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 나무 열매 없어도

효자제일교회 전도사:홍 순관

시기오놋에 맞춘 바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산에서부터 오시도다(셀라) 그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도다 그 광명이 햇빛 같고 광선이 그 손에서 나오니 그 권능이 그 속에 감취었도다 [개역, 하박국 3:1~4]

올 여름을 지나면서 우리가 가장 사랑했던 찬송이 아마 ‘무화과 나무 열매 없어도...’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나 좋았던지 달빛이 비치는 한밤중에 춤 연습을 다 했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살 떨리는(?) 경험이기도 했습니다. 이 노래와 율동을 가지고 유년부 주일학교 연합회 율동대회에서 우승을 했다고 그럽니다. 아마 다음에 야외 예배 나가면 또 한번 해야 되지 않나 싶습니다. 앞장 서서 이 노래와 율동을 가르치고 소개해주신 집사님 몇 분께 감사를 드리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이 이 찬송 속에 담겨 있는 하박국 선지자의 아픔이 그렇게 만만치가 않으니 한번 살펴보는 게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박국이 어떻게 해서 이런 기쁨을 누리게 되었을까요?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라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여러가지 표현이 있지만 전부 동일한 내용입니다.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면 어떻게 되죠?

열매가 없어요.

무화과 나무 하니까 우리 마당에 있는 저 무화과 나무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건 열매가 안 맺혀도 우리가 살아가는데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무화과 나무는 거의 주식처럼 사용되는 귀한 양식입니다. 그런데 이 나무에 열매가 없는 겁니다. 여러분, 만약에 1년동안 농사를 지었는데 쌀 한 톨 안 나왔다고 생각해 보세요. 1년내내 농사를 지었는데 쌀이 한 가마니도 안 나왔다 하더라도... 이런 뜻입니다. 수 년 전에 소 파동 났을 때 액수는 제가 잘 기억을 못하겠습니다만 송아지 한 마리를 이백만원에 사서 2, 3년 키워서 팔려고 보니까 값이 백오십만원밖에 안 나갔습니다. 그러니까 농민들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경운기에 실어다가 소를 시내에 버리는 거죠. 난리가 났습니다. 소몰고 데모를 하는 겁니다. 양파 농사 실컷 지어 놓고는 캐낼 생각도 안 하고 갈아엎는 거 많이 보셨죠? 바로 이런 이야기입니다.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했죠? 밭에 식물이 없습니다. 농사 1년내내 지었는데 나는 게 없다는 얘깁니다.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습니다. 그럴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겠다는 고백입니다. 학생들 같으면 중고등학교 6년 동안 죽어라고 공부해 가지고 대학 입학시험에 뚝 떨어졌습니다. 그러면 하박국 같으면 뭐라고 그러겠어요? 시험에 떨어졌을지라도 기뻐하겠다는 겁니다. 시험 떨어지는 거 그것 고통입니까? 어느 아버지가 딸을 새벽에 데려다 주고 한밤중에 데려 오기를 3년 동안 해서 대학 입학시험 치러 올라갈 때 같이 갔더랍니다. 그런데 합격자 명단에 딸 이름이 없는 것을 보고 정작 장본인은 멀뚱멀뚱한데 아버지가 그 자리에 앉아서 땅을 치면서 울더랍니다. 왜요? 3년 동안 고생한 그게 서러워서요. 겪어보지 않으면 그 허무, 허탈감을 이해하기 어려울 겁니다.

하박국이 기뻐할 수 있는 상황에서 기뻐하는 게 아닙니다. 슬퍼해도 슬퍼해도 끝이 없을 이런 상황에서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서 즐거워하며’라고 지금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겁니다. 한번 상상을 해보세요. 직장 날아가고 집 다 날아가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 없어졌습니다. 뭐 먹고 살아야 할지 모르는 막막해진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만 있으면 정말 기뻐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하박국은 지금 그런 노래를 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도 손잡고 열심히 뛰고 열심히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처지와 이 노래를 부르는 하박국의 처지는 굉장히 다릅니다.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되었길래 이런 상황에서도 여호와의 구원을 인해서 기뻐할 수 있다고 노래할까요?

 

1장부터 천천히 읽어서 여기까지 올테니까 1장부터 봅시다. 하박국은 굉장히 마음이 아팠습니다. 정말로 마음이 아팠습니다. 1장 2절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 하시나이다’ 일종의 절규인데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왜 안 들어주십니까라는 절규입니다. 아무리 부르짖고 아무리 외쳐도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다니 이게 웬일입니까 하는 고통이 이 하박국에게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잘 들어주십니까? 아니요 할려니까 믿음에 문제가 좀 있는 것 같고 예 할려니까 실제는 좀 안 그렇죠?

