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09편


1. 다윗이 이런 시를 지은 이유가 두 가지라면 무엇인가?

    사람의 무고와 하나님의 잠잠함: 사랑하던 이가 까닭없이 나를 괴롭히는 것.

2.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란 표현은 독특하다. 가장 비슷한 표현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왕상 17:1, 단 3:17, 행 27:23): 찬양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의 한 가지 표현방식이니 결국은 같은 내용이지만 더 즐거워 보인다.

3. 사랑해도 대적하면 어떻게 해?

    기도할 뿐: 사랑해도 대적하는 자에게는 방법이 없다. 그러면 맞대응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무고하게 살해당한 경우에는 친족이 보복해야 할 의무가 있지 않았던가(민 35:19-27)? 그럼에도 다윗은 신 32:35절 ...내가 보복하리라...는 말씀을 기억한다. 어떤 목사님께서 ‘미친 놈을 때려잡으려니 세 배는 더 미친 짓을 해야’ 하더란다. 멀쩡한 정신으로 할 일이 아니더란다. 그러니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씀이(롬 12:21, 잠 20:22) 맞는 모양이다.

4. 5-20절은 저주다. 전혀 사랑이 아닌데? 성경답지 않은데 성도가 이렇게 해도 될까? 인간으로서 도저히 감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는 이럴 수 있다는 것인가? 다윗이 이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은 무엇일까?

    가령, 도엑의 밀고로 제사장들이 학살을 당한 일, 압살롬의 반역 때 아히도벨의 배신 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사울에게 쫓김도! 이런 상황을 고려해보면 개인의 복수심보다는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20, 참고, 레 26:38-39, 신 28:47-57). 하나님의 공의로 포장된 개인의 복수는 문제가 있겠지만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순수한 신앙을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으로 이해된다.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는 셈이다(롬 12:19).

5. 나의 오른 편에는 하나님께서(31), 대적의 오른 편에는 사탄이 서기를(6) 기도한다. 하나님과 사탄이 오른 편에 서서 뭘 하기에 그럴까?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시지만 사탄은 고소자이다(슥 3:1, 대부분의 역본은 ‘사탄’ 대신 ‘고소자’로 번역함). 대적에게 대적자가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대적이 심(재)판을 받아서 죄인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7).

6. 아무리 악인들이지만 어떻게 기도가 죄가 될까(7)?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지 않으면서(다윗의 사랑을 대적하는 것) 하나님께 하는 기도는 하나님을 우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사 1:15, 59:1-3). 잠 28:9)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7. 악인이 오래 살며 직분을 누리는 것은 공동체에 큰 해를 끼치는 일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빨리 악인을 데려가셔서 직분을 빼앗아달라는 것이다. 신약에서 이렇게 징계를 받은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누구인가?

    가룟 유다: 베드로는 이 본문을 인용하여 새로운 제자를 선출한다(행 1:20). 반면에 이런 다윗에게는 사울의 직분을 빼앗아 주셨다(대상 10:13-14).

8. 자녀나 아내까지 이렇게 고통을 겪도록 해달라는 것은 너무한 것 아닌가(9-10)?

    징벌이 가족에게 추가되는 것이 아니라 심판에 따른 당연한 결과를 강조할 뿐이다. 악인들의 악행은 자녀들에게도 결과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9-15절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7-8절의 반복 강조일 뿐이다. 악인을 철저하게 심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다. 애굽의 바로에게 내린 심판으로 그의 장자와 그의 백성이 죽임을 당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다. 심판은 이렇게 온다.

9. 유죄 판결, 단명, 직분을 빼앗김, 자녀와 아내와 소유를 빼앗김, 후손이 끊어짐, 이름이 지워짐, 악인이 받을 심판이란 심판은 다 나온 셈이다. 이 중에 가장 심각한 것은 무엇일까?

    후손이 끊어짐: 이것은 회복이 불가능한 영원한 파멸을 의미한다. 다른 모든 비극이 이 속에 내포된 셈이기도 하다.

10. 악인이 악한 짓을 일삼다가 하나님의 심판 때에는 그 악한 일이 자신에게 임한다(17, 갈 6:7, 민 14:28, 렘 51:24, 마 16:27, 계 22:12). 동일할까, 아니면 무슨 차이가 있을까?

