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07편 |
속량과 만족(=좋은 것으로 채우심): 선함과 인자하심은 하나님의 본성이다. 그런 그 분이 하신 일은 이스라엘을 속량하시고 만족케 하신 것이다. 종살이 하던 데서 불러내시고, 사막에서 방황하던 그들에게 거주할 성읍을 주셨다. 속량이란 돈을 주고 사서 양민을 만든다는 뜻이다. 종이 해방되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일까? 천민이 양반이 되는 것? 종업원이 사장이 되는 것? 회사에서 직급이 하나 올라도 그 난린데? 2. ‘동서남북 각 지방에서부터’란 표현은 출애굽과 관련이 없지 않은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내용과 관련이 있다: 107편은 105, 106편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배경도 같은 것으로 본다. 즉 출애굽과 바벨론에서 귀환을 동시에 배경으로 삼고 있어서 때로는 중첩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2절 외에도 10절의 ‘흑암과 사망의 그늘’ 16절의 ‘놋문’도 바벨론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사 9:2, 45:2). 3. 주리고 목이 마른데 왜 영혼이 피곤할까? 육체의 고난이 심해지면 영혼에 영향을 준다. 심리적으로 절망상태에 빠진다. 육체의 쇠약함보다 영혼의 쇠약함이 더 문제다. 4. 이 시편에서 여러 번 반복되는 구절을 찾아보자. 6절과 8절: 6절은, 13, 19, 28절에서, 8절은 15, 21, 31절에서 반복된다. 후렴처럼 불려진 것 아닐까?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과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5. 인생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며 고통스러울 때(4)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6, 13, 19, 28): 인생의 진짜 문제는 하나님께만 해법이 있다.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정말 사소한 것들뿐이다. 우리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가 수두룩하다. 하나님만이 진정한 답이라는 것을 아는 자만이(↔전 6:3, 6) 만족을 누리게 된다(9, 15, 21, 31). 6.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전에 이스라엘의 상황을 어떠했는가, 그 원인은 무엇인가? 쇠사슬에 매여 있었으며(10, 14),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이다(11):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라는 표현은 이사야가 앗수르에게 점령당한 이스라엘의 비참함을 묘사할 때 썼던 표현임을 감안하면(사 9:2) 여기서는 바벨론 포로를 가리키는 듯하다. 7.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잡혀가는 것이 겸손케 하려는 하나님의 뜻이라고(12)? 그 과정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출애굽, 가나안 입성, 사사시대, 왕정시대를 거치면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가 얼마며, 거역하면 어떻게 되는지 몸소 체험을 다 했다. 그럼에도 제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 이 모든 과정을 살펴보면 더 이상의 방법이 없다는 것과 아들을 징계할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8. 이스라엘이 겪는 고통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훈련이라면 어떤 특징이 있는가? 도울 수 있는 자가 없다(12): 그러므로 스스로 깨닫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9. 여호와께 간구하는 자와 미련한 자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여호와께 간구하는 자는 쇠사슬에 매여 쇠빗장이 있는 성에 갇혔을지라도 놓여나(16) 만족을 누리고(9) 하나님을 찬송하지만(15) 미련한 자는 가지고 있는 음식조차 먹지 못하여 죽는다(18). 먹는 것이 싫으면 죽을 때가 다 된 것이다. 산더미처럼 쌓아놓아도 먹을 수 없다면 얼마나 불쌍한가! 하나님 없이, 교활하게, 세상의 지혜로 쌓은 부의 말로다. 10. 미련하여 고통을 당하다가도 정신을 차리고 부르짖는 자들에게 여호와께서는 어떻게 도우시는가? 말씀을 보내어(20):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선지자를 보내서 위로의 말씀을 주셨다는 것이다. 고통 가운데 있는 인생들에게 최고의 양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제는 선지자대신 성경을 주셨다. 적절한 때에 적절한 말씀이 생각나도록 성경말씀이 우리 머리 가운데 있어야 한다. 11. 10-22절은 사슬에 매인 자의 원인과 구원에 관한 것이다. 23-32절은 어떤 자의 구원에 관한 내용인가? 바다에서 표류하다가 구원 받은 자: 이스라엘이 겪어야 할 고난의 크기가 어떤 것인지 비유로 설명하는 것이다. 12. 이스라엘은 유목민족으로 바다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바다에서 당하는 고난을 이렇게 잘 알까? 