저도 우리 집사람 한창 아플 때 저녁에 숨 못 쉬겠다고 와서 기도 좀 해달라고 할 때 기도 열심히 하고 나면 숨이 딱 트여져야 될텐데 해도 안되더라구요. 별로 도움이 되지도 않는 기도를 해달라고 하니까 하기는 하는데 기도하면 숨이 탁 트이고 아픈 게 싹 날아가고... 그렇게 안되나 하는 아픔이 늘 있었습니다. 기도하면 잘 들어주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분명히 듣고 계십니다. 문제는 내가 원하는 대로 될 수도 있지만 때로는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원대로 이루어주시기 때문에 내 기도를 안 들어주시는구나라고 느낄 때가 참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셨는지를 알기 위해서 기도일지를 쓰듯이 적어두실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 그 때 그 기도를 이렇게 들어주셨구나 하는 고백을 하게 될 겁니다. 간절함 없이 기도하고 안 들어주시는구나 하고 우리는 잊어버립니다. 적절한 때에 하나님은 대답을 하셨는데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기도를 가장 적절한 때에 적절한 방법으로 이루어 주십니다. 그래서 안 들어주는 것처럼 답답하고 애통할지라도 우리는 열심히 하나님께 부르짖어야만 합니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요구하는 것을 모조리 다 들어주는 아버지는 어떤 아버지죠? 애가 해달라는 대로 그대로 다 해주는 아버지요.

문제 아버지.

문제 아버지예요? 자식을 망치는 겁니다. 애가 달라는 대로 다 해주면 안돼요. 저도 한때는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다 들어주시면 좋겠는데 왜 안 들어주실까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아하,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다 들어주시면 안 되겠다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대답은 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기도를 다 들어주신다면 여러분, 무슨 기도부터 하시렵니까? 대답하지 마세요. 안 하시는 게 좋아요. 전에 젊은 친구들하고 공부하면서 이 질문을 한번 했더니 그 친구가 실수를 좀 했습니다. 대답하지 말라는데 대답을 툭 해서요. 뭐라고 그랬는지 아세요? “온 세상 여자들...” (하하하) 그러다가 재빨리 자기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지만 그 뒷말은 안해도 다 알아들어버린 걸요. 그날 난리 났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다 들어주셔서 우리에게 슈퍼맨 버금가는 능력이 생겼다면, 여러분이 좋은 일을 하실 것 같습니까? 아마 세상을 망쳐놓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그것을 관리할 만한 능력이나 선과 악을 바르게 판단할 능력이나 의지가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생각대로 다 들어주시면 안됩니다. 결국은 우리가 우리의 원대로 기도하고 애쓴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적절하게 응답하시는 것이 바른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의 그런 방식대로 들어주신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하박국은 왜 안 들어주시느냐고 열심히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원인이 재미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하나님께 그렇게 기도를 했을까요? 힘센 사람이 힘 좀 세다고 제마음대로 막 해치는 것을 뭐라고 그러죠?

강포.

머리가 좋으면 좋은 머리 갖고 좋은 일에 써야 할텐데 머리 좋은 녀석이 그걸 가지고 꼭 나쁜짓만 합니다. 그걸 뭐라고 그러죠?

간악.

세상에! 위 아래도 없어요. 위 아래도 없이 노는 걸 뭐라고 그러죠?

패역.

남의 물건을 자기 물건인 양 훔쳐가고 빼앗아갑니다. 이걸요? 겁탈이라고 그러죠. 아 그놈들 참 말 많네. 말 많아. 이게 뭐죠? 안 싸워도 될 일을 가지고 노다지 싸우죠. 분쟁이라고 합니다.

제가 점잖게 표현합니다만 길 가다가 차 사고가 났습니다. 제일 먼저 뭐부터 해야 되죠? 목소리부터 키워야죠? 어떻게 된 건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목소리만 크면 이깁니다. 그게 분쟁입니다. 싸울 이유 하나도 없습니다. 왜요? 경찰이 와서 판단하든지 아니면 보험회사 직원이 와서 처리하라고 그러면 간단하게 될걸 우선 고함부터 질러놓고 보는 겁니다. 요새는 여자들도 만만치 않습니다. 여자들 목소리는 또 얼마나 큰지 몰라요.

좌우간 강포, 간악, 패역, 겁탈, 변론, 분쟁 이런 것이 하박국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하나님 도대체 어찌해서 내가 이런 걸 보게 하십니까?” 하고 호소하게 된 원인입니다. 세상에는 선보다 악이 득세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회사에서 진급을 잘 할려면 뭘 잘 해야 되죠?

