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05편


1. 감사하며(=노래, 찬양) 구하고(=아뢰며) 알려라(말하는 것, 자랑하는 것)는 것이 이 시편의 핵심이라고 말한다면 혹, 빠진 것이 혹 있을까?

    즐거워하는 것(3): 이 모든 일의 바탕이 즐거움이어야 한다. 찬양도, 기도도, 전도도 의무감이 아니라 감사의 표현이어야 한다. 1-4절을 요약하면 ‘기이한 일을 행하신 여호와를 기뻐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다(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서 1문).

2. 한 절이 다른 절을 포함하는 경우는(5절처럼) 원문에는 두 문장이지만 우리말로는 두 문장으로 나누기 어렵거나, 원문과 순서가 달라지는 경우 등이 있다. 5절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보자.

    ‘그의 종 아브라함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아’(원문으로는 이것이 6절), ‘그가 행하신 기적과 그의 이적과 그의 입의 판단을 기억할지어다’(원문의 5절): 순서만 바꿔서 두 절로 나눠도 되겠다.

3. 출애굽과 관련하여 ‘그가 행하신 기적과 그의 이적’은 알겠는데 ‘그의 입의 판단’은(5, 7) 무엇을 가리키는가?

    온 땅의 통치자로서 내린 결정: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이다. ‘기적’과 ‘이적’은 생존이 불가능한 광야에서 40년간이나 이스라엘을 먹여 살리는 방법이었다.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다는 의미로 읽으면 좋을 것이다. 판단은 판결이나 심판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고 대적하던 애굽을 심판 하신 일도 포함하는 것이다. 이런 놀라운 경험을 잊을 수가 있을까?

4. 이스라엘이 ‘그가 행하신 기적과 그의 이적과 그의 입의 판단’을 기억해야 할(5)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언약을 기억하고 계시니까(8):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그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기억하고 계시기 때문에 행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억하고 실천하시는데 이스라엘이 그것을 잊어버린다면 배신이다. 기억하라(5)고 명하시는 것을 보면 잊을 수도 있겠다는 말 같은데 실제로 이스라엘은 잊었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잊은 것이 비극의 원인이다.

5. ‘천 대에 걸쳐 명령하신 말씀’이란(8) 영원한 언약과(10) 동일한 내용이다. 천 대에 이르도록 ‘무엇을 하시겠다’는 말씀인가, 천 대에 이르도록 ‘무엇을 하라’는 명령인가?

    천 대에 이르도록 복을 주시겠다는 것(11): 땅을 주신다는 것은 땅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땅에서 누릴 것을 다 누리도록 하겠다는 것이다(출 20:6). 천 대에 이른다는 말이 얼마나 긴 세월인가? 우리나라에서 오래 된 가문이라도 지금 세대는 대체로 3, 40대에 불과하다.

6.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말씀이 동일하다(11, 출 6:8). 그런데 아브라함에게는 언약, 이삭에게는 맹세, 야곱에게는 율례를 주셨다고 하는가?

    동일한 언약에(10), 맹세와 율례의 성격이 포함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약속하시고, 스스로 맹세하셨으니 이스라엘도 지킬 것은 지켜야(율례) 하지 않겠는가?

7.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원인이 이스라엘이 잘 나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란 증거는 무엇인가?

    숫적으로 적었다(12): 떠돌아다니는 나그네였을 뿐이다. 강하고 잘난 민족들이 많았음에도 가장 약하고 불쌍한 아브라함을 택하신 것이다. 지금도 인구가 국력이라고 여기는 판에 고대에 숫자가 적은 것은 가장 불쌍한 것이다. 자식마저 없었던 아브라함이니 더욱 불쌍한 처지이었다. 땅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을 뿐(창 13:15) 아브라함 말년에도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땅은 사라의 매장지로 쓸려고 산 막벨라 굴 뿐이었다.

8. 하나님께서 이 불쌍한 나그네를 보호하시는 바람에 애매하게 꾸지람을 들은 왕이 누구인가?

    애굽의 바로, 그랄의 아비멜렉: 거짓말을 한 것은 아브라함, 이삭인데 책망은 바로나 아비멜렉이 들어야 했다. 그래서 아비멜렉은 힘없고 불쌍한 나그네 아브라함을 찾아와서 평화조약을 맺자고 한다. 유일한 조건은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창 21:23). 왕은 아니지만 야곱의 외삼촌 라반도 이런 류의 책망을 들었다(창 31:24).

9.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에게 언제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었고 선지자로 삼았는가?

    진짜 기름은 성령이다. 기름을 붓는 예식을 행하는 것은 그 전에 임하신 성령을 눈으로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찾아오신 것 자체가 성령으로 기름을 부으신 것이다.

10.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주신 땅에도 기근이 닥치는가?

