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99편


1. 반복되는 동일한 표현이 무엇이 있는지 찾아보자.

    거룩하시도다(3, 5, 9): 일종의 후렴이다. 매 단락을 이 구절로 매듭짓는 것은 이 시편의 핵심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를 찬송해야 할 근본 이유다. 거룩이 구별된다는 의미지만 ‘깨끗하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은 위대하시지만 점도 흠도 없이 깨끗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진정으로 찬송 받으실 분이시다.
    우리 하나님(5, 8, 9): 하나님을 아주 친근하게 부르는 표현이다. 경배하고 두려워 떨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감사하고 기쁨으로 다가갈 수 있는 친밀한 관계임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2. 하나님을 어떤 분이시라고 하는가?

    위엄이 있고(1, 3), 위대하고 높고(2), 거룩하시고(3, 5, 9), 크시고(3)), 의롭다(4).

3. 하나