잘 비벼야...

비비는 걸 잘 해야 된다고요? 회사에 가면 어쨌든지 비벼야 되는데 못하는 사람은 그것 참 죽기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열심히 비벼야 하고 술도 좀 해야 되고 남자라고 무서워도 안 무서운 척, 겁이 나도 겁내면 안되고 울고 싶은데 울어서도 안되고... 사회생활이라는 것이 여러가지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능력은 별로 없는데 그저 술 잘 먹고 잘 비비는 사람이 진급은 빠르더라. 그것 쳐다보면 속 터지는 거죠. 정직한 것보다는 나름대로 잔꾀를 부리고 술수를 쓰는 것이 이 사회에서는 통할 때가 훨씬 많습니다.

 

제가 포항에서만 학교 다니다가 75년도에 대구로 처음 나갔는데 그때 여기서 버스를 타고 대구 가면 대구 어디에 그 버스가 내리는지 아세요?

동부터미널.

동부터미널은 요새 이야기입니다. 거기가 신암동, 대구역 근처입니다. 대구역 가까이에 터미널이 있었는데 촌놈이 어리하게 옷가방 하나 들고 지나 가다가 “아저씨 쉬고 가세요.” 하는 아가씨한테 붙들려서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서 혼이 났던 기억이 납니다. 신암동으로 버스를 타고 들어가다 보면 신암 육교가 있었는데 거기에 대문짝만한 글씨로 ‘정직한 사람이 잘 사는 사회를’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정직한 사람이 잘 사는 사회를? 그러면 실상은 정직한 사람이 못 살고 있다는 뜻이거든요. 사회가 그런가 하는 느낌이 그때 처음 들었습니다. 제게는 그게 나름대로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는 뜻입니다. 세상에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다니는 큰 도로를 가로질러서 그 큰 글씨로 ‘정직한 사람이 잘 사는 사회를’ 그렇다면 정직한 사람이 잘 못 산다는 뜻인데? 독해력이 제법 있는 셈이죠? 사회가 그렇다는 걸 그때서야 알았습니다.

사회를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정직한 사람이 더 잘 살기보다는 부정직한 사람이 더 활개치고 살더란 말입니다. 이런 현실을 보면서 몸서리나게 아파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우리가 순교자의 후예라고 한다면 공산당 내려와서 총칼 들이대면 순교해야지 이것도 좋은 생각입니다만 생활 속에서 순교할 각오로 살아야 합니다. 혹시 잘못 생각하면 사회가 그렇게 돌아가는 걸 보고 나쁜 말 써서 미안합니다만 ‘이 망할 놈의 세상’ 하고 사회 생활을 포기해 버리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마는 결코 잘 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잘 믿는다는 사람들이 회사에서는 자포자기하듯이 억지로 생활하기도 하는데 그렇게 되면 모든 동료들이 보기 싫어집니다. 정상적인 사회 생활을 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아예 그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버리거나나 그렇지 않으면 버려두고 나 혼자 고고하게 이슬 먹고 살 듯이 산으로 내빼든가 이런 태도는 둘 다 옳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가 취해야 할 방법은 이 하박국의 방법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제멋대로 돌아가고 불의한 사람이 아무리 득세를 하더라도 그 속에서 그것을 두 눈으로 똑바로 쳐다보면서 그러할지라도 난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리라 그러면서 그 속에서 버텨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 믿는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입니다. 잘 비비는 사람 꼴은 보기 싫지만 포기하지 말고 내가 그 사람을 닮지도 말고 같이 어울려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비록 부정한 방법으로 잘 살아간다 할지라도 내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살아야 합니다. 저 사람이 선하다 악하다 자꾸 이런 것 따지지 말고 내가 도와줄 수 있고 내가 베풀 수 있는 게 없는가 그런 자세로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매어달리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위로와 하나님께서 주신 힘을 가지지 않으면 나보다 잘 비비고 술수가 좋아서 출세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정상적인 생활을 해 나가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하박국은 어떻게 이런 문제를 해결했나요?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를 했더니 5절에서 11절까지가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대답인데 ‘걱정하지 마라. 그렇게 악독한 세상에 끔찍한 갈대아인 외국인들이 쳐들어 올 거다. 외국인이 쳐들어와서 징벌을 할 거다’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악하기 때문에 갈대아인이 득세해서 쳐들어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부패하면 사회의 악이 그만큼 더 왕성해집니다. 이런 예는 굉장히 많습니다. 로마가 망하기 전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돼서 온 나라가 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그럴 때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좀 제대로만 서 있었어도 로마가 망하지 않았을 겁니다. 러시아요? 소련이 컴컴하고 공산당이 활개치던 나라라고 생각하실런지 모르지만 그 이전으로 조금 거슬려 올라가면 기독교화 되었던 나라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제대로 예수 믿는 삶을 살지 못하고 정치와 결탁을 해서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으니까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 거죠. 그래서 완전히 뒤집어져서 나라가 저렇게 된 겁니다.

