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11


1. 앞에서는(9-10장) 이스라엘이 받을 축복을 얘기하더니 여기서는 별안간 웬 저주인가?

    하나님의 속성 중에 공의와 사랑은 상반되는 측면이 있어서 결과적으로 축복과 저주가 동시에 임할 수 있다. 양과 염소의 구분을 철저하게 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축복이 임할 때 바로 그 옆에 저주가 임하기도 한다.

2. 온통 징계에 관한 내용이다. 징계의 대상이 몇 가지인가?

    삼림(1-10, 이 땅의 거민들), 목자들(15-17, 지도자들).

3. 레바논의 백향목과 잣나무이나 바산의 상수리나무에 무슨 원한이 있어서 불로 태우고 베어넘기는가?

    6절에 대한 비유다: 심판받을 이 땅 거민들의 현재 모습이 무성한 삼림과 같다는 것이다. 쭉쭉 뻗어있는 아름드리 나무처럼(겔 31:3) 얼마나 보기에 좋을까마는 하나님의 징계가 임하면 깨끗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4. 어린 사자는 왜 부르짖을까?

    삶의 근거가 사라졌기 때문: 삼림이 없어졌고 목자가 곡을 할 만큼 양떼도 사라졌는데 무얼 먹고 살아? ‘요단의 자랑’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기름지고 숲이 무성한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영화로운 것).

5. 스가랴 선지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 그것이 무엇에 대한 상징인지 생각해보자.

    잡아먹힐 양떼를 먹이는 일(4, 7, 막대기 둘을 취하는 것은 여기에 포함되는 일), 고가를 받아 토기장이에게 던짐(13), 막대기 자르기(10, 14), 우매한 목자 노릇(15): 앞의 두 가지 일은 선한 목자의 일로서 초림의 메시야에 대한 상징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렇게 심판하시는 이유는 메시야를 배척하기(4-14) 때문이라는 것이다. 스가랴는 그러다가 철저하게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우매한 목자 노릇까지 보여준다. 이것은 로마의 Titus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언이라고 할 수 있다.

6. 양을 산 사람이 잡아먹겠다는데 무슨 죄가 있으며, 팔아서 돈을 받은 사람이 여호와께 찬송하는 게(5) 무슨 문제인가?

    요는 양을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6): 하나님은 잡아먹힐 양조차 돌보고 계시는데 이들은 도무지 양을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양이, 양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내 돈 주고 샀는데 잡아먹든 말든? 돈이 생겼으니 감사! 이왕에 잡아먹힐 것! 이런 식이다. 아무도 양을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다. 하나님도 이들을 불쌍하게 여기지 않겠다는 것이다.

7. 한 달 동안에 세 목자를 끊어버린 이유를 무엇이라고 하는가(7-9)?

    내가 양떼를 싫어하고 양떼도 나를 싫어하기 때문(9): 8절의 ‘그들’은 7절의 양떼를 가리킨다. 어차피 죽을 양떼지만 최선을 다해서 돌보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기에 버리는 것이다. 목자를 끊어버리는 것이 양떼를 버리는 최상(?)의 방법이다. 세 목자에 대한 의견도 분분하지만 이런 문맥에 따라서 이스라엘의 세 지도층(왕, 선지자, 제사장)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끝까지 돌보시는 선한 목자이시기도 하지만 끝내 돌이키지 않는 자는 버려두신다(롬 1:24, 26,28).

8. 목자를 끊어버리고 양떼를 버려두시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죽거나 망하거나 뜯어 먹히거나(9): 자연사하거나(죽는 자) 전쟁으로 죽거나(망하는 자) 기근으로(살을 먹히는 자) 죽는다. 하나님께서 버리시는 것은 자유나 해방이 아니라 죽음이다. 하나님 없는 인생은 아무리 잘 나가는 듯이 보여도 철로를 벗어난 기차, 어항 밖으로 뛰쳐나온 붕어일 뿐이다.

9. 목자를 끊고 양떼를 버려두는 것(7-9)이 곧 은총을 거두고 언약을 폐하는 것(10-11)이다. 최악의 상태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와중에서도 선지자의 행위가 여호와의 말씀인 것을 깨닫는 자는 복되다. 버려지는 자 가운데서도 소수지만 구원받는 자는 항상 있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자가 궁극적인 행복자이다.

10. 은 삼십과 토기장이 얘기는 어디에 나오는가?

    예수님을 팔고(마 26:15) 받은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행려병자)의 묘지로 삼은 것(마 27:7)에 대한 예언이다.

11. 선지자가 왜 고가(품삯)을 달라고 하는가? 무슨 일을 했기에?

    선한 선지자의 역할(4, 7a): 품삯을 받는 것이 선지자의 목적이 아니었음에도 이렇게 요구하는 것은 다분히 풍자적이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돈을 요구하는 것, 즉 부모가 어린 자식에게 양육비를 청구하는 것과 비슷한 행위이다. 뭔가를 깨우치려는 것이지 돈이 목적이 아니다.

12. 선지자가 한 일에 대해서 제대로 값을 쳐주었을까? 은 삼십이면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을까(출 21:32)?

    죽임 당한 노예의 몸값이니 그리 많은 액수는 아니다(출 21:32): 군대서 흔히 하는 말로 ‘훈련소에서 죽으면 (장례비로) 개 한 마리 값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말처럼 경멸적인 의미가 담겨있다고 보아야 한다. 말하자면 선지자가 행한, 값으로 칠 수 없는 일에 대해서 뭔가를 깨달으라고 한 소리 했더니 이렇게 경멸적인 대답을 한 셈이다. 차라리 주지 않는 것보다 더 경멸하는 셈이다. 그러니 그 돈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 제사장들이 준 예수님의 몸값도 그런 셈이다. 이렇게 선한 목자를 이렇게 조롱하고 배척한 결과는 우매한 목자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양떼도 죽고(16), 자신도 망한다(17).

13. 은총이란 ‘기쁨, 즐거움’이란 뜻으로 외부적인 위협으로부터 안전함을 의미하는데 연락이란 ‘통일, 화합’을 의미한다. 이런 것을 의미하는 연락이라는 막대기가 잘라진 것은 이스라엘의 장래가 어떠할 것임을 의미하는 걸까?

    예수님 이후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완전히 사라지고 민족은 뿔뿔이 흩어진다. 지파별 개념마저 사라진다.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지파인지 모른다.

14. ‘목자의 기구’란 양떼를 돌보는 도구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우매한 목자의 기구’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일까?

    양떼를 잡아먹는 도구(16): 하는 일이 살찐 양을 잡아먹을 궁리나 하고 있으니... 양떼를 잘 돌보라고 준 도구도 그렇게 못된 짓거리에 사용될 수 있다. 로마교회처럼 베드로의 열쇠를 교권싸움에 사용하거나, 교회의 치리권을 인간적인 권리 다툼에 사용하는 것이 그런 예일 것이다. 이런 목자의 비참한 최후(17)는 종말에 있을 최종적인 심판을 가리킨다.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