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12


1. 11장과 비교해보면 내용이 여기서 어떻게 바뀌는가?

    죽임당하는 데서 승리와 구원으로! 9-11장은 초림의 메시야를 배격하는 것에 대한 경고였지만(특히 11장) 12-14장은 메시야의 재림과 통치에 관계된 경고의 말씀이다. 메시야를 배격한 육적 이스라엘이 징계를 당했지만 메시야를 영접한 영적 이스라엘은 종말적인 승리와 구원을 노래하게 된다.

2. 많은 사람들이 사람은 동물의 일종이요, 자연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짐승을 잡듯이 사람을 죽이는 모양이다. 무서운 생각이다.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하실까?

    ‘내 눈에는 하늘과 땅과 심령(사람)만 보인다’: 사람이 하늘보다 땅보다 더 귀한 존재다(마 16:26). 사람을 위해서 하늘과 땅이 존재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수많은 아이들 가운데서도 자기 아이만 보이는 엄마의 눈처럼! 참고로 ‘내가 사람을 나의 형상대로 지었다’ 이것은 창세기를 공부할 때의 정답이다. ‘사람에게는 심령을 주셨다’ 이것은 좀 더 나은 대답이지만 정답에는 미치지 못한다.

3. 새삼스럽게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영혼을 주셨다고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새로운 창조(=구속)도 가능하다는 것이다(=이어지는 내용의 확실함을 강조): 이렇게 전능하실 뿐 아니라 인간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이므로 능히 이스라엘에 승리와 구원을 베푸실 수 있다는 것이다.

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혼취(몽롱하도록 취함)케 하는 잔으로 만들어버리면 대적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맛있다고 홀짝거리면 죽어나는 거지: 대적들이 가볍게 보고 침략하다가는 그런 꼴이 난다는 말이다(계 16:16-21). 예루살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유다 전역을 그렇게 돌보실 것이다(2).

5. 이스라엘이 무거운 돌이면 무슨 일이 생길까?

    잘못 들었다가는 발등 깨지! 무거운 것일수록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실수하면 그만큼 크게 다치기 때문이다.

6. 하나님께서 말(馬)을 치시면 어떻게 되는가?

    대적의 기병대가 끈 떨어진 연이요, 앙꼬없는 찐빵이지: ‘놀라게 하며’ ‘미치게 하되’ ‘눈이 멀게’ 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불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치시는 방법이었다(신 28:28). 이제는 대적을 그렇게 치실 것이다. 이스라엘을 돌아보신다는 말을 직역하면 ‘내가 눈을 뜰 것이라’는 말이다(I will open My eyes on the house of Judah, NKJV).

7. 지독하게 말을 듣지 않는 이스라엘도 그제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알게 될 모양이다(15). 어떤 은혜를 베풀어야 알아듣는가?

    주변 모든 대적의 말이 눈이 멀면: 정말 기적같은 일이 일어나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알아본다. 기드온에게 300명의 군사만 허락하신 이유도 그렇다(삿 7:2). 우리 인생이 그런 모양이다. 뒤돌아보면 알텐데(미 6:5)!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하셨는데(요 20:29)!

8. ‘나무 가운데 화로’나 ‘곡식단 사이에 횃불’은 무슨 의미인가?

    아무도 이스라엘을 해할 수 없다: 나무나 곡식이 화로나 불을 해롭게 하려고 덤비면 자신만 피해를 입을 뿐이다. 애시당초 싸움의 상대가 아니다. 대적이 전혀 없는 상태다. ‘그 본 곳 예루살렘’은 교회를 가리킨다. 교회를 없애려고 시도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건만 굳건하게 전진하고 있는 것을 보라. 때로는 외적에 의해, 때로는 내부의 연약함으로 사라질 것만 같았던 교회가 여전히 전진하고 있지 않은가! 교회는 주님 오실 날까지 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교회가 염려스러워 잠 못 이루는 성도가 적지 않지만 교회의 주인 되시는 그 분이 계시는 한 평안할지어다.

9. 다윗의 집은 다윗이 일으켜 세운 강성한 나라를 가리키고 예루살렘 거민의 영광은 그 강성한 나라 백성의 자부심을 가리킨다. 그러면 유다의 장막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지금은 연약하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실 더 강성한 나라: 장막은 임시처소일 뿐 영구적인 요새가 아니다. 그런 장막을 하나님께서 세우시면 다윗이 세운 나라보다 더 강성한 나라가 된다. 그 나라의 약한 자도 다윗 같다(8)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약한 자 같으나 하나님의 편에 서는 자가 진정으로 강한 자임을(고후 6:9-10) 잘 보여준다. 요는 하나님께서 가장 강성했던 다윗의 왕국보다 더 강성한 나라를 세우시겠다는 것이다.

10. 유다를 이렇게 강성한 나라로 세우시려고 치러오는 열국을 멸하겠다고 하시면서(1-19) 예루살렘에 애통이 있다니(10)?

    전혀 다른 내용으로 바뀐 탓이다: 가령 꿈 속의 얘기하다가 갑자기 꿈에서 깨는 것처럼! 이전까지는 장차 이 땅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내용이었는데(1-9) 이제는(10-14) 그 나라를 이루기 위한 예수님의 수난 장면으로 돌아온 것이다. 혹은 이스라엘의 외적회복에서 내적회복으로 바뀌었다고 보아도 되겠다.

11.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다니? 무슨 뜻일까?

    앞에 ‘죽은’ 이라는 말을 삽입해서 읽으면 된다: 극도의 슬픔을 의미하는 비슷한 장면이 성경에 많이 있기 때문에, 즉 익숙한 장면이라서 설명을 생략한 것 뿐이다(출 11:5-6, 렘 6:26, 암 8:10). 말 안 해도 아는 사람은 안다! 익숙한 속담은 반만 잘라서 써도 알아듣는 것처럼!

12. 예루살렘 거민이, 나아가서 온 땅의 족속마다 이렇게 통곡하는 것은 그들이 찌른 그 분(원문상으로는 ‘나’)을 위하여 통곡하는 것이다. 찌를 때는 언제고 통곡은 왜 하는 거야? 어떻게 이런 반전이 일어날까?

    하나님께서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셨기 때문(10):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사건을 가리킨다. 독생자를 주신 것은 가장 큰 선물이다. 그게 그렇게 큰 선물인 것을 알아차리는 것도 또 다른 은혜(선물)다. 우리 스스로 그런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일이다!

13. 애통하는 장면에 므깃도는 왜 나올까?

    거기서 애굽의 바로와 싸우다 죽은 요시야 왕에 대한 애통함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대하 35:20-25): 통치자를 잃은 백성들의 슬픔과 같은 애통을 느끼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훗날 이들은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게 된다(행 2:37). 하다드림몬의 위치는 확실하지 않다.

14. 애통도 한 군데 모여서 않고, 개인별로 해야 하는가?

    거국적인 회개라 할지라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 회개해야 한다. 구원이 공동체적인 성격이 분명히 있음에도 개인적인 것이다. 따로란 말이 11번이나 반복된다. 천국에 단체입장은 없다! 아내 덕 볼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내들이 따로’

15. 문맥상 나단은 다윗의 아들 나단을 가리킨다(삼하 5:14, 대상 3:5, 14:4, 눅 3:31). 여기 시므이도 레위의 손자다(출 6:17,민 3:18, 21, 대상 23:7, 10). 결국 두 족속을 예로 들고 나머지 지파는 단체로 취급했다. 이 두 지파는 왜 따로 언급했을까?

    다윗 족속은 통치를, 레위 족속은 제사를 맡은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에 대표성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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