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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울이 로마에서 옥에 갇힌 채(거주 제한이거나) 복음을 전함으로 훌륭한 제자를 많이 만들었다. 그 중에 어떤 제자가 고백하기를 자신은 주인의 물건을 훔쳐서 도망나온 노예라는 것이다. 주인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잘 아는 빌레몬이었다. 그래서 그 종의 손에 편지를 들려서 주인에게 돌려보낸다. 무슨 부탁을 하는가? 종을 용서하라. 그리고 다시 내게로 돌려보내라. 2. 만약 우리가 바울의 입장이라면 위의 목적을 위하여 어떤 식으로 일을 처리하겠는가? 당연히 요구해도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편지만 보내고 이해를 구하지 않을까? 어차피 들어줄 부탁이라면 먼 길을 오네시모가 갔다가 돌아오려면 시간도 엄청나게 오래 걸리는 일인데... 3. 이 부탁을 빌레몬이 들어주지 않을 수 없도록 바울이 사용한 '노골적인 요구'부터 '은근한 압력'까지 다 찾아보자(예를 제외하고도 최소한 10가지 이상).
1) 나는 갇힌 자(1, 9, 10, 13, 23); 옥중서신 네 권 중에서 문안인사를 하면서 갇혀있음을 강조한 것은 빌레몬서 뿐이다. 복음을 위하여 갇혀있는 나를 괄세할테냐? 4. 바울은 빌레몬과 그 가족들 뿐만 아니라 오네시모까지 높이 높이 비행기를 태운다. 진심일까? 과장일까? 해보는 소리일까? 뻔히 보이는 다른 의도가 분명히 있지만 진심이다; 목적 달성을 위하여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어린 사랑이 뚝뚝 떨어지는 말이다. 5.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고 그가 다시 돌아오기까지는 몇 달이 걸릴지 일이 잘못되면 해를 넘길 수도 있고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한 사람이 아쉬운 판에 사도 바울은 일을 왜 이렇게 어렵게 처리하는가?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14); 일의 능률을 생각한다면 결코 오네시모를 다시 돌려보내지 않는다. 바울의 관심은 일의 능률이 아니라 빌레몬의 선한 의지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고 싶은 것이다. 헌금의 액수보다는 헌금하는 사람의 마음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한 사람의 재주보다는 그 사람 자체를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은 더욱 어려울지 모른다. 6. 만약 오네시모가 가는 도중에 이 편지를 뜯어보았다면 어느 표현에 가장 감동이 되었을까? 내 심복(12), 내 아들(10), 사랑받는 형제(16); 종으로 살면서 오죽하면 도망쳤을까? 어리석거나 생각이 없는 종은 도망도 치지 않는다. 자신을 이렇게 인정하는 바울이 얼마나 감사했을까? 7. 우리에게 빌레몬서는 감동적인 서신이다. 그러나 도망친 노예가 주인집으로 돌아가면서 손에 들고 있는 편지 한 장은 단순한 편지가 아니다. 무엇이라고 표현할까? 생사가 달린 편지, 사형수에게 내리는 사면장이나 마찬가지다; 오네시모는 자신이 도망쳐 나온 그 주인의 집으로 편지 한 장 들고 돌아가는 중이다. 만약 다른 사람에게 적발이 되면 죽을지도 모른다. 도중에 이 편지를 잃어버려도 큰 일이다. 빌레몬서를 읽으면서 오네시모가 가졌던 그 기분을 자신의 것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8. 빌레몬이 이 편지를 받고 선생님의 말에 순종했을 것이다. 오히려 선생님께 보내는 선물꾸러미를 주면서 '가서 나 대신 선생님을 잘 섬겨라'고 당부를 했을 것이다. 그것을 들고 돌아오는 오네시모의 모습을 그려 보라. 바울 선생님도 고맙고, 주인님도 고맙고 이 두 분이 나를 용서할 수 있게 해 준 예수님도 고마웠을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모든 일에 대해서 감사했을 것이다. '저 자식 왜 저렇게웃고 있지?' 하늘 쳐다보고 웃다가 돌부리에 걸려서 퍽 엎어져도 웃으며 일어났을 것이다. '아이고 이것도 감사합니다' 했을 것 같다. 바로 이런 오네시모의 기분이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이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믿는 사람들이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래도 감사, 저래도 감사! 남이 보면 '이상하다'고 그럴 것이다. 9. 인간적으로 본다면 아쉬울 것이 전혀 없는 바울이 제자라고 할 수 있는 빌레몬에게 죽을 죄를 지은 노예 오네시모를 위하여 통사정을 하듯이, 공갈치듯이 애원하는 모습은 누구의 모습과 닮았는가?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자신의 죽음을 들먹이며 용서를 구하는 예수님의 모습과 닮았다. 그 예수가 없다면 바울도 결코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