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순관 목사의 성경공부 누리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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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여사라
  2000-09-25
 
홍집사님 저 사라예요

음 총회 기간 학교에 가서 열씨미 공부 한 번 해 볼까 했는데
쩝-- 방이 없데요 그래서 집에서 넘~~ 프리~~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홍집사님 아침마다 자주 뵙기는 하지만 그래도 홈페이지로 만나고 느끼는 집사님은 또한 새롭군요 음*^^*
일학기에 이렇게 재미있는 공부를 조금 더 진작에 할껄
하시는 말씀을 듣고 참 이해가 되지 않았는디 지금 쬐금은 저도 재미있을려고 해요 헤~~ 그래서 감사하구요

음 아침 식탁공동체(?)에서 서로를 향한 좋은 도전과 위로가 있기를 바라며 다음에 학교에 가서 뵐께요
또 아침 식당에서 뵐 가능성이 많겠죠?
수현이 시집간다고 저한테 여러번 말씀하시는데 저 하나도 안 부러우니
그만 말씀하셔요
집사님 하나님께서 맡기신 영혼을 사랑하고 양육하는걸 기뻐하시는 모습을 가끔씩 느낄때마다 참 감사하고 기분이 좋아져요
이제 전도사님이라고 해야 되나요?
그럼 또 들리겠습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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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이진형
  2000-09-24
 
오랜만이죠? 홍 전도사님

공익!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스승님.
그럼 은사님은 제게 물으시겠죠? 너 아직 공익 안 끝났냐하고 말입니다.
그럼 전 아직 150일이나 남았습니다. 흑흑~ 하겠죠,
보고싶군요. 매주 볼때는 몰랐었는데 안계시니까 그리워지내요
우선 승창의 방명록이 아닌 저 어마어마한 글을 용서하십시요. 저놈은 구기 까페에도 저런답니다. 모두 읽기힘들어하죠.
저도 할말은 많지만 안부만 묻고 갑니다.
전도사님.. 성도들 사랑하며 말씀에 여전히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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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백영호
  2000-09-22
 
반갑습니다

홍집사님
백영홉니다.
말만 많이 듣다가 이제와 첨으로 방문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 드디어 뚜르넷을 설치하는 바람에 한 번 들어와 보았습니다.
담주에 한 번 밥이나 같이 묵읍시다.
그럼 이만...
주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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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손미정
  2000-09-21
 
선생님!

선생님
저 미정입니다.
잘 지내셨죠?
저두 잘 지내구 있습니다.
요즘 뭐 하면서 지내세요?
저는 이제 2번 남은 시험을 앞두고 머리가 아프게
공부해라는 소리를 주의 여기저기서 듣고 있습니다.
선생님!
언제 한번 뵈었으면 좋겠네요..
선생님 안뵌지가 꾀 돼서 선생님이 그동안 어떻게 변하셨는지
궁금하고요..
현영이도 선생님 많이 보고싶어해요.
선미도 그렇고..
그럼 몸 건강히 안녕히 계시고
언젠가 만나뵈길 기다리겠습니다.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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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조이문
  2000-09-20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아직은 기독교가 무엇인지 잘모르는 사람입니다.

궁금한 것이 있어서 이렇게 글을 보내드립니다.

1.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통하여 원죄를 사함을 받을 수 있다지만,
하나님을 믿으면 되는 것이지 왜 예수도 믿어야 하는지요?

2. 타 종교에 대비하여 기독교인들끼리는 잘 뭉치고 서로 잘도와주는
장점이 있습니다만, 왜 믿지 않는 사람들 혹은 타 종교인에 대해서는
그렇게 배타적인지요? 혹시 선민사상비슷한 것이 아닌지요?

메일로 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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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선생님 잘 지내시죠 제가
  2000-09-19
 
선생님 잘 지내시죠 제가

보다 근본적인 문제임을 자각하며...^^

(강형이의 고백으로 시작한 이 야기는 .....)

이번주 성경낭독중 나의 귓전을 울리게 한 구절..

'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렘22:21)

습관..정곡을 찌르는구만..성경에 이런 말이 있었나? 나에게 혹 우리 몇몇에게 각성이 되었으면 한다..

