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06편


1. 106편은 105편과 쌍둥이란다. 출애굽 과정을 회고하면서 105편은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노래했다고 한다면 106편은 어떻게 대조적인가?

    하나님을 시험하고 거역한 죄에 대한 참회다: 그럼에도 할렐루야(여호와를 찬송하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을 맺는다. 진정한 참회는 찬송으로 시작해서 찬송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2. 아무도 여호와의 권능을 다 말할 수 없으며 다 찬양할 수도 없다(2)는 이 고백과 가장 흡사한 찬송가 가사를 찾아보자.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하나님의 사랑은 다 기록할 수 없다’(찬 304장).

3. 본격적인 참회를(6-43) 하기 전에 ‘다 찬양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는 것은 무엇에 대한 확신인가?

    은혜로 구원받을 것에 대한 확신의 고백이다: 현실은 바벨론에 포로로 와 있다고 할지라도(41, 46) 형통할 것과 기쁨을 자랑할 날이 올 것임을 확신하며(4-5) 감사하라는 것이다. 현재의 포로 생활조차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의 결과라고 인정하는 셈이다(1).

4. 감사하라(1-2)와 구원의 확신(4-5) 사이에 있는 3절은 뭔가?

    정의를 지키는 자와 공의를 행하는 자만이(하나님을 신뢰하는 자 만이) 찬양의 주체와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의와 공의는 하나님의 중요한 속성이다.

5. 시인은 개인적인 구원뿐만(4) 아니라 민족을 위해서(5) 간구한다. 주의 택하신 자 주의 나라, 주의 유산은 각각 무엇을 가리키는가?

    주의 택하신 자는 이스라엘 민족을, 주의 나라는 이스라엘(=유다) 나라를, 주의 유산은 상속받은 땅, 즉 가나안 땅을 의미한다. 이런 것들이 회복되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런 상태를 가장 잘 나타내는 다윗 시대를 염두에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

6. 출애굽의 긴 역사를 돌아보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조상들의 범죄다(6). 시인의 눈에는 왜 그것이 제일 먼저 보일까?

    현실의 아픔(바벨론의 포로)도 바로 우리의 죄 때문이라는 고백이다(우리도 우리 조상처럼 죄를 지었나이다). 자신들이 잘못해서 벌을 받아도 하나님을 원항하기 쉬운데 시인은 현실이 이렇게 된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고 있는 것이다.

7. 홍해에서 무엇을 거역했지?

    앞에는 홍해, 뒤에는 추격해오는 애굽 군대를 보면서 모세에게 원망한 일이다(출 14:11-12): 애굽에서 베푸신 기이한 일들을 생각해보면 거기서도 원망할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기이한 일을 기대하는 것이 옳은데 말이다.

8. 출애굽 이후에 이스라엘이 하는 짓을 보면 도무지 은혜 받을 구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계속 은혜를 베푸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기 이름을 위하여(8)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백성들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면 언제든지 포기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하시는 일이니 백성들의 범죄에도 포기하시지 않는 것이다. 독하게 말을 듣지 않는 자녀에게 부모로서 할 것은 다 해주면서 하는 말 ‘니 잘 되라고 하는 것 아니다. 나는 부모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 뿐이야’ 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9. 하나님의 능력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순간이동 하듯이 한 방에 홍해를 건너보낼 수는 없는 걸까?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방법의 문제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일하시지 않는다. 반드시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 그것도 순종하는 사람의 결단과 수고를 통해서 일하신다! 갈라진 바다가 언제 다시 합칠지 두려워서 들어가지 못하면 홍해를 건너는 기적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이런 순종과 헌신을 요구하신다.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주신 하나님의 마지막 자존심 아닐까? 두려움 가운데 홍해를 바삐 건너야하는 수고도 없었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기억하지 못하지 않을까? 요리를 만들고, 먹는 게 귀찮다고 하루에 알약 하나씩만 먹어도 되도록 한다면 특별한 병자는 몰라도 건강한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10. 열 가지 재앙에서 살아남고, 홍해를 걸어서 건너는 엄청난 기적을 체험하고 감격의 노래를 불렀다. 이걸 잊을 수 있을까?

