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9


참고) 쓸데없는 소리지만 어떤 신학자들은 9-14장을 예레미야의 글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내용과 형식이 앞부분과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내용은 종말론적이며 형식은 앞부분과 달리 운문이다. 이사야 다음으로 메시야 예언이 많다. 초림(3:8, 9:9-10, 11:11-13, 12:10, 13:1, 6)과 재림(6:12, 14:1-21)에 관한 것과 종말론적인 ‘그 날에’ 라는 표현이 18회나 사용되었다. 예레미야와 닮은 점은 성전에 관한 언급이다. 이스라엘의 미래, 미래의 성전을 말하기 때문에 차이가 난다!

1. 여호와께서 누구에게 경고를 발하시는가?

    온 세상 사람들(1-7): 이들을 구체적으로 세 그룹으로 나누면 수리아 지역(하드락, 다메섹, 하맛)과 베니게(두로, 시돈)와 블레셋(아스글론, 가사, 에그론, 아스돗: 가드만 빠졌다?)이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대적자들이면서 동시에 메시야에 대한 대적자들을 상징한다. 이 말씀은 알렉산더에 의해서 역사적으로 성취되고 메시야의 출현으로 이어진다. 1절 후반부의 해석이 어렵다. 세상에 임하는 하나님의 징계를 모든 사람이 바라보게 된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어떨까? (역본마다 차이가 있다)

2. ‘아는 것이 힘’이란 말도 있고, ‘자본주의에서는 돈도 실력’이라는 말도 있다. 맞는 말인가?

    하나님을 빼고는(사람 사이에서는) 맞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 앞에는 지혜(두로와 시돈)도, 돈(두로)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자기를 위하여 이런 것들을 쌓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한다.

3. 블레셋은 결국 어떻게 되는가?

    유다의 한 두목 같이, 여부스 사람 같이(7): 일부는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에도 여부스 사람들을 추방하지는 않았다(왕상 9:20-21). 성전이 세워진 아라우나의 타작마당도 여부스 사람의 것이다(삼하 24:16). 여부스 사람이 이스라엘과 함께 거하듯이 블레셋도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거하게 된다는 것은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넘어가서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4. 이방에 대한 심판은 자기 백성을 돌아보시는 것과 다르지 않다. 불같이 화를 내시는 분이(1-7) 돌아서서 따뜻한 미소로 자기 백성을 바라보신다(8). 하나님의 이런 양면성이 종말에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영생과 영벌(마 25:46): 혹자는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영벌을 내리시겠는가?’ 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사랑만 넘치는 분이 아니시다. 끝내 돌이키지 않는 자에게는 영벌을 내릴만큼 모진(?) 면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가마이 있으니 가마이떼긴 줄 아나?’ 이러면 죽었다고 봐야지!

5. 9절은 대단히 유명한 구절이다. 이 구절을 잘 인용한 분이 두 분이라면 누구일까?

    예수님과 헨델: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이 구절을 기억하시면서 나귀를 타셨다. 헨델은 메시야의 18번 소프라노 솔로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하라’의 가사를 이 구절에서 땄다.

6. 왕이 하필이면 나귀새끼를 타고 오시나?

    정복이나 군림하기 위한 왕이 아니라 겸손한 왕이시기 때문: 초림의 예수님은 겸손한 왕으로 오셨다. 그런 모습으로 오시니 붙잡혀서 고난을 당하시지(구원). 그러나 결국에는 악한 자를 심판하시러(공의) 다시 오실 것이다.

7. 말도 안 된다. 병거와 말과 활을 끊으면서 어떻게 정권이 땅 끝까지 미친단 말인가(10)?

    평화의 나라는 그렇게 온다: 하나님께서 세우시려는 그 나라는 무력이나 권력으로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라 겸손함으로 화평을 누리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세상은 더 이상 인간의 세상이 아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세상이다. 물론 그 이면을 보면 하나님께서 대신 활을 쏘고, 칼을 휘두른다(13-15). 반드시 제압해야할 사탄의 무리가 있기 때문인데 하나님께서 처리하실 일이다.

8. 하나님께서 갇힌 자들을 구원해서 돌아오게 하시고 배나 갚아주시는(11-12) 이유가 무엇인가?

    언약의 피 때문에(11): 모든 제사에는 피흘림이 따르는 것도, 언약을 세우실 때 피를 흘린 것도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을 상징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은 일이다.

9. 병거와 말과 활을 끊으면서 평화의 나라를 세우시겠다더니 갑자기 이렇게 피를 뿌리는가(13-15)?

    이 예언이 후일에 있을 마카비 가문이 헬라 군대를 밀어내는 것으로도 볼 수 있으나(13) 궁극적으로는 영적인 싸움, 즉 메시야 왕국의 적대자들에게 완벽한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 우리의 온전한 구원을 위해서 대적을 완전히 섬멸하는 전투는 어쩔 수 없다. 이것이 영적인 전투를 가리키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병거와 말과 활을 끊으라는 것이다. 교회가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할 전투도 돈이나 힘을 통한 전투는 아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두 가지 싸움을 해야 한다. 사랑으로 정복하여 형제를 살리는 싸움과 무력으로 처절하게 죽여야 하는 싸움이다.

10. 대적은 핏빛으로 물들겠지만(13-15) 하나님의 백성은 무엇과 같을까?

    양떼, 면류관의 보석: 양은 제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목자가 되셔서 이들을 돌보시겠다는 것이다. 양떼와 보석 중에 어느 것이 더 아름다울까? 어쨌든 최고로 아름다운 존재로 이끄시겠다는 뜻이다.

11. 요즈음 소년의 아름다움은 근육질 몸매, 처녀는 색시함인가 보다. 막상 결혼하려면 돈을 따지면서도! 그 옛날에도 곡식이 풍성하고 포도주가 넘치는 것이 가장 큰 복이었을까?

    여기 곡식과 포도주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결과물이다. 하나님도 없는 곡식과 포도주가 문제지 하나님을 우선으로 한 결과로서의 곡식과 포도주는 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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