교회가 부패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제대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면 사회악이 더 왕성해진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돔 고모라에 있어야 했던 의인 10명이 사실은 우리가 그 의인 10명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잘못하게 되면 이스라엘이 잘못했을 때 이 이스라엘을 징벌하기 위해서 이웃의 악한 나라가 더 강성해서 쳐들어오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대답이었습니다.

하박국의 요지는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했는데, 하나님, 내 기도 왜 응답 안 하십니까 했는데 하나님께서 기도의 응답을 주셨으니까 이제 만족했겠죠? 왜 내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십니까 하는데 하나님께서 기도의 답을 주셨으니까 만족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기도에 응답해 주셨는데 왜 만족을 못해요? 만족해진 게 아니고 아마 머리가 더 아파졌을 겁니다.

애들 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거든요. 12절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자시여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 농담이시죠? 하나님, 우리가 사망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괜히 해보는 소리죠? 그럴 수가 없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뭐라고 대답했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대답 안할 때 가만있지 왜 자꾸 대답하라고 하느냐? 이러지 않았을까요? 대답하라고 하니까 답을 하기는 하는데 차라리 모르고 있으면 속이 좀 편했을 거다. 하박국은 만족은커녕 더 큰 고통이 닥친 겁니다.

 

13절로 17절입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을 바다의 어족 같게 하시며 주권자 없는 곤충 같게 하시나이까 그가 낚시로 모두 취하며 그물로 잡으며 초망으로 모으고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그물에 제사하며 초망 앞에 분향하오니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식물이 풍성케 됨이니이다 그가 그물을 떨고는 연하여 늘 열국을 살륙함이 옳으니이까’ 여기 말하는 그는 갈대아인입니다. 이 갈대아인이 들어와서 이런 일을 한다는 것이 이게 말이나 될법한 일입니까?라고 또 다시 기도를 하는데 이건 기도가 아니고 제가 볼땐 반항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겠다는데 그것 그렇게 해서 됩니까 하는 일종의 반항입니다. 이스라엘은 선민인데 악한 민족이 이 선민을 친다는 것은 도저히 말이 안됩니다.

16절, ‘그물에 제사하며 초망 앞에 분향하오니’ 그랬죠? 전부 비유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민족이 어떤 민족입니까? 우상을 섬기는 민족 아닙니까? 우상을 섬기는 민족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는 민족을 멸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2장 1절,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높은 곳에 올라가서 하나님께서 내게 무슨 말을 하실런지 여기서 한번 버텨보겠다는 말입니다. 기도를 이렇게 해도 됩니까? 일종의 반항입니다. 반항이라고 하면 좀 이상하나요? 항변이라고 하면 좀 낫나요? 아주 도전적인 자세로 하나님께 대들고 있는 거죠.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이 하박국하고 비슷한 자세를 지녔던 한 분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거창 고등학교를 일으켰던 전영창 교장 선생님의 이야기인데 75년도에 돌아가셨고 77년도에 그 분이 써놨던 설교 원고가 작은 책으로 나왔습니다. 최근에 ‘거고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그 학교를 소개하는 책이 하나 나왔습니다. 그 분은 우리나라 정부의 해외 유학생 1호입니다. 공부하는 도중에 6.25 사변이 터져서 졸업을 포기하고 조국을 향해서 뛰어왔던 분입니다. 그 후에 학교에서 배려를 해서 졸업장을 주고 거기에서 교수로 남을 수 있음에도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 거창이라는 산골 동네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해야 되겠다 해서 시골 교장으로 간 겁니다.

거창 그러니까 지금은 어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정말 산골의 조그마한 곳입니다. 거기에 교장으로 갔습니다. 거기 가서 교장으로 했던 일들을 보면 정말 눈물없이 읽을 수 없습니다. 거창 고등학교는 이름 그대로 ‘거창한’ 학교가 되어 있습니다. 저도 우리 아들래미를 거기 보낼까 싶었는데 공부를 좀 못해서 포기했습니다. 경주에 있는 제 친구는 딸래미를 작년에 거길 보냈는데 무척 부러워요.

