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02편


1. 다짜고짜로 기도를 들어달라고 덤빈다(1-2). 기도의 순서(찬양, 감사, 회개)를 완전히 무시한 것 아닌가?

    그만큼 고통이 심하다는 의미 아니겠는가? 너무 다급하면 전후사정도 무시하고 덤빌 수도 있다. 다른 신이나 절대 권력자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인자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는 가능한 일이다!

2. 얼굴을 숨긴다는 것은 외면하는 것이다(사 59:2). 실제 그럴 리는 없는데 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서 얼굴을 숨겼다고 생각하는가?

    현실의 혹독함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는가?’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탓이다. 그럼에도 다시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은 위대한 신앙이다. 매를 맞아도 아버지의 손이라는 것을 아는 탓이다(10).

3. 시인의 현실은 누구를 닮았는가?

    욥: 극심한 고난 가운데 있다. 원수들이 있고(8), 극심한 질병도 있었던 것 같다(3, 5). 뼈가 숯같이 탔다거나 살이 뼈에 붙었다는 표현이 비유만은 아닌 모양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마음이 상한점이다(1). 욥은 끝까지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결국은 온전하게 회복된다.

4. 자신의 삶과 현재의 처지를 어디에 비유하고 있는지 다 찾아보자.

    연기, 숯, 마른 풀, 광야의 올빼미, 황폐한 곳의 부엉이, 외로운 참새, 기울어지는 그림자: 허무하고(연기, 숯, 마른 풀, 그림자) 외롭다(올빼미, 부엉이, 참새). 완전히 버려진 인생 같다고 느끼는 것이다.

5. 일반적으로 어떤 경우에 음식 먹는 것도 잊어버릴까?

    다급하고 정신이 없을 때: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면 엄청나게 배가 고파진다. 시인의 경우는 식욕이 없어서 먹지 않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아(한글역본에서 번역되지 않음, 영역본 stricken, smitten) 풀같이 쇠잔해져버린 결과다.

6. 광야의 올빼미, 황폐한 곳의 부엉이,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외로움, 소외: 올빼미나 부엉이는 홀로 살고 주로 밤에 활동하는 특성을 지녔다. 여기서는 삶의 근거지에서 쫓겨나 밤을 지새우는 외로운 존재로 묘사된 셈이다. 더구나 참새는 무리지어 사는데 자신을 외로운 참새라고 한 것은 극도의 소외감을 표현한 것이다(개역은 이런 의미로 참새라고 번역한 모양이다. 그러나 원문의 의미는 그냥 ‘새’다).

7. ‘내 원수’와 ‘내게 대항하여 미칠 듯이 날뛰는 자들(원문은 한 단어임)’과 마찬가지로 ‘나를 비방하는 것’과 ‘나를 가리켜 맹세하는 것’은 같은 내용의 반복(대구적 동의어)이다. 나를 가리켜 맹세하는 것이 어떻게 나를 비방하는 행위가 될까?

    아마 저주의 맹세일 것: 번역이 다양하다. 흥미로운 것은 표새와 NIV인데, ‘내 이름을 사용하여 저주합니다’라는 식으로 번역했다. 저주할 때 사용하던 이름으로 유명한 것은 여로보암이나 아합이다. 철저하게 징벌 당하는 표본이었다. 그런 식으로 내 이름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8. 재는 먹는 것이 아니라 뒤집어쓰는 것이다. 재를 머리에 뿌리고 통곡하는 것이 가장 큰 슬픔의 표현인데 왜 먹었지?

    뒤집어쓰는 것보다 더 강조된 표현이다: 당연히 시인도 재를 뒤집어쓰고 통곡을 했는데 이 행위가 심하다 보니 재가 눈물과 함께 입으로 들어간 것이다.

9.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난이 왜 왔다고 생각하는가?

    주의 분노와 진노로부터(10): 그러면 자기 탓이 아니란 말인가? 주께서 분노하신 이유를 어디서 찾는가? 주께서 들어서 던지셨는데(10) 주께 매달린다는 것은(1-2) 이 표현의 핵심이 자신의 고난의 깊이를 토로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탓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10. ‘기울어지는 그림자’는 조금만 지나면 사라진다. 그러나 ‘풀의 시들어짐’도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이 틀림없지만 당장 시드는 것이 아니라 계절이 바뀌어야 시드는 것 아닌가?

    벤 풀이라고 생각해보라(시 72:6, 잠 27:25): 풀을 베서 뜨거운 햇볕에 말리는 장면을 염두에 두고 있음이 틀림없다.

11. 3-11절은 개인적인 아픔이 틀림없는데 12-22은 좀 달라 보인다. 어떤 아픔인가?

    국가적 아픔과 회복: 개인적인 아픔이 국가적 아픔으로 승화(?)되었다. 자신의 아픔이 민족의 아픔과 별개의 것이 아니란 것이다. 개인의 아픔도 민족의 아픔으로 말미암아 온 것일 수도 있다. 아마도 나라가 망하고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간 그 비극이 이 시편의 배경일 것이다.

12. 시인이 이해 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해야 하는 것은 자신과 하나님의 현격한 차이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차이가 나는가?

    자신은 기울어지는 그림자, 쇠잔하는 풀(11)에 불과하지만 주는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12): 이 고백은 하나님의 영원하심이 곧 자신의 것이 될 것이라는 소망을 품고 있는 것이다. 소멸하는 그림자에 불과한 자신을 하나님께서 자녀로 삼으시고 회복하실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이 그 무엇보다 소중한 지혜다.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잘 모르는 참으로 무식한 사람이다.