    분명히 그렇다. 그런데 잘 보면 기근의 성격이 다르다. 아브라함 때의 기근은 작은 시련이었다. 어렵지만 그 땅에서 이겨냈어야 하는데 애굽으로 갔다가 큰 어려움을 겪었다. 야곱의 때에 닥친 기근은 그를 애굽으로 이주시키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다(창 15:13-16). 야곱은 떠나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었음에도 하나님께 고하고 요셉을 만나러 가겠다고 했더니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동행하겠다고 하셨다. 길게 보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짧게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한 둘이 아니다. 결국은 길게 보면서 죽더라도 가는 것이 믿음의 길이다.

11. 요셉은 팔려갔나, 하나님께서 보내셨나(17)?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보내신 것이고,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팔린 것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떻게 그럴 수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12. 요셉은 종으로 팔려갔고, 억울하게 옥에 갇혔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형통했다고 한다(창 39:1-3, 23). 그를 통해서 온 백성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먼저 보내졌다고 고백했다. 그러니까 종살이도, 옥살이도 힘들지 않았을까?

    상식적으로 옥살이가 고통스럽지 않은 사람은 없다. 요셉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다(18)고 했는데 난외주를 참고하자. 원어는 ‘혼’이 쇠사슬에 매였다고 한다. 정신적으로도 고통스러웠다는 의미다. 나중에야 이해하게 되었지만 당시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13.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견디어내야 한다. 언제까지?

    단련이 끝날 때까지(19): 요셉은 온 세상을 통치하는 자리에 오른다. 그 전에 그만한 준비를 해야 했다. 그것이 고통스러운 단련의 기간이었다. 큰 인물이 될 사람에게는 큰 시련이 온다. 이런 시련이 없이 큰 인물이 되면 사상누각처럼 쓰러진다. 특히 철없는 재벌 2, 3세나 초고속 승진한 자들이 그렇더라.

14. 요셉의 고난이 끝난 것은 여호와의 말씀이 응한 때이다(19). 여호와의 무슨 말씀이 응하였을까?

    하나님의 계시(바로의 꿈)나 작정(요셉의 꿈), 요셉의 예언(관원장들의 꿈을 해석한 것: 이 경우에는 ‘요셉의 말이 응할 때까지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다’는 뜻) 등으로 해석이 다양하다. ‘말씀’이라고 번역된 말(다바르)은 ‘계시’로도 번역이 가능하다.

15. 옥에 갇힌 죄수가 일거에 실세 총리가 되는 이런 일이 정말 일어날까?

    난세에 영웅이 나는 법: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불가능하지만 그야말로 극약처방이 아니고는 방법이 없는 비상시에는 있을 수도 있다. 요셉의 경우에 이런 난국을 만드시고 해법까지 알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16. 야곱이 가족을 이끌고 애굽으로 갔는데 애굽을 왜 함의 땅이라고 할까?

    애굽을 가리켜 미츠라임이라고 하는데 함의 둘째 아들의 이름(미스라임)이다: 노아의 세 아들은 셈, 함, 야벳이다. 이스라엘(야곱)은 셈의 후손이다.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다. 이 네 아들의 이름은 지명이기도 하다.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현재의 지명으로 말하면 이디오피아, 애굽, 리비아, 팔레스틴을 가리킨다.

17. 야곱이 함의 땅에서 나그네가 된 것은 정상적인 일이 아니다. 왜 그런지 창 9:26-27을 참고하자.

    셈이 번성하고 함의 자손(가나안)은 그 그늘에서 살아야 하는 건데 지금은 거꾸로 된 셈이다. 나그네가 되었다는 것은 그 땅에서 오래 살아서 될 일이 아니란 것이다. 실제로는 400년이나 살았다. 400년이면 그 땅에 동화되기에 충분한 시간이지만 이스라엘은 정체성을 잃지 않고 결국은 나왔다. 나그네란 사실을 잊지 않은 탓이다.

18.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번성한 것도, 대적들의 마음이 변한 것도 다 여호와께서 하신 일이다(24-25). 비슷한 예로 일제가 한국을 짓밟은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다가 총리 청문회에서 낙마한 분도 있던데?

    크게 보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나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학대한 것은 바로 자신이 스스로 마음을 강퍅하게 한 탓이며 그 결과로 엄청난 심판을 받았다. 인간의 악한 생각이나 행동조차 하나님께서 쓰시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일반인들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런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오해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이제는 교회 내의 발언도 이방인들에게 전해지는 시대에 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19. 28절을 개역성경과 비교해 보라.

    뒷부분이 반대로 번역되었다: ‘그들은 그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도다’가 직역이다.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다는 말인데 70인역이 본문을 수정하여 애굽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것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부정문을 긍정문으로 바꾸었는데(거역하지 아니하였도다 → 거역하였도다) 개정은 70인역을 따르되 부정문을 살리느라고 단어를 바꿨다(거역하지 → 지키지). 다소 어색한 문맥이라 해도 함부로 이렇게 바꿀 수는 없다.

