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 제도의 개선을 바라며


몇 년 전 추수감사절인지, 맥추감사절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느 감사절 때 헌금 수전을 맡았다. 공교롭게도 우리 교회는 감사절을 한 주간 늦게 지키게 됐다. 순서에 따라 헌금을 하고 설교 후에 감사헌금을 또 하게 됐는데 맨 앞 줄에 앉았던 선교사 사모님께서 황급히 가방을 뒤져 헌금을 찾는 동안 짧은 시간이었지만 기다려야 할지 그냥 지나가야 할지 무척 망설였는데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는 낯뜨거운 기억이 되어 버렸다. 왜냐하면 그 전 주일에 선교사님은 어느 교회일런지는 몰라도 감사절을 지켰을 것이고, 거기서 두 분은 감사절 헌금을 하셨을 것으로 짐작이 됐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 해도 최소한 그 주일에 감사절 헌금을 준비하지 않으셨음은 당황해 하시던 사모님을 보아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헌금을 미리 준비해 오지 않은 그런 상황이라면 헌금을 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이 된다. 웬만큼 뚜렷한 소신없이 되어질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굳이 선교사 사모님을 언급하는 것은 별로 뚜렷한 소신도 없는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도 없이, 아니 어쩌면 싫어하면서도 주변 사람들의 눈 때문에 마지 못해 푼돈이라도, 넣는 시늉이라도 하는 사람이 없겠는가 말이다. 과부의 두렙돈에 관심을 가졌던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현재의 헌금제도는 개선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현재의 헌금제도가 존속해야 할 이유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 우리 교회 내에서 헌금 제도를 개선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 것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햇수만으로도 12년정도 지났다. 들은 바 현재의 헌금제도가 필요하다는 주장 중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다.

헌금 사고를 방지하기 위하여 현 제도가 필요하다는 설명에 대하여
이 설명을 듣고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시골 조그마한 교회에서도 헌금함을 이용해서 헌금하는 곳이 있다고 들었다. 많은 교회에서 이름을 쓰지 않고 헌금함을 이용해서 헌금하는데 그런 교회는 헌금 사고에 대한 걱정이 없고 우리 교회만 헌금 사고의 개연성이 있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교회에서 헌금을 다루는 분들은 가장 믿을 수 있는 분들일텐데 그런 분들에게서 헌금 사고를 두려워 해서 제도개선이 어렵다면 도대체 순교자의 후예요, 가장 잘 믿는다고 자랑하는 우리 교단의 신앙이란 그렇게도 힘없는 말만의 신앙인가? 어떤 회사의 경영 방침 중에 '일을 맡기면 믿으라. 믿지 못하면 일을 맡기지 말라'는 말이 있다. 돈벌이를 위한 회사에서도 이 정도인데 언필칭 영혼을 구원한다는 교회가 그 수준을 넘어 가기는커녕 그보다 못한 수준이라면 어떻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단 말인가.