    금방 잊어버린다(13-14, 7, 출 15:22-26): 아무리 큰 감동이라도, 아무리 큰 아픔이라도 잊어버리는 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라고 기념일, 기념비, 각종 절기와 규례(제사와 정결법)를 가르쳐 주셨다. 누군가는 망각이 복이라고도 했다. 아픔을 잊어버리는 것은 복일지 몰라도 현실에 눈이 멀어 하나님께서 주신 감격을 잊어버리는 것은 복이 아니다. 홍해의 감격을 잊어버리는 데에 삼일 밖에 걸리지 않았다.

11. 홍해의 감격을 잊어버리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

    기다리지 않는 것(13)과 욕심을 부리는 것(14, 민 11:4): 하나님께서 일하실 틈을 주지 않은 것이다. 능력 없는 사람은 다급하다고 느끼고 방방 뛰어도 능력 있는 사람은 그리 급하지 않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힘이 드는 일이 있어도 좀 느긋하게 그 분의 역사를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 어쩌랴? 우리만큼 급하지 않으신 분이시니! 내 생각과 내 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생각과 그 분의 때를 소중하게 여기자.

12. 기다리지 않는 것(13)은 마라사건을 의미하고 욕심을 부리는 것(14, 민 11:4)은 고기를 먹고 싶어하면서 저지른 사건이다. 그러면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한 것은 무슨 사건인가?

    광야 40년 내내 저지른 모든 사건: 어떤 특정한 사건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40년이나 지속된 하나님의 기적 속에서도(만나, 헤어지지 않는 옷과 신발, 부르트지 않는 발) 하나님을 시험했다는 것이다.

13.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는데 결과적으로 고통을 당한 일이 무엇인가(15)?

    메추라기 사건(민 11:18-20, 33-34): 하나님께서 홧김에 메추라기를 너무 많이 주셨다. 질리도록 먹어보라는 것이다. 과도하게 먹어야 하는 것만큼 고역이 없다. 안 먹으면 죽는다고 윽박지르면(민 11:33) 먹기는 하지만 이런 은혜는 곤란하다.

14. 다단과 아비람은 르우벤 지파의 지도자로 모세의 지도력에 도전한 것이다(민 16장), (고라는 아론의 자리를 노렸다). 모든 이적이 모세를 통해서 나왔는데 어떻게 모세의 권위에 도전했을까?

    하나님을 잊었다: 모세가 세움을 받은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일(출 19장)임을 잊은 탓이다. 인간적인 면만 본다면 ‘자기가 하는 일을 나라고 못할 것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더구나 장자 지파의 지도자가 난데?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나타난 현상, 즉 사람만 보았기 때문에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었다. 졸면 목이 잘릴 수도 있는 전방에서 보초를 서는 것도 몇 달이 지나면 만성이 된단다. 아무리 인간이 그런 존재라고 하더라도 온통 기적 속에 살면서도 어떻게 하나님을 잊을 수가 있었을까? 기적도 너무 잦으면 일상이 되는가? 끔찍한 적응력이여! 이 사건을 언급하며 고라를 빼준 것은 고라의 후손들이 후대에 성전에서 찬양하는 자들이었기(대하 20:19) 때문일 것이다.

15. ‘가지가지 한다’더니 하나님께 반역하는 행위란 행위는 종류별로 다 하는 모양이다. 어떻게 하나님을 송아지 형상으로 만들었을까?

    하나님을 잊은 탓이다(21): 하나님의 말씀을 잊은 것이 곧 하나님을 잊은 것이다.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음에도(출 20:4) 자기들의 생각에 따라 송아지를 만든 것이다. 함의 땅에서 보여준 기사와 홍해의 기적은(22)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16. 애굽에서 보고 배운 바에 따르면 송아지는 힘과 번성과 부의 상징이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어떤가?

    풀 먹는 짐승(20): 사람을 창조하시고 열매와 채소를 양식으로 주셨다. 풀 먹는 짐승이란 인간보다 못한 존재다. 하나님을 그렇게 여긴다고(롬 1:23)? 하나님의 진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17. 왜 애굽을 함의 땅이라고 할까?

    함의 후손들이 살았으니까: 유대인들은 애굽을 ‘미츠라임’이라고 불렀다. 미츠라임은 함의 아들이다.

18. 하나님의 작정도 변하는가(23)?

    신실한 성도의 기도에 따라 뜻을 돌이키신다: 실제로는 우리 눈에 그렇게 보일 뿐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변하는 것이 아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노를 돌이키게 한 것은 사실이나 하나님께서 그런 것까지 다 감안하시고 이스라엘을 멸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깊은 속뜻을 우리는 알 수가 없으므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것을 변개해서라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믿어도 틀린 것은 아니다.