오후예배 때 열왕기상,역대하를 같이 공부하고 있는데 이승구 목사님의 설교중 기억에 남는 부분..

하나님이 나답의 생애 전체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서
-'나답이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하매 그 아비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였으니..'

여기서 잠깐..

내 아들의 이름을 참준이라 가정하고 하나님이 내 아들의 생애를 최종 평가하면서
' 참준이가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하매 그 아비 강형의 길로 행하였으니...'

잠시 이렇게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해봤다...

: (여기 까진 강형이다)-이까진 참 감사했는데 .....


(지금부터는 수현이고)

이 글이 왜 그리도 내 맘을 찌르는지...

어디서 보았는데..

태교는 부태에서부터
해야 한다더라...

이말인 즉슨.. 엄마의 몸에 오기 전부터...

지금부터..
오빠랑 매일 손잡고 하나님 주실 선물을 위해 기도해야 겠다...


하나님..
당신만을 사모하며..
당신만을 바라보고...
당신만을 사랑하는...
그러한 아이로 자라가게 하옵소서...

-------


(여기서 한승창 흥분하다. )

승창 왈-. 어째서 하나님이 당신이냐? 우리 매사에 사소한 표현에도 주의하며 쓰자구나
당신이라는 말은 제3자를 높이는 말이지만 2인칭일때는 아주 낮추어 부르는 말이거든
우리가 기도할때 당신께서 어쩌구 저쩌구하는 말은 마음이야 높인다고 하지만
무지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단다. 하나님은 인격이시듯 바로 우리와 직접 대화하시니
3인칭이 아니고 2인칭이지 영어의 you를 우리가 번역할때 좀 더 조심해야 했었는데 ....



(여기서 우리의 국방위원장(군생활전문가(?),포항대흥대학부위원장이자 국어교육학도인 현석이의 정확한 반론제기!!!!)

김현석 왈---

명색이 국어교육과 인데 나서지 않을 수 없군....

당신(當身)
1.'하오'할 자리에서 상대되는 사람에게 대하여 그를 가리켜 이르는 말 *이책은 ~이 가져온거요?
2.부부간에 서로 애정과 존경을 나타내어 이르는 말
*~을 위한 일이라면 어떤 고생도 참고 견디겠소.
3.'자기'라는 뜻으로 그 자리에 없는 이야기되는 사람<웃어른>을 높여 이르는 말 3인칭 단수로 쓰인다.

내가 인용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권위있는 우리말 큰 사전을 (전 3권)인용한 것이다. 그 밖에 단행본으로 권위있는 이희승 '국어 대사전' 북한에서 가장 권위있는 '조선말 큰사전'도 예문의 차이는 있지만 내용을 동일하다.

한 마디로 얘기해서 수현이나 승창이 둘다 틀렸다.
왜냐하면 승창이가 3인칭 단수일때 극존칭이 된다는 것을 정확히 지적했으나, 2인칭 즉 영어의 you는 1번의 뜻대로 '하오'체로 쓰이게 되는 것이다..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배운 '하게체, 해라체, 합쇼체,'뭐이런게 기억 날지는 모르겠지만 1번의 하오체는 이야기 듣는 사람을 보통으로 조금 높인 경우이다.

즉 합쇼체 보다는 낮지만 하게체보다는 높은 말인것이지..

음! 쉽게 얘기해서 모르는 사람이나 한 1,2년 선배들에게 쓰는 말이라 이해하면 될것이다.
물론 요즘은 싸우는 사람이 많아서 '뭐! 당신이 어쩌구 저쩌구'하여 아주 낮게 부르는 경우도 있지만 아직 우리말에 완전히 정착한 단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영어에서는 시제의 구분이 큰 특징이듯 우리말은 경어법 연구가 국어의 큰 관심사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연구 성과가 미흡하다고 한다.
수현이가 혹시 우리는 장차 예수그리스도의 신부이니 2번 뜻으로 썼다면 아마 잘못이 없겠지???


(한준호의 예리한 질문 ---한씨들이 좋아하는 정의내리기!!*^^*)

현석-명색이 국어교육과 인데 나서지 않을 수 없군....

준호-본색(本色)은 뭐냐?

혹시 완벽(完璧)한 사람?