헌금제도를 개선해야 할 가장 시급한 이유
믿지 않는 사람이 교회를 찾아 왔을 때 매주 드리는 헌금은 상당한 부담이 된다. 기존 신자의 입장으로도 헌금이 부담스러운 사람이 있는데 하물며 초신자에게야 당연하지 않겠는가? 적어도 기쁨으로 헌신하고 헌금할 만한 믿음이 생길 때까지는 헌금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제도가 개선되어야 한다. 헌금하는 것도 가르쳐야 한다고 대답하시는 분이 더러 계셨기에 하는 말인데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처음 교회 나온 사람에게 무엇부터 가르쳐야 하는가? 한 사람 데려오기 위하여 무진 고생을 해놓고 편안한 마음으로 교회를 출입할 수 있게 조치해 주어야 하지 않는가? 헌금문제로 교회 출입을 중단한 초신자가 있는지 없는지, 심지어 헌금 문제에 불만을 품고 다른 교회로 옮긴 이가 없는지 관심을 좀 가지자. 그런 사람은 다른 문제에 있어서도 결국은 갈 사람이었다는 식으로 말하지 말자.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는 헌금은 헌금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제도적으로 그렇게 하도록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헌금하는 것도 교육되어야 한다는 설명에 대해서
비단 헌금만이 급선무가 아니라 교회에서 교육되어야 하는 시급한 일이 하나 둘이 아니다. 헌금 교육보다 더 중요한 교육이 많이 있다는 말이다. 교회 교육이 제대로 되면 헌금 교육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현 제도는 헌금 교육을 방해하고 있다. 헌금에 대해서 설교를 하면 강요하는 듯 하거나 부담을 주는 것 같아서 설교하기가 힘이 든다는 말씀을 가끔 듣는다. 당연한 헌금 교육을 현 제도가 방해하고 있다는 좋은 증거다. 이상적인 헌금 제도는, 하지 말라고 해도 헌금할 사람은 찾아서 하고 하기 싫은 사람은 전혀 부끄러움이 없이 안 할 수 있는 방식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도가 그렇게 되어 있다면 헌금을 해야 하는 이유를 아무리 강도 높게 설교해도 괜찮을 것이다. 그래야 헌금에 대해서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헌금의 원리를 가르치는 데에 방해가 되는 제도를 그대로 두고, 부담이 될 것 같다고 하면서 마땅히 가르쳐야 하는 것을 얼버무리는 것은 초신자의 영혼을 아끼는 자세가 결코 아니다.

교회의 성장을 바라면서
찬양대의 수준은 지휘자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 이것은 오랫동안 지휘를 했던 나의 고백이다. 아무리 유능한 대원이 있어도 지휘자의 수준을 넘어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수준이 낮은 지휘자는 유능한 대원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다른 비유를 든다면, 계백장군이 아무리 유능하고 성충이 아무리 충성스런 신하라 해도 임금이 의자왕인데는 대책이 없다. 임금이 변해서 유능한 신하들이 능력을 발휘하게 해주던지 임금이 변하지 않은 채 유능하고 충성스런 신하들은 죽여 버리고 대신 무능한 신하들만 활개치다 나라를 망하게 하던지 둘 중의 하나다. 우리 교회가 성장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교회를 이끌어가는 어른들이 남보다 앞서 가면서 높은 수준의 신앙 모습을 보여 주며 젊은이들의 존경을 받아야 한다. 반대로, 수 없이 건의를 받고 불평을 듣고 난 후에 마지 못해 수정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한 발전을 기대하긴 어렵다. 권위도 떨어지고 존경도 사라진다. 지도자들의 권위가 서지 않는 곳에서 어떻게 성장이 있을 수 있는가? 자발적인 순종을 기대할 수 없는 곳에서는 강제로 시킨다거나 좋은 방법을 강구해 보아도 효과는 기대할 수 없다. 실제로 교인들이 잘 했다기보다는 목회자가 진정한 존경을 받아가며 크게 성장한 교회가 시내에 있지 않은가. 교인들끼리 만나면 그런 교회의 지도자를 부러워하고, 남의 교회 지도자들을 존경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좀 배우자.

지난 부활절 전에 다음 부활주일에는 헌금 주머니를 두 번 돌리지 않고 헌금 주머니를 한 번만 사용하겠다고 광고가 있었음에도 아무런 해명없이 부활절에 두 번 헌금 주머니를 사용했다. 단순한 착오였다면 강대상에서 생각없이 함부로 말하는 데에 대한 비판이 있어야 하고 어떤 회의를 거친 것이라면 목사님의 소신에 그릇되게 영향을 행사하시는 분이 바뀌어져야 한다. 적어도 교회의 성장을 논하기 전에 성장할 수 있는 제도로 바꿀 것은 빨리 바꾸어야 한다. 간단한 문제 하나 바꾸기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어떻게 성장을 얘기한단 말인가? 성장은 성장할 만한 분량이 있는 곳에서만 가능하다. 당장에라도 바꾸든지 아니면 바꿀 수 없는 타당한 이유가 조속히 설명 되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199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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