그 학교 졸업생 중에 한 사람이 그 교장을 제게 얘기하면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수업하다 보니까 어디서 쿰쿰한 냄새가 나더랍니다. 이게 뭐야 하고 보니까 세상에 교장 선생님 팔꿈치에 오물이 묻어 있는 겁니다. 애들이 교장 선생님 주책바가지다 이랬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학교는 70년도 초반에 이미 그 시골에 수세식 화장실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아주 시설이 좋은 사립학교에도 보기 힘든 시설입니다. 그 수세식 화장실이 막히니까 교장 선생님이 지나다가 손으로 오물을 끄집어내고 뚫어놓고는 수업하러 왔는데 실수로 좀 묻은 거죠. 좌우간 그런 분입니다.

그 분이 그 학교를 그렇게 세우면서 얼마나 고통을 겪었는지 모릅니다. 하다하다 안돼서 산에 가서 기도를 시작을 했는데 요지가 이렇습니다. “하나님 내가 명예를 위해서 여기 왔습니까? 돈을 벌러 왔습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 안 도와주십니까?” 그렇게 밤새 기도하다가 끝에 이런 말도 했습니다. “하나님 정말 이번 기도에 응답을 안 해주시면 저 남은 재산 다 팔아서 동아일보에 광고 한 면 내겠습니다. 하나님은 죽었다 하고 나도 끝낼랍니다.” 이건 기도가 아니고 반항입니다. 그렇게 울며불며 기도하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그 서산을 바라보면서 그 아름다움에 취해서 이렇게 아름다운 만물을 만드셨던 하나님이 안 계신다는 걸 내가 인정할 수가 없다. 그래서 깊이 회개하고 내려와서 다시 일을 시작하고... 그러면서 그 학교를 키워나갔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도 하다하다 안되면 반항하듯이, 도전하듯이 하나님께 대드는 사람이 결국은 나중에 신앙도 훌륭한 신앙을 얻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학생들이 학교에 가서 질문을 많이 하면 선생님이 좋아할까요? 싫어할까요?

싫어해요.

싫어해요? 불행한 학교를 다니셨군요. 왜 싫어하시죠? 실력 없는 선생님, 게으른 선생님에게 질문을 자꾸 하면 미움받아요. 정말 실력 있고 열심 있는 선생님에게는 질문하면 얼마나 좋아하는지 압니까? 그런 경험 없어요? 학교를 잘 나오셔야죠. 제가 이쪽 학교에 있을 때 쉬는 시간만 되면 여학생들이 달리기를 해요. 교무실에 줄을 서죠. 다른 선생님들이 귀찮아서 통행을 못할 정도로요. 그 쪽은 분위기가, 그렇게 공부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애들이 선생님한테 얼마나 달려드는지 몰라요. 좋은 학교입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근무했던 학교는 질문이 없었습니다. 문교부에서 이상한 정책을 시행하는 바람에 애들과 부대낄 시간적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러면 학교가 영 재미가 없어요. 우리 선생님한테 물으러 가면 대답도 잘 해주고 질문하지 않으면 터진다. 학교가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실력도 없고 능력도 없는 분이라고 생각하시면 조용조용하게 기도 몇 번 해보다가 잘 안되거든 그만 하시면 됩니다. 실력 없는 하나님께 매어 달려봐야 뭐 합니까? 그리고 게으른 하나님도 소용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능력이 있는 하나님이라고 믿는다면 매어달리셔야 합니다. 그래야 큰 것을 받습니다. 그렇게 놀라운 업적을 이루신 분들이 누워서 빈둥빈둥 구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된 게 아니라는 겁니다. 놀라운 믿음의 역사를 일으키신 분들이 게으르게 누워서 빈둥빈둥거리다가 어느 날 꿈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한 말씀 하셔서 그렇게 된 사람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변했다고 흔히 얘기하죠? 저는 사도 바울이 별로 변한 게 없다고 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과 이후에 물론 크게 변한 게 있지만 변하지 않은 게 하나 있습니다. 뭐죠? 하나님에 대한 열정과 열심입니다. 정말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저 악독한 무리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달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까 아니더라는 얘기죠. 거기서 그대로 바뀌는 겁니다. 바울이 바뀐 그 다음에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잘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왜요? 바뀌기 전에 구약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공부도 열심히 안 하고 빈둥빈둥거리다가 하나님이 나를 들어 쓰실려면 어느 날 확 바꿔서 쓰시겠죠? 아니요. 아닙니다.

