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8편


1. 여호와를 찬양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때문이다(106:1, 107:1, 118:1, 29, 136:1, 대상 16:34): 이 시의 시작과 끝이 이 구절이다(1, 29). 성도들이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느낌과 비교해보자. 의외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다. 하나님을 피상적으로만 아는 자들이 하나님을 괴팍하고 함부로 심판하는 변덕스러운 존재로 생각하기도 한다. 기독교 최초의 이단인 말시온파가 그랬다. 잘 몰라서 그렇다. 진짜 하나님을 아는 성도는 선하실 뿐 아니라 영원히 인자하시다고 고백한다.

2. 하나님을 인자하시다(=헤세드)고 할 때 일반적인 의미 외에 성경만의 독특한 의미가 있을까? 선하다는 말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이는데?

    일반적인 의미 외에 ‘언약을 철저하게 지키시는 분’이란 의미가 있다(창 9:9-17, 15:18, 출 2:24, 34:10, 레 26:42-44, 대상 16:16-17, 시 105-8-10... ).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선택하시고 일방적으로 주신 언약을 따라 끝까지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시다. 자신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도 그런 의미다.

3. 여호와를 찬양해야 할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가?

    이스라엘(2), 아론의 집(3),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4): 야곱이 이스라엘(하나님과 겨루어 이김)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나 야곱의 후손이 애굽에서 구원을 받은 것은 특별한 선택이다. 아론은 12지파 중에서 특별히 선택되어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특별히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되었다. 이스라엘도 특별히 선택되어 여호와를 경외하는 민족이 되었다. 하나님에게 선택받은 모든 자들이 여호와를 찬양해야 한다.

4. 시인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자신이 고통에서 건지심을 받았기 때문이다(5): 자신의 고통을 통해서 민족이 받은 구원의 은혜가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깨닫게 된 셈이다. 혹시 고통스런 순간이 닥칠지라도 하나님께 내어놓는 자가 누리는 감격은 크게 확대되어 다가온다.

5. 고통 가운데서 기도했더니 넓은 곳에 세우셨단다(5). 넓은 곳은 춥지 않을까?

    고통이 좁은 감방이라고 생각한다면 넓은 곳은 완전히 자유로운 곳이다. 아무런 억압이 없는 곳을 상징한다. 그래서 몇 영역본들은 ‘set me free’로 의역을 했다(NLT, ESV).

6. 인류의 역사는 어쩌면 자유를 찾아 헤맨 역사라 할 수 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외침도 그리 오래 된 말이 아니다. 어쩌면 이제야 겨우 자유라는 것을 제대로 맛을 보나 싶었더니 과도한 자유를 반납하려는 경향마저 보인다. 너무 큰 자유는 부담스러운가보다. 어떻게 찾은 자유인데 이럴까? 진정한 자유는 무엇일지 본문은 근거로 생각해보자?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다(6-9): 인간은 절대적으로 독립된 존재가 아니다. 어린아이가 엄마 품에 있을 때 진정한 평안과 위로를 누리듯이 인간도 하나님의 편에 섰을 때 진정한 자유를 누린다. 이것마저 구속이라고 여기고 뛰쳐나가려는 인간은 위대한 것이 아니라 철로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 기차처럼 어리석은 짓이다. ‘누가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 이런 외침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자의 고백 아닌가?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고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성도가 복되다!

7. 시인의 고통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민족의 고통이었던 모양이다(10). 시인은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다는 말이다. 뭇 나라가 벌떼처럼 에워쌌다가 가시덤불의 불 같이 사그라진 것을 체험한 왕이 누구인가?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185,000의 군사로 포위하고 있다가 하룻밤에 전멸한 것(왕하 18-19장)을 체험한 히스기야가 가장 잘 어울린다. 그렇다고 이 시가 히스기야 시대에 지어진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히스기야의 이야기가 소재로 쓰였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추측이다.

8. 대적이 벌떼같이 덤빈다고 하더니 갑자기 ‘너’라니(13)?

    수많은 대적이라도 그 수가 별 것 아님을 의도하는 문학적인 기교 아닐까?

9. 하나님은 오른손잡이일까(15-16)?

    오른손(우편)은 능력, 위엄, 영광을 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시 110:1 = 막 12:36, 행 2:35).

10.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은 삶의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다. 자신을 다시 살게 도와준 분에 대한 감사를 잊을 수 없다. 시인은 그런 감격으로 무엇을 하겠다고 하는가?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는 것과 감사하는 것(17, 19-21): 평생을 이런 감격 속에 살겠다는 것이다. 아니, 죽을 고비가 또 있을지 모르지만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도 포함된 것이다(18).

11. 의인이 들어가는 의의 문이란(19-20) 어디에 있는 것인가?

    성전: 하나님 앞에 기쁨으로 나아가 감사하리라는 것이다. 여기서 의인이란 하나님께 구원받은 자를 가리킨다.

12. 본문의 ‘건축자’는 원문상 복수다. 돌을 버린 것이 한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생각이다. 전문가들의 일치된 생각으로 버렸으니 정말 쓸모없는 돌인데 이것이 어떻게 요긴한 돌이 될 수 있는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이적이다(23):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 기적이라는 말이다. 시인이 체험한 이적은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일이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13. 건축자가 버린 돌은 일차적으로 시인을 가리키지만 궁극적으로는 누구를 가리킬까?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이 구절을 자신에게 적용시키셨다(마 21:42, 막 12:10, 눅 20:17, 행 4:11, 엡 2:20, 벧전 2:7).

14. 복음송 ‘이 날은 이 날은 주의 지으신 주의 날일세’는 본문을 근거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본문과 차이가 좀 있을까?

    복음송의 이 날은 주일을 가리킨다. 그러나 본문의 이 날은 여호와의 구원의 날이다. 직접적으로 동일하지는 않다. 주일이 주님께서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차원에서는 구원의 날이니 원용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15. 구원의 기쁨을 노래하더니(22-24), 갑자기 ‘이제 구원하소서?’ 뭔가 이상하다!

    구원보다는 형통에, 현재의 구원보다는 종말적인(최후의 날에 완성될) 구원에 초점이 있다: 우리 번역에 사용된 ‘이제’란 말은 시간을 의미할 수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명령형에 첨가되어 간절함을 의미한다. ‘제발’ ‘부디’라는 뜻이다. 22-25절이 시인의 현재 형편을 넘어 메시야의 오심을 노래하는 문맥인 것을 참고로 하자.

16.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누구인가?

    여호와께서 보내신 자, 즉 왕, 선지자, 제사장이 일차적인 대상이겠고, 나아가 메시야를 가리킨다(마 21:9, 23:39, 막 11:9).

17.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놀라운 경험을 체험한 사람이 무엇이라고 찬송할지 본문에서 찾아보자.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27),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28): 바로 이 고백이 모든 감사, 모든 섬김의 기본이어야 한다.

18. ‘밧줄로 절기 제물을 제단 뿔에 매라’는 것은(27)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제사제도를 설명하는 레위기에 이런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내용을 모른 채 번역을 하면 전혀 다른 뜻이 되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새번역은 ‘나뭇가지로 축제의 단을 장식하고 제단의 뿔도 꾸며라’로 번역했다(NIV도 비슷함). 번역을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핵심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라: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행위 자체가, 특히 화목제는 일종의 축제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장식하고 꾸미는 일도 가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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