(여기서 김성훈전위원장의 멋진 한마!.)
(김성훈의 객관적인 한마디-역시 예리하군!!!대단한 동기들이야!^^)

"김 선생" 더 쉽게 설명 할 수 없나?

내가 아는 한, 그래 앞에 높임의 대상이 있다면 '당신은' 극 존칭이 되지 않나?

예를 들어 "하나님 당신께서는"에서는 낮춤이 아니라 높이 그것도 아주 높임 이잖아.

말 그래 그게 중요하지만.. 그래도

만약 미국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 한다면 우리 식으로 따지면 완전 반말 투성이 일텐데....

그 나라와 그 문화에 맞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언어인데, 큰 무리가 없는 이상 그래 될 수 있는데로 예의에 맞게는 하되 뭐 이렇게까지 거론할 정도는 아닌거 아닌가 싶다.

성서의 곰 생각...


RE'당신'에 대한 빚진자(한승창)에게 답변

밥줘(한준호)가 씀 ! 09/19 7

-

한승창왈 : 하지만 그 많은 하나님의 호칭중에(여호와,주님,임마누엘,등등)
당신이라는 말은 다분히 주관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호칭(나에 대한 2인칭)인것 같다.
또한 사람에게 쓰는 말을 하나님께 쓴다는 자체가 경솔하기도하고
옛날에는 이름을 부르지도 못 했는데 이젠 사람부르듯 부른다는 것이
왠지 감성적인 인본주의 냄새가 난다. 하나님에 대한 산 지식이 없는 막연한 호칭인것 같다.
거룩한 분에게는 거룩한 호칭을, 아랫사람이나 부부나 친한또는
1,2년선배에게 부르는 호칭아닌 거룩(=구별)된 호칭을 ....
: 나중에는 '자기"가 어쩌구저쩌구나올까 두렵구나 .*^^*
:

포인트--그러니 꼭 자기를 위해 존재하시는 분처럼 표출되는 신앙의 한 형태인것 같다.
:
:
거룩한 분에게는 거룩한 호칭을!!!!!!!!!!!!!!!!

한준호왈 --(답변)

예레미아스가 Abba(압바)라는 예수 그리스도만의 독특한
용어 사용에 주목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독특한
'아빠'호칭속에서 거의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걸
본적이 있다.

1세기 근동의 아람어 사용에서 이 호칭은 지극히 평범한
아버지를 부르는 친근한 말이었다는 건 들어서 알테고..

구약에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서 아비와 자식간의 관계로 표현하는 말이 나온다만,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그런 표현을 쓰는 일도 극히 드물다는 걸 볼 수 있다. 그리고 유대교 문서에서조차 7세기인가 이후에야 하나님께 이런 언어를 사용했다하니 가히 충격적인 하나님호칭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유대교 랍비들의 문헌을 살펴보면 하나님에 대한 호칭이 2인칭보다는 3인칭이었다는 사실은 위의 주장을 생각해볼 때 사뭇 흥미롭다는 사실을 간파할 수 있다.

물론, '자기'라는 표현이나 '친구'정도로 생각하며 부르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난다는 사실에는 동의하지만,
인본주의 냄새가 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
(물론, 지금 '당신'이란 용어에 대해서는 차치하고, 일반
적인 하나님 호칭의 친근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 주장이야말로 주관적인'해석'으로 나온 주장이 아닌가
한다. 즉 상관관계(correlation)는 있을지 모르지만 인과관계로 보기는 힘들지 않나 싶다.

물론, 마태복음의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서는 아버지
앞에 '하늘에 계신'이란 말을 붙여서 네가 우려하는 이런 불균형을 잘 맞추고 있다는 건 우리가 기억할 사실이겠지.


'당신'이란 용어에 대해서는 싸울때 쓰는 '당신'과
친밀한 부부관계에서 쓰는 '당신' 이 두가지가 동시에
쓰이기 때문에, 나도 사용하진 않는다만.


결국 김세윤 박사의 말대로 하면 '초월'과 '은혜'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그 분에 대한 깊은
친밀함'의 문제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결핍된 사람들은 모두
양극단을 달리겠지. 하늘에만 계신 분으로 느꼈던 유대인
들이나 친구처럼 부르는 요즘 세대나...