전도자 무디는 구두 수선공이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놀라운 증거자가 됐다고 하는데 그래서 구두만 열심히 깁고 있어도 되는가보다라고 제가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게 아니었습니다. 무디가 구두 수선공, 직업은 구두를 수선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런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던 사람인지 모릅니다. 정말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치고 열심히 섬겼던 사람입니다. 단지 그 사람의 생계수단이 구두 수선공이었을 뿐입니다. 무디는 구두 수선공이었다가 하나님의 사자가 됐다? 아닙니다. 제가 볼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구두 수선공이었을망정 하나님 나라에 열심을 가졌던 그가 그렇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바뀐 겁니? 바뀐 것이 아니라 점점 더 확장되어 갔고 커 간 거죠.

우리 교회 젊은 집사님들을 보면서 아! 저 정도 열심 같으면 하나님께서 힘 주시고 능력 주시면 아마 큰 일 할 수 있을거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사용되는 사람은 그가 무슨 일을 하건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다하다 안되거든 하나님 제가 하박국에게 배웠습니다 하고 한번 거세게 나가보십시오. 그런 기도가 우리를 더 큰 은혜의 길로 인도해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2장 전체가 하나님께서 두번째 기도 응답을 해주신 것인데 어렵고 분량도 많습니다. 4절을 한번 보세요.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다음에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악인이 아무리 득세하고 잘 나가는 것 같아 보여도 그 악인의 결말은 보잘 것 없는 것이란 말이죠. 믿음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께서 살려 놓겠다는 뜻입니다. 지금 당장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악한 사람들보다 못해 보이고 어렵고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 빠져 있다 할지라도 믿음을 가진 의인은 하나님께서 살려 놓겠다라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사회나 교회나 세월이 지나가면 점점 더 악해져 가고 부패해 가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그렇게 악해져 갔으면 사회란 사회는 다 무너지고 교회란 교회는 다 무너졌어야 옳지 않을까요?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보면 하나님께서는 또 어느 한쪽 귀퉁이를 일으켜서 교회를 또 세워서 지금까지 온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악해져 가고 사회가 악해져 가더라도 하나님께서 그 중에서 믿는 자, 신실한 자를 보호하시며 그를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이 말씀이 한번씩 살아서 움직일 때마다 세계역사를 뒤집어 놨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박국이 분통터지는 그 아픔을 견디지 못했지만 이 말씀 한 마디에 하박국은 평안해지는 겁니다. 이 말씀을 다시 재발견해서 물줄기를 뒤바꿔 놓은 사람이 한 사람 있습니다. 누구죠?

루터.

루터는 두 번째입니다. 그 전에 루터에게 이걸 중계해 준 사람이 바울입니다. 이 구절이 로마서 1:17, 히브리서 10:38에 있는데 바울이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흔히 말하는 이신득의(以信得義),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신앙을 우리에게 전해 준 것입니다.

바울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죠? 누가 표현을 참 잘했습니다. 바울을 싣고 지중해로 가던 그 배, 바울을 왜 싣고 갑니까? 죄수죠. 바울을 죄수로 잡아서 로마로 호송해 간 그 배는 바울을 싣고 간 것이 아니라 유럽을 싣고 갔다라고 말했는데 꼭 맞는 말입니다. 바울이 죄수로 묶여서 타고 간 그 배 때문에 유럽으로 복음이 전해져서 유럽이 뒤집어진 겁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 믿음이 유럽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죠.

 

여러분, 세계 4대 문명은 전부 아시아에 있습니다. 황하 문명, 유프라테스, 이집트, 인더스 문명은 전부 아시아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명들은 어디 가고 유럽이 저렇게 득세해서 세계 역사를 주름잡아 버렸죠? 바울이 타고 간 이 배가 주원인입니다. 유럽이 세계 역사의 주무대가 되고 나서 오랜 중세 암흑시대를 거쳐가다가 이 역사를 다시 뒤집어 놓은 사람이 루터죠. 루터가 이 구절을 발견하면서 역사를 또 한번 뒤집어 놓은 겁니다. 이 말씀이 살아 움직일 때마다 세계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 놓았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 모두 속에서 다시 한번 살아 움직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해져 가고 모든 교회가 다 악해져 간다 할지라도 나 하나만이라도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의인은 세상이 아무리 악해져 가더라도 하나님께서 살려 놓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사람들을 들어서 유다인들을 징벌하고 하박국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끼면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고 항변했을 때 하나님의 대답은 ‘이 모든 일을 통해서 세상이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다’ 입니다.

2장 14절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고 말씀하셨죠? 이 모든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세상에 가득할 것을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면서 이런 일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역사를 주관하시는 가장 근본된 목적은 세상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까지 성경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도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모습을 알리시느라고 오늘 여기까지 온 겁니다. 왜 하나님은 자신을 그렇게 알릴려고 애를 쓸까요? 그냥 뭐 이렇게 있는데 퍽 나타나셔서 내가 하나님이다 한번 하시면 대번에 알텐데... 그렇게 어렵게 우리에게까지 이끌고 오시나요? 하나님은 왜 자신을 그렇게 알리고 싶어하실까요?