13. 본 시편에서 하나님을 어디서, 어떻게 부르는지, 어떤 특징이 있는지 살펴보자.

    여호와(1, 12, 15-22), 주(1, 2, 10, 12, 13, 14, 15, 24-28), 하나님(24): 제일 많이 쓰인 것이 ‘주’다. 주라고 번역된 말은 거의 대부분 인칭대명사이니 제외하면 여호와라는 신명이 국가적 재난의 회복을 바라는 대목에서 집중적으로 쓰였다(12-22).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을 부를 때 특히 이 이름을 많이 사용했다.

14. 주의 백성들이 고난을 당하면 즉시 구원하시지 않고 언제 구원하시는가?

    정한 때(13): 왜 그러실까? 하나님에게는 임기응변이나 상황논리란 게 없다. 작정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정한 때라는 것은 하나님의 작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정한 때를 기다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 때를 알 수 없기에 어떤 상황에서라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17).

1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실 때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천하 만민이 여호와를 경외함(15, 18, 22): 이스라엘이 멸망당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멸시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멸시받을 분이 아니란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실 것이라는 고백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시온의 돌이나 티끌도 은혜를 받는다(14). 다 무너진 시온이 회복될 것이라는 의미다. 그리하여 여호와의 이름과 영예가 드높아 질 것이다.

16. 아직은 시온이 건설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왜 이미 건설되고 회복된 것처럼 말하는가?

    이런 시제를 확신의 완료형이라고 한다. 히브리 어법상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표현할 때 완료형(일종의 과거형태)으로 쓰기 때문이다. 비슷한 예를 든다면 영어에서 가정법 미래의 경우에 과거형을 쓰는 것이다. 분명히 미래를 말하면서 동사의 시제는 과거다. 우리말에도 그런 예가 있기는 있다. ‘너 죽었어!’ 형식은 과거형인데 내용은 미래의 확실한 의지를 나타낸다.

17.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란(18) 누구를 가리키는 말일까?

    장래 세대 즉 다음 세대: 일차적으로는 다음 세대를 위한 것이지만 확대하면 포로 생활에서 놓여날 세대, 신약에 이르면 전혀 다른 세대가 등장할 것을 다 포함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다음 세대를 위하여 바로 위에서 고백한 회복의 말씀이(12-17) 기록될 것이라는 것이다.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기록하라고 하셨고(출 24:4), 여호수아도(수 24:26), 사무엘도(삼상 12:5)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록했다. 오늘날 성경이 우리에게 전해질 것에 대한 예언의 말씀과 다름없다. 이렇게 기록된 말씀을 따라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18. 하나님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시는가?

    높은 성소, 하늘에서 성도를 살펴보신다(19):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먼 곳에 계시지만(=거룩) 결단코 자기 백성을 버리시지 않고 세밀하게 살피고 계신다(=사랑)는 고백이다. 우리 인생과 현격한 격차를 인정하면서도 뗄 수 없는 관계라고 고백한다.

19. 하나님께서 땅을 살펴보시고 발견한 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갇힌 자, 죽이기로 정한 자: 바벨론 땅에 포로로 간 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을 해방한다(=겔 37:12의 ‘열고’와 같은 단어)는 것은 에스겔이 환상에서 본 해골의 부활(겔 37장)과 마찬가지다.

20. 민족들과 나라들이 함께 모여 여호와를 섬기는 일이 언제 일어날까?

    이스라엘이 회복되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교회를 통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사라진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될 것에 대한 예언이다.

21. 시인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은가(23-24)?

    아무래도 중년에 죽을 병이 든 모양이다.

22. 민족의 회복을 노래하더니(18-22) 갑자기 또 개인적인 슬픔(23-24)에 젖어드는가?

    민족의 장래에 대한 확신이 개인적인 슬픔을 이겨낸다(25-28)! 슬픔에 젖은 자신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영원할 주의 자손의 한 부분으로서 자신을 보는 것이다.

23. 주의 연대가 대대에 무궁하다고 해서 자신이 일찍 죽으면 안 되는가? 자기도 그렇게 오래 살아야 하는가?

    그럴 리가? 영원하신 하나님의 부스러기 같은 은혜라도 달라는 것 아닐까(막 7:28)? 히스기야처럼(사 38:10-11) 나라를 위해서 지금은 살아야 한다는 걸까? 이어지는 내용을 참고하면(28) 단순히 자신의 회복만을 위한 간구라기보다는 민족의 회복과 영원함을 바라는 기도 아닐까?

24. 갑자기 천지창조 얘기는 왜 하는가?

    천지조차도 옷처럼 낡아지는 일시적인 것일 뿐 오직 하나님만 영존하시다는 고백이다.

25. 주께서 영존하시다는 것을 이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라를 빼앗기고 포로로 가 있다고 해도 주의 자손은 영존할 이유가 바로 주님의 영존하심이다. 개인적으로는 죽어서 사라질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은 영존하리라는 고백이다. 개인적인 아픔을 토로했지만(3-11) 시인이 진짜 고백하고 싶은 것은 이렇게 암울한 민족의 현실을 보면서도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푸셔서 회복되고 영원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회복은 오늘날 교회(영적 이스라엘)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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