설마 준호 너도 수현이처럼 말씀을 적용하는 것은 아니겠지*^^*

내가 흥분한 이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내 구미에 맞는 하나님을 아는 것도 아니요 부르는 것도 아니라
말씀에 대한 자세이다.

본문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성품?
내게 주는 교훈은?
오늘 내가 피해야 할 죄?
오늘 내가 적용해야 할 말씀은(실천할 내용은)?


성경에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는가.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
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39).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 17:11).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제대로 읽고 있는가.
그리고 해석하며 그 말씀들을 사모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성경을 읽으면서도 정작 알아야 할 것들을 알지 못한 경우는 허다하다.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
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 12:3-6).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강론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
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
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
도다(막 12:26-27).

이렇게 성경을 열심히 상고하지만 아주 크게 오해하는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
흔히 말하는대로 모세의 글을 읽을 때 수건이 그 마음을 덮어서 그렇게 읽을 수 밖에 없다. 수건이 덮였다고 말하는 많은 이들 역시 성경을 읽고있는
것을 보노라면
여전히 그 아래서 성경을 읽고있는 것을 볼 수 밖에 없으니 수건에 대한
이해도 하나의 지식으로 밖에 간직하고 있지 않은 까닭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주가 되시는 예수께서도 성경을
사랑하고 읽으셨던 것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
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
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
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
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
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눅 4:16-20).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 가는데 병거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빌립이 달려
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대답
하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하고 빌립을 청하여 병
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
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행 8:27-35).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끝
까지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너희가 대강 우리를 아는 것 같이 우리 주 예
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 자랑이 되는 것이라(고후
1:13-14).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이것
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엡 3
:3-4).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
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골 4:16).

바울은 그의 글들을 쓰고 기록하면서, 많은 이들이 읽고 자신에게 계시로 알
려진 비밀들을 함께 나누고 싶어하였다. 그러한 간절한 심정이 편지를 하게
하였고 또한 많은 이들에 의해서 읽혀지기를 간절히 원하였으며 그것은 오늘
날까지 정경으로 채택되어 읽혀지고 있다.

요한 계시록 1장 3절 말씀은 이러하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
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

이렇게 우리는 기록한 자들의 간절했던 심정으로 기록된 말씀을 읽어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성경을 그저 다독 하면 많이 읽은
것이 되고, 그리고 기록자들에게 계시로 알려졌던 것들을 알 수 있는가. 그
렇지 않다. 아무리 많이 읽는다 하더라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신앙생활의
성패가 좌우된다.
성경을 읽고도 도무지 성경을 읽지 못하여,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고
그리고 복을 받을 수 있는가’로 읽고 그것을 좇아 인생을 허비하는,
그러한 불행의 대행진이 어제나 오늘이나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읽을 것인가. 마음에 기록된 편지를 알고 읽지 못하
면, 여전히 의문에 속하여 ‘무엇을 행하여야 하는가’로 읽게 된다.
그래서 성경에서 ‘읽는다’는 헬라어 단어는 ajnaginwvskw(아나기노스코)를
쓰고 있는데 그 의미는 ‘연루된 의미로 읽다, 다시 알다’는 의미를 지닌다
. 이 말은 위로부터의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것을 읽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읽지 못하면 성경을 읽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영생을 얻기 위하여 성경을 상고하는 삶을 사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
러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참뜻을 계시로 알지 아니하고는 여전히 땅 아래에
속하여 성경을 읽게 된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며 읽어도
읽지 못하는 불행만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읽지 못하는 인간들은 다
만 성경을 다독多讀했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고 힘을 얻어서 산다. 언제까지
그러할 것인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
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골 4:16)