우리에게 복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복 주시기 위해서요? 당연히 그렇죠. 하나님께서 뭔가 부족하거나 아니면 하나님께서 무슨 필요가 있어서 자신을 우리에게 자꾸 알릴려고 하시는 게 아니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큰 복입니다.

 

여러분, 자녀 교육시킨다고 돈도 많이 들이고 고생도 많이 하시죠? 돈 많이 들이고 고생 많이 하면 아이들이 엄마 마음을 알아줍니까? 속 터지죠. 제발 좀 알아도! 뭘요? 널 위해서 있는 돈 없는 돈 탈탈 긁어가며 잠 못 자면서 이 고생하는 이 뭐 좀 알아도? 이 마음 좀 알아주면 좋겠다는 거죠. 알아주면 나한테 덕되는 거 있어요? 부모의 이 마음을 알면 누가 덕보는데요? 자기가 잘 되죠. 부모 마음을 알아주면 열심히 하겠죠. 세상에! 있는 돈 없는 돈 다 긁어 모아서 억지로 과외까지 시켜주니까 잘 합니까? 제가 들은 말은 “속았다” 입니다. 고등학교 때 그렇게 투자를 하고 공부시켜도 안 하던 놈이 대학을 가더니만, 대학을 잘 못갔어요. 부모 욕심대로 못가고 지 가고 싶은 대로 아무데나 갔어요. 그렇게 내버려뒀더니 몇 달 뒤에 “아버지 장학금 탔는데요” 하고 돈을 한 뭉치 가지고 왔더래요. 고등학교 때는 그렇게 돈을 들여가면서 붙들어 앉혀도 공부를 안 하던 놈이 대학 가더니 웬 공부를 저렇게 했을까? 그 아버지가 하는 결론이 “속았다. 저럴 줄 알았으면 내버려 둘건데...” 부모 마음을 잘 알면 아이들이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하겠습니까? 그게 그 아이의 복일텐데.

우리에게 성경을 주시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이 모든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 그걸 우리 모두에게 알리고 싶은 겁니다. 제발 이거 좀 알아달라는 겁니다. 뭐 잘못됐어요?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특히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만한 사랑을 베푸시고 계시는지 그걸 우리가 알기를 하나님께서 정말 소원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것 모른 채 우리가 이 땅에서 평온하고 행복하다? 깨어지기 쉬운 유리그릇 같은 행복일지 모릅니다. 어느 한순간에 완전히 깨어져 나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앎으로써 누리는 행복은 태풍이 불고 비바람이 치고 세상이 무너진다 하더라도 변함없을 것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다 하실 거니까 조급하게 여기지 말라는 말씀이 3절에 있습니다. 거꾸로 올라가 보십시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찌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좀 조급해요. 우리는 좀 바빠요. 기도하면 덜컥덜컥 이루어져야 되는데 하나님 이거 언제 이루어 주실런지... 하나님은 동작이 참 느리신 분입니다. 답답하기는 우리가 답답지 하나님은 좀 느긋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우리 좀 살려주이소’ 하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몇 년만에 출애굽이 이루어졌죠?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음소리가 내 귀에 들렸느니라’ 그때부터 몇 년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이 울부짖는구나 구원을 해야 되겠구나 그러면서 누굴 보내요? 모세를 보내죠. 모세가 몇 살 때 출애굽합니까? 그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도대체 몇 년간 울부짖은 거예요? 최소한 80년은 넘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딱’ 들으면 바로 ‘착’ 안 하고 뭐 그래요? 하나님은 빠른 분이에요? 느린 분이에요? 하나님이 느리다 할려니까 아무래도 좀 불경죄에 걸릴 것 같고 빠르다 하려니까 아닌 것 같죠. 너무 갈등하지 마세요. 어떨 때는 굉장히 느립니다.

그것보다 더 느린 걸 얘기할까요? 야, 이놈들 도저히 안되겠다. 심판해야 되겠다. 몇 년간 기다리죠? 노아 때는 120년, 아모리 족속의 죄는 400년. 뭔지 모르시면 창세기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동작은 그렇게 빠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있고 그때가 되면 다 이룰 것이니까 더딜지라도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는 우리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기다릴 때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면서 우리에게 놀라운 복을 주실 것이라는 것만 확실히 믿는다면 불의한 사람들이 출세를 하고 출세하지 말아야 될 사람이 올라가더라도 우리는 좀 느긋할 수 있는 겁니다.