솔로몬 때에 거대한 선단을 띄웠을 뿐 아니라(왕상 9:26-28) 여호사밧이 북 이스라엘의 아하시야와 함께 에시온게벨에서 배를 건조하기도 했다(대하 20:35-37). 이스라엘이 바다와 전혀 상관없는 것은 아니었다. 13. 파도가 심하게 치면 얼마나 두려운지 겪어본 사람만 안다. 어느 정도일까? 영혼이 녹는다(26), 모든 지각이 혼돈 속에 빠진다(27): 사도 바울의 일행이 풍랑에 휘말렸을 때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고 했다(행 27:20). 속이 다 뒤집히고 구토로 아래 위가 구분이 되지 않는다면 이해가 되려나? 14. 흔들리는 배에서 겪어야하는 고통은 어떤 것(무엇)일까? (위 아래로, 좌우로)구르고 비틀거리는 것(26-27): 흔히 멀미라고 하는 것은 배가 조용히 움직이는 경우에 생기는 것이다. 서 있을 수도, 걸을 수도 없는 지진이 지속적으로 일어난다고 생각해보라. 무슨 생각이 가능하겠는가(=모든 지각이 혼돈 속에 빠지는도다)? 15. 광풍을 일으키시는 이도 하나님, 잔잔케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으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그 분이 우리의 아버지시라면 더 할 일이 없을까?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신다(30): 바다를 잔잔케 하시는 것이 일반 은총이라면 항구로 인도하시는 것은 특별한 은혜다. 아무리 파도가 거센 바다에서도 하나님이 답이다. 인생의 거친 바다에서 이런 체험을 누리는 자가 복되다. 16. 사슬에 매인 자와 바다에서 표류하다가 구원 받은 자에 대해서 노래했다. 이제는(33-42) 어떤 자들의 구원에 대해서 노래하는가? 농부들의 구원: 17. 하나님께서 강을 광야로, 샘을 마른 땅으로, 옥토를 염전으로 변하게 하시는 것(33-34)을 한 마디로 말하면 무엇인가? 하나님의 심판: 바다에 광풍이 일어나 바다 물결을 일으키게 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은 주민의 악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가나안 원주민이 쫓겨난 것도 그들의 악함 때문이고 가나안 땅이 황폐하게 된 것도 이스라엘의 불순종 때문이다. 반면에 ‘광야가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마른 땅이 변하여 샘물이 되게 하시는 것’(35)은 구원을 가리킨다. 18. 누가 하나님의 구원을 누리게 되는가? 주린 자(36), 궁핍한 자(41), 정직한 자(42): 예수님의 표현을 빌리면 ‘심령이 가난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의를 위하여 핍박 받는 자’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능욕을 쏟아 부으시고 길 없는 황야에서 유리하게 하시는(40) 고관들이란 하나님 대신 하나님 노릇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19.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한다(딤전 6:10). 풍성한 소출이나 가축은 괜찮은가? 돈이나 풍성한 소출이나 가축은 다 같은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라고 알고 감사하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을 주인으로 알고 섬기는 것(=사랑함)이 문제다. 20.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풍성한 소출을 거둘 때라도 명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다시 압박과 재난과 우환을 통하여 그들의 수를 줄이시며 낮추실 수 있다는 것(39): 사사기의 역사가 이런 과정을 잘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복 주실 때 자기가 잘 나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교만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그런 능력을 주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신 8:18). 21. 하나님께서는 고관들에게 무슨 억하심정일까(40)?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고관들을 가리킨다. 이유 없이 높은 자를 낮추시는 것이 아니다. 정직하지 못하고 사악한 짓을(42) 했기 때문이다. 22. 궁핍한 것은 무슨 벼슬인가(41)? 궁핍한 것이 잘난 것은 아니다. 영적으로 궁핍한 자, 즉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있는 자를 가리킨다. 심령이 가난한 자를 가리킨다. 23. 궁핍한 자의 가족을 양 떼같이 지켜주신다(41). 왜 하필이면 양 떼일까? 수가 많다는 점과 반드시 목자가 보호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번성케 하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이다. 24. 악인들이 번성하고 정직한 자가 고통을 겪는 현실을 보면서 어떻게 살지? 일시적으로 이해할 수 없더라도 결국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닫고(43) 기뻐할(42) 날이 올 것이다. 그냥 좀 지켜보자(43). 이런 결과를 아는 성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다(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