문제는 기록되어 있는 말씀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록되어 있는 말
씀은 얼마든지 지식으로도 알 수 있다. 그러한 지식은 그 동안 진행된 신앙생
활을 통해 귀가 따갑도록 들었고, 또 가르쳐왔던 내용이다. 그리고 항상 읽고
있는 말씀이 아니던가. 그런데 지금 “네가 어떻게 읽느냐”이다.
어떻게 읽고 있는가.
도무지 기록된 성경은 그렇다 치더라도 읽는 이가 어떻게 읽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경건의 시간을 통해서 성경을 어떻게 묵상하는가. 오늘날 기독교
일반대중에게 널리 인기가 있는 Q.T(Quiet Time)노트를 보거나 경건의 일기를
보면 성경을 어떻게 읽고 있는지 한 눈에 나타난다.
어떻게 읽고 있는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고, 성경대로 ‘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
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대로 전심전력하여 사
랑을 행하면 영생을 얻는 줄 알고 그렇게 성경을 읽고 있다. 그래서 오
늘도 하나님을 사랑하려 하고 있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려고 저렇게
분투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영생이 얻어지는가. 그래서 이웃에 대해서조차 그렇게 읽고 있는 율법사의 시
각을 교정해 주는 비유의 내용이 소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이다.
여전히 율법사와 동일하게 성경을 보는 이들에 의해서 이 비유는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는 예수의 물음을 ‘누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
웃이 되겠느냐’는 질문으로 둔갑하여 강도만난 이웃을 찾아서 그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려 한다. 이 비유가 전개되고 있는 본문에서 선한 사마리아
인의 이웃이 강도만난 자라고 표현된 성경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여전히 율법사와 동일한 눈을 갖고 성경을 보는 이들에 의해서
성경은 그렇게 왜곡되어 읽혀지고 설교되며 적용되고 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성경을 읽어보시라. ‘
누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웃이 되겠느냐’는 질문이 있는가.
율법사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고 질문할 수 밖에 없음은 이
미 자신이 강도만나 죽어 있는 자이기 때문에 그러한 질문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행위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으려니와 구원도 영생도 맛 본
적이 없기에 그러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모든 행위를 옳게 보이려는 동기에서 그와 같이 행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여전히 그렇게 가르친다.
그리고 여전히 성경을 그렇게 보고 있다.
그것의 단적인 예로 Q.T (Quiet Time)노트의 일상적인 양식을 보면 알
수 있다.

성경을 모독해도 분수가 있을 터, 이렇게 도적질하여도 괜찮은 것인가.

성경을 가져다가 자기 구미에 맞게 마음대로 적용을 하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가.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에만 관심있는 오늘날의 율법사들같은 우매한 백성들.

그래서 결코 하나님도 사랑하지 못하고 이웃도 사랑하지 못한다.

이 율법과 선지자의 대 강령은 영생의 삶을 말한다.
그것은 곧 영생을 소유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영생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어떠한 번제물이나 제물보다도 나은 것이다.
그렇게 살 수 있는 삶만이 우리의 소원이며 목표이다.
다만 영생을 얻기 위하여 그렇게 살아야 된다고 하는 이들은 영생도 모르고 사랑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구하기 보다 하나님을 아는 삶이 난 신앙이라 고백한다.


그래도 난 안다 그 지식이 그 지식이 아니라는 것을 *^^*

또 준호가 지식만을 구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놈이지 !!

봐라 내가 놈이라하니 기분 안 나쁘지 하지만 누가 어떻게 쓰느냐가
그 언어의 개념과 사회성보다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을 우린 실제로 누리고 살잖아.
난 안수현이 불렀던 그때 그 하나님을 향한 '당신'이라는 말이 참 싫었단다.
그때 수현이가 표현했던 하나님이 수현이가 인식하고 있는 하나님이지

주님의 주님되심은 아니라는 생각이 그 때 들었단다.
최소한 그 고백에서는...*^^* 부분부정*^^*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렘22:21)

이 말씀에서 오빠랑 손잡고 태교준비하는 적용은 성경을 다분히 디다케(교훈)으로만 본것임을 ...가슴아프다. 이땅에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생명으로 대하지 않고 사람을 위한 책으로 보는지..._


말씀은 생명이어서 신앙함에 드러날 수 밖에 없음을 고백한다.
나의 늘 쓰러짐과 연약함과 인생의 곤고함과 더러움을 아시고
때에 따라 생명의 말씀과 성령하나님의 강권하심으로
내영혼을 소생케하시는 은혜를 누리며 ......

내 마음을 알겠냐 내가 포크레인앞(국어교육학도)에서 미친 듯이 거룩한 삽질을 한 이유를...



그래도 참 좋다 이렇게 든든한 동기들이 있어서 ^@^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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