인간을 하나님의 위치까지 격상시키는 것이었다. 인간의 낮은 자리를 하나님의 자리까지 높여 놓은 것이 바로 선악과이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에서 죽음은 분리를 의미한다. 즉 선악과를 따먹으면 너와 나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의미가 되며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떠날 수 있는 자유를 주신 것이다. 떠날 수 없어서 떠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떠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떠나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왜 선악과를 만드셨느냐고 하나님께 시비조로 나오는 사람은 왜 내게 이렇게 큰 자유를 주셨느냐고 대드는 것과 똑같다. 죄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너무 사랑한 죄 뿐이다. 떠나는 것을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등한 인격으로 대한다는 점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떤 존재로 만드시기를 원했는지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의미 속에는 바로 이와 같은 깊은 하나님의 배려가 있는 것이다.

요즈음도 비슷한 이야기가 가능할지 모르지만 아주아주 오랜 옛날에 총각 주인이 노예를 사랑하게 된 이야기가 있었답니다. 죽으라면 죽고, 사랑하라면 사랑할 수밖에 없는, 도무지 거역이라고는 할 수 없는 노예를 사랑하게 되면 어떤 방식으로 결혼을 추진했을까요? 제일 먼저 무슨 일부터 시켰을까요? 쉽게 답이 떠오르면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신 심정을 이해한 셈입니다. 모르겠다고요? 위의 글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다시 읽어보세요. (이 글을 읽으며 노예처럼 말 잘 듣는 그런 마누라 하나 얻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남자들이 꽤 많아요. 하나님 꼭대기에 올라가려는 간 큰 사람이지요)

선악과를 따 먹을 줄 알고도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 줄 미리 알고 계셨느냐고 묻더군요? 당연히 아셨지요. 그러면 왜 알면서 만드셨느냐고요? 미리 알면 못 만드나요? 불행한 결과를 예측하면서도 일을 저지르는 경우는 대단히 많습니다. 얼마 전 TV에 재미난 사람이 출연했더군요. 자신은 지극히 정상이라고 생각하는데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아서 자기가 비정상적인 사람이 됐다고 그러더군요. 아이를 강하게 키우는 아버지의 이야기인데 아이가 6살적 겨울에 얼음을 깨고 아이를 얼음 속에 집어 넣었대요. 방청석에서 누군가가 "아이 어머니와 마찰이 없었느냐?"고 물으니 "왜 없었겠어요 미쳤다고 난리가 났었지요." 다른 방청객이 또 물었어요. "혹시 감기 걸릴까 걱정되지 않았어요?" "감기가 뭡니까? 혹시 심장마비라도 걸릴까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몰라요." 국민학교를 졸업할 때 아버지와 함께 15박 16일 일정으로 전국을 구경한 후에 3박 4일로 서울 시내를 혼자서 다녀오라고 4만원인가 5만원인가를 줘서 보냈대요. 첫날 오후에 전화가 왔는데 낌새가 이상해서 혼자냐고 물었더니 무척 망설이다가 하는 대답이 엄마와 함께 롯데월드에서 종일 놀고 있어요 하더랍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혼자 떠나 보내니까 엄마가 하도 걱정이 돼서 남편 몰래 아들을 따라간 모양입니다. 당장 돌아오라고 불호령을 내려 소환하고 다음에 다시 혼자서 아이를 보냈답니다. 멋있는 아버지라고 그 날 박수 많이 받고 돌아갔어요.

아이를 얼음 물에 집어 넣고 그 아버지가 얼마나 가슴 졸이고, 서울로 떠나 보내놓고 그 아버지가 얼마나 걱정하고 있었는지 잘 알 수 있었답니다. 왜 그 아버지는 그런 위험한 짓을 자초합니까? 그것은 아들을 강하게 키우겠다는 신념 때문입니다. 특히 방청객들이 재미있어 한 것은 아이를 얼음 물에 집어 넣으려면 아버지가 먼저 얼음 구덩이에 들어가야 하는데 추워 죽겠지만 전혀 춥지 않은 척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웃음까지 지어야 했다는 고백이었습니다. 그 분은 그렇게 하면 고생할 줄을 뻔히 알면서, 또 일이 잘못되면 큰일이 날 줄 알면서도 많은 고생을 스스로 했어요. 자식을 강하게 키우겠다는 사람도 이 정도의 희생을 감안하면서 일을 저지르는데 그보다 몇 차원이나 높고 멋있는 하나님께서 멋진 일을 하겠다는데 못 할 것 같습니까?