    강도가 더 세진다(18): 자신이 행한 악이 옷이라면 심판이 임할 때는 저주가 몸에 걸치는 정도를 넘어서 몸속으로, 뼈 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하나님의 심판 원리 중에는 행한대로 갚으시되 강도는 더 세진다. 계 18:6절에 따르면 ‘모습은 그대로 질은 두 배로’ 강해진다!

11. ‘악인이 발한 저주가 타인에게 가지 않고 자신에게 돌아와 입는 옷과 항상 띠는 띠와 같아라’는 말을 한국식으로 바꿔보자.

    너도 시집가서 꼭 너 같은 애를 낳아 길러봐라: ‘내게 행한대로 그대로 당해보라’는 점과 ‘빠져나갈 수 없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12. 하나님께서 나를 선대하셔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21): 시인은 자신이 분명하게 하나님의 편에 서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주 여호와여’라는 표현도 단순하게 부르는 말이 아니라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니’(표새)처럼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드러내는 말이다. 원수들은 철저하게 패망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자신은 선대하실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편에 서 있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살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확신하는 이상한 성도도 적지 않다.

13. 가난하고 궁핍하여 중심이 상하는 자란 예수님의 표현을 빌리면 어떤 사람인가?

    심령이 가난한 자: 시인이 경제적인 어려움도 겪고는 있지만 그것 때문에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아니다. 대적으로 말미암은 고통 때문이다.

14. 인생의 허무함을 노래하는 표현이 많다. 아침 이슬, 나그네, 떠도는 구름... 본문에서도 기가 막히는 표현이 하나 있다. 무엇인가?

    석양(의) 그림자: 그림자도 허무한 인생을 표현하기에 아주 좋은 표현인데 석양의 그림자는 곧 사라질 것이니 더 더욱 허무하다. 바람에 불려가는 메뚜기도 만만치는 않아 보인다. 온 천지를 뒤덮고 있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대단한 인생처럼 보여도 별 것 아님을 묘사하기에 적절하다.

15.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면서도(21) 육체가 약해질 정도로 금식하며 기도해야 하는가(24)?

    구원의 확신을 가진 성도에게도 현실적인 아픔이 있다. 그러면 더 간절하게 기도하라는 신호로 알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온전하게 이루어질 그 나라가 임하기까지 성도는 이런 전투적인 삶을 살도록 명받았다.

16. 중심은 상하고(22) 육체는 쇠약한데(24) 원수들은 나를 조롱한다(25). 고통당하는 다윗의 현실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머리 흔들기’를 당한 분이 또 누가 있는가?

    예수님을 비난하던 자들이 그랬다(마 27:39). 어떻게 흔들었을까? 아마도 가로젓기 아닐까?

17. 26절은 21절의 반복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셔야 하는 이유가(22-25 ↔ 27-31) 어떻게 다른가?

    전자는 자신이 고통스럽기 때문이지만(22-25) 후자는 하나님의 행하심이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다(27, 31).

18. 다윗의 승리가(27)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라는 것을 어떻게 대적들이 알 수 있을까?

    대적들은 강하다. 다윗은 쇠약하기 이를 데 없다. 이길 수 없는 다윗이 승리하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19. 대적이 저주한다고 그 저주대로 될까? 발람더러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고 명하시는 것을 보면(민 22:12, 35) 저주도 효력이 있는 모양인데?

    저주나 축복도 결국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므로 하나님의 편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느 13:2): 사람의 말에는 일정한 능력이 있는 모양이다. 말한대로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이니 사람의 말에도 비슷한 능력이 주어졌을 것이다. 아담의 범죄로 거의 다 잃어버리긴 했어도 일부 남아있는 모양이니 말을 조심해야 한다!

20. 다윗의 현실이(1-5, 22-25) 즐거워할 수 있는가(28)?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는 고백이다: 지금 즐거운 것은 아니지만 그 날이 곧 올 것을 기대하며 힘들어도 절망하거나 포기할 수 없다는 고백이다. 즐겁게(28) 찬송할 날을(30)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21. 혼자서도 찬송하면 될텐데 굳이 많은 사람 중에서 찬송할까(30)?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널리 전하겠다는 각오다.

처음으로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