 

하박국 3장에 가보시면 16절부터 한번 봅시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했는데 창자가 흔들릴 정도니까 두려움으로 치면 어느 정도 두려움일 것 같아요? 뼈가 썩어 들어가고 창자가 지금 흔들릴 정도로 무서운 겁니다. 그 무서움이 지금 닥쳐오는 겁니다. 그 무서움을 하박국은 뭐라고 그래요? ‘기다리므로’ 그러고 있죠. 그 환난 날을 내가 지금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사람들이 내용도 모르고 집에다 액자로 잘 걸어놓는 말씀이 있습니다. 3장 2절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혹시 이 중에 어느 구절이 집에 걸려 있지 않나요? ‘주의 일을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참 좋아 보이죠? 이 주의 일이 뭘까요? 갈대아 사람들이 침공해서 나라를 엉망진창으로 심판하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무서웠으면 16절에 창자가 흔들렸고 두렵고 떨렸다고 하는 겁니다. 그날을 내가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부흥케 하옵소서’ 부흥? 아무 때나 부흥이에요? 집에 혹시 이런 액자 있으시거든 없애라는 말은 아니고 내용은 알고 걸어두십시오. 하박국이 이상한 거 아니에요? 그걸 왜 기다려요? 2절 끝에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그걸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이 땅에 임하셔야 되겠다는 걸 확실히 받아들이고 깨닫는 겁니다. “하나님, 이 백성에게 이런 진노는 분명히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긍휼을 잊지 마십시오. 제가 그걸 기다리면서 정말 두렵고 떨립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 가운데서도 난 구원의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기뻐하겠습니다”라는 게 하박국의 고백입니다.

하박국이 형편이 좋아져서 기뻐하는 거 아닙니다. 어떠한 형편 속에서라도 이 모든 것이 하나님 손에 달려 있음을 믿고 나는 평안하겠습니다라는 고백이죠. 사실은 그게 가능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인해서 이런 기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바로 하박국처럼 어떤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이런 모습을 기억하면서 감사의 찬송을 불렀던 사람 중에 한나가 있죠.

 

사무엘상 2장 한나의 기도 속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한나가 아들 하나 달라고 그렇게 눈물로 지새웠다가 아들 하나를 얻었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한마디도 아들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없습니다. 아들 달라고 그렇게 기도했으면 아들 얻었으면 아들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야 되지 않나요? 그런데 그런 얘기가 전혀 없습니다. 부르는 노래 내용이 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고 가난하게도 하시고...’ 이게 무슨 말씀이죠? 하나님은 이렇게도 하시고 저렇게도 하신다. 뭐 어쩌라는 말입니까? 이 모든 일이 하나님 손에 달렸으니 하나님께서 나를 높이실려면 높히시고 낮추실려면 낮추시고 나를 부하게 하실려면 부하게 하시고 가난하게 하실려면 가난하게 하시고 어떻게 하셔도 전 만족합니다. 이런 고백입니다. 아들 하나 달라고 기도하던 그 한나의 기도가 얼마나 놀라운 기도로 변해버렸는지 모릅니다. 바로 하박국처럼요. 상황은 더욱 악해져 갈지라도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시고 하나님 손이라면 만족할 수 있다라는 것이 하박국만의 고백이 아닙니다. 한나도 그렇습니다. 기도 열심히 하는 분들이 그 과정을 통해서 이 놀라운 하나님의 모습을 보면서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기뻐할 수 있는 기쁨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그냥 열심히 기도만 하면 되나요? 아까 말씀드렸죠? 살면서 나중에 총, 칼 맞을 각오하지 말고 우리 평생에 그런 일은 안 올 겁니다. 여러분 목에 칼 대 놓고 죽을래 살래 이거 묻는 일이 혹시 있을런지도 모르지만 아마 없을 겁니다. 거기 가서 죽을 생각하지 마시고 어디 가서 죽어요? 예? 회사에서요. 그 다음은? 가정입니다. 가정에서 뭐 죽을 일이 있나요? 그보다 못한 일은 더러 있지 않습니까? 싸우지 마시고 그냥 죽을 각오하고 사랑하시면 가정이 천국입니다. 회사요? 그 속에서 죽을 각오하고 믿는 사람으로서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사시면 그 속에서 이 하박국이 불렀던 이 노래가 진정으로 우리의 노래가 될 것이며 내년도에도 계속해서 불러야지요. ‘무화과 나무 열매 없으며...’ 그게 단순한 노래가 아닙니다. 어떠한 역경과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할 수 있다는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고 우리의 춤이 될 것입니다. 찬송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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