19. 그들이 멸시한 기쁨의 땅이란 어디를 가리키는가?

    가나안 땅: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특별히 골라놓은 최고의 땅을(겔 20:6, 민 13:27) 사람을 삼키는 땅이라고 했으니(민 13:32)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기가 찰 노릇이다.

20. 24-27절은 가데스바네아에서 반역한 일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 사건과 관계없는 내용은 무엇인가?

    27절: 이 말씀은 가데스바네아에서 징계하신 내용에는 없다. 별도의 예언이긴 하지만(레 26:33, 신 4:27, 28:64) 훗날 그대로 이루어진다. 시인이 보기에는 광야에 엎드러진 선조들의 범죄행위나, 앗수르나 바벨론으로 흩어지게 만든 선조들이 저지른 범죄행위가 같은 것이다. 약속의 땅을 상속받지 못하는 점도 같다. 거의 비슷한 두 개의 그림을 겹쳐놓고 보는 셈이다.

21. 바알 브올에서 행한 일이 단순한 제사음식을 먹은 탓이 아니다(민 25:1-3). 그 때 비느하스가 한 일이 무엇인가?

    모든 백성들이 슬피 울며 회개하는 가운데서 버젓이 음행하던 남녀를 한 창에 찔러 죽였다(민 25:8). 적군이 물밀 듯이 쳐들어오는 상황에서 명령에 불복종하는 병사에 대한 즉결처분이나 마찬가지다.

22. 백성들이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여 모세에게 미친 재난이(32) 무엇인가?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것(민 20:12): 므리바에서 물이 없어 백성들이 원망할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지팡이를 가지고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다. 그러나 모세는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이나 내리쳐서 물을 냈다. 격한 감정을 드러낸 것이다. 지도자가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하는 일이다(약 1:20).

23. 여호와께서 멸하라고 말씀하신 그 이방 민족들을 멸하지 아니한 것은 여호수아와 사사시대의 일이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우상을 숭배하게 됨(36): 하나님은 이런 결과를 초래할 것을 미리 아셨다. 그렇다고 예방차원에서 이방족속을 멸하라는 것으로 이해하면 하나님을 악한 분으로 오해할 수 있다. 이미 그 전에 지은 죄만으로도 멸망을 받아 마땅한 족속들이었다(창 15:16). 그래서 멸하라고 하셨는데 제대로 순종치 않아서 이런 결과가 빚어진 것이다.

24. 그렇게 경고에 경고를 거듭해도 우상을 숭배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뭘까? 우상을 섬기는 일은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음란한 짓이라고 말하지만 당사자들은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우상숭배자들은 마음껏 먹고 마시며 사랑을 나눴다. 그런데 그것이 즐거움이 아니라 무엇인가?

    올무: 재미있다고? 자유롭다고? 짐승을 사로잡기 위한 미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생의 즐거움에 빠져 영원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바로 이런 짐승에 지나지 않는다.

25. 40-46절은 바벨론 포로시대도 포함되겠지만 대체로 사사시대에 대한 언급이라고 해야 할 표현을 하나 찾아보자.

    여러 번 건지셨다(43): 사사시대의 중요한 특징은 반역, 징계, 회개, 구원의 과정을 지속적으로 반복한다는 점이다. 46절은 바벨론 포로 시대에 더 방점이 찍힌 것 같다.

26. 자신들을 사랑하는 하나님을 거역하면 결국 누구의 통치 아래 들어가는가?

    자신들을 미워하는 자들의 통치 아래(41): 왜 이런 바보짓을 할까? 그것도 한 두 번이 아니라 400년 사사시대 내내 그랬다. 어리석은 게 인생인가!

27. 끊임없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이스라엘을 반복해서 구원하고 징계를 하시되 끝내 버리시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언약(45): 하나님께서 스스로 맺으신 언약이다. 그 언약을 지키시느라고 반복적으로 뜻을 돌이키시고 은혜를 베푸셨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 탓이 아니다.

28. 시인의 공동체가 처해있는 현실은 어떠한가?

    여러 나라(앗수르나 바벨론은 여러 나라의 복합체다)에 흩어져 구원을 받아야 할 처지다(47): 바벨론에 포로로 가 있는 상태라고 본다. 여기에서 구원을 받아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진작에 잘 섬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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