20. 애굽에 내린 징조 중에서 9번째 재앙인 흑암이 왜 제일 먼저 나오지?

    이전의 모든 재앙보다 더 두려운 재앙이었을 것: 대부분의 재앙이 애굽의 신을 심판하는 것인데 흑암 재앙은 애굽 최고의 신인 태양을 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재앙과 비교하면 직접적인 고통이 없다고? 우리 조상들이 신체적인 고통보다 명예가 손상되는 것을 더 고통스럽게 여기는 점과 비교해보자.

21. 물이 피로 변하여 물고기가 죽었다면 개구리는 죽지 않았을까?

    죽어야 정상인데 죽기는커녕 번성하는 것이야말로 이적이다.

22. 애굽에 내린 재앙은 피, 개구리, 이, 파리, 가축의 악질, 악성종기, 우박, 메뚜기, 흑암, 장자의 죽음이다. 본문과 재앙의 순서를 비교해보자.

    대체적으로 비슷하지만 도치된 것과(파리와 이, 흑암), 생략된 것이(악질과 독종) 있다. (이가 피부를 괴롭히는 것이 악질이나 독종과 비슷한 점이 있으니 같은 것으로 취급하려는 의도일까?)

23. 비도 거의 내리지 않는 애굽에 우박이? 그것도 화염과 함께?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심판이고, 더 두려운 것이다.

24. 우박 다음에 메뚜기 재앙이 임하는 것으로 순서상으로 맞다. 왜 그럴까? 이 순서가 바뀌면 어떻게 되는지 생각해보자.

    메뚜기 재앙이 먼저 일어난다면 우박이 포도나무나 무화과나무에 손실을 입힐 수 없다. 즉 우박이 농사를 완전히 망쳐버리고 메뚜기는 그 남은 것마저 처리해버리는 것이다.

25. 애굽에서 노예 취급을 받던 이스라엘이 빈손으로 나오지 않고 은금을 가지고 나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승리자로 나왔다는 말이다: 쫓겨나온 것도 아니고 도망친 것도 아니다. 승리자로 당당하게 나왔다는 뜻이 된다. 비틀거리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나 그들이 떠날 때 애굽이 기뻐하였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26. 200만이나 되는 대군이 광야길을 행군하려면 무엇이 문제가 될까?

    더위와 추위, 양식, 물(39-41): 더위는 구름기둥으로, 추위는 불기둥으로 막으시고, 양식은 메추라기와 만나로 먹이시고, 물은 반석에서 나오게 하셨다. 그야말로 기적의 연속이다.

27. 물이 없는 광야에서 강같이 흐르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물이 나와야 할까?

    폭포수처럼 솟아 나와야 한다: 반석이 갈라지면서 거대한 폭포수처럼 물이 쏟아지는 광경은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쏟아지지 않으면 강물처럼 흐를 수도 없거니와 200만이 넘는 백성들이 마실 수도 없다.

28. 아브라함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아브라함을 기억하시고 그 후손들에게 이렇게 은혜를 베푸셨는가?

    아브라함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그의 거룩한 말씀)을 기억하셨다는 말이다.

29. 나온다는 표현은(43) 출애굽을 가리키고, 땅을 주신다는 것은(44) 가나안 정복을 가리킨다. 이 모든 구원의 과정은 참으로 즐거운 것이다(43). 실제로 그러했는가?

    애굽에 재앙이 쏟아질 때 고센 땅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추격하던 애굽 군대가 홍해에 수장되었을 때 얼마나 기뻐 찬송했는가? 날마다 이적 속에 거하는 것이(39-41)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힘 한번 쓰지 않고 무너뜨린 여리고 전투나, 해와 달과 우박이 우군이 되어준 가나안 전투의 승리는 얼마나 짜릿했을까? 그런 가운데서도 그것을 기뻐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기는 있었다. 그 모든 일들을 뒤돌아 보면 정말 즐겁게 노래하는 것이 옳다.

30. 하나님께서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혜를 베푸셨으니 이스라엘이 염치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의 율례를 지키고 그의 율법을 따라야지(45): 탈북자들이 엄청난 경비를 들여서 한국까지 온단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에서 가나안 입성까지 얼마의 경비를 지불해야 할까? 그냥 율법을 지키라고만 하셨다. 긴긴 역사를 훑어본 마무리치곤 뭔가 허전하다? 자녀를 위해서 일평생 고생만 한 부모가 원하는 바가 그렇다. ‘너희만 잘 살면 된다’는 부모의 소박한 소망처럼 하나님께서도 ‘율법을 잘 따르라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라’고 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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