무협지나 중국 무술 영화에 흔히 나오는 장면이지만 두 사람이 싸우다 한 사람이 넘어졌거나 칼을 놓치면 일어나기를 기다리거나 칼을 잡기를 기다려주는 행위는 대단히 위험하지만 무사정신이 뭐길래 잘못하면 자신이 죽을 위험도 각오하고 멋지게 싸울려고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이보다 못할까요?

알면서 고생길로 스스로 들어가는 전형적인 예가 사랑에 빠지는 것입니다. 혹시 노예를 사랑한 주인의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어떤 주인이 자기 노예를 사랑하게 되면 그 노예에게 맨 먼저 무엇을 주는지 아십니까? 옛날의 노예는 사람이 아닙니다. 짐승보다 못한 존재이거니와 죽으라면 죽어야 하는 존재였답니다. 그런 노예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면 맨 먼저 주는 것이 자유랍니다. 너는 더 이상 나의 노예가 아니다라고 선언해버립니다. 노예로 있으면 절대 주인을 떠나지 못합니다. 무엇이든지 주인이 요구하는 대로 다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자유를 주면 자칫 잘못되서 떠나 버릴 위험이 있는데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자발적인 사랑과 순종을 원하기 때문입니다.한 여인을 너무나 진실하게 사랑하고 그녀와 결혼하는 것이 평생 소원이면서도 결혼하지 못하고 한 평생 그리워만 하며 사는 남자들이 가끔 있어요. 너무 사랑하게 되면 그녀를 차지하기 위한 억지나 술수를 부리지 못하게 됩니다. 잔재주나 엉큼한 생각을 전혀 할 수 없는 바보가 되는 거죠. 그래서 순수한 첫사랑은 잘 깨어진답니다.

Simpson부인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영국의 황태자가 왕의 자리를 버리고 사랑한 여자이지요. 이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왕의 자리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생길이 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 사랑입니다. 확실하게 기억은 못하지만 지금 영국 여왕의 큰아버지인가 그럴 겁니다.

결코 실패하시지 않는 하나님
'하나님은 사랑 때문에 눈이 멀었다' 이것은 어느 책 이름인데 기대를 갖고 찾아보았더니 좀 실망스러워 그냥 돌아와 버렸어요. 그러나 성경은 정말 사랑 때문에 눈이 멀어 실수(? 난 절대로 실수라고 생각 않지만)를 해버리고 고생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담긴 책이랍니다. 왜 실수가 아니라고 하느냐 하면 먼 훗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날 지나온 과거를 돌아보면 아담 이후 이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이고 이런 과정을 예상하시면서도 길고 긴 고통의 과정을 거치면서까지 우리와 멋진 교제를 원하신다는 것을 다 알게 되고 나면 이 모든 일들이 참으로 길고 길었던 사랑의 여정이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게 될 것을 아는 까닭입니다. 말하자면 타락 이후 지금까지는 결혼 이전의 연애 기간이라고나 할까요?

자신의 희생을 각오하신 하나님
아버지가 능력이 있는 아이에게 칼을 주면 잘 사용하는데 능력없는 아이에게 칼을 주면 누가 괴로울까요? 물론 칼에 베이면 자신이 더 아프지요. 그러나 아버지는 더욱 가슴이 아프지요. 선생님이 편하려고 작정을 하면 학생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하면 안되요. 학생들을 인격적으로 대하면 그 반은 항상 시끄럽고 지각 많고 학교에 낼 것 항상 꼴찌하고 그래요. 결국 선생님이 희생을 각오하지 않으면 인격적으로 대우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아픔이 참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심지어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까지 동원합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쪽 팔리게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란 표현까지 써 가면서 인간을 사랑하셨다는 사랑의 기록이 성경입니다. 선악과를 두신 결과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 곁을 떠났고 사랑의 하나님은 다시 이 사람을 자신에게 데려와야 하고 공의의 하나님은 그냥 용서할 수 없고. 이런 딜레마 속에서 해결책은 결국 자신의 희생을 각오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독생자를 희생시키시면서까지 인간을 사랑하신 증거가 바로 선악과랍니다. 잘못이라면 사랑할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을 사랑한 것이 잘못이지요.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생각해 봅시다
왜 그 아버지는 자식에게 집을 떠나서도 충분히 살 수 있는 재산을 미리 떼어 주었나요?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없애버릴 줄을 몰랐을까요? 아들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모습이나 거지꼴을 하고 돌아오는 아들을 즉시 알아본 점에서 이 아버지는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이야기가 일반적인 아버지의 모습입니까? 아들이 모든 재산을 허비하고 거지꼴이 되어서 다시 아버지 앞으로 돌아올 것을 알고 기다리는 아버지는 정말 바보같은 아버지가 아닐까요? 이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를 나누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가 바로 선악과를 만드신 하나님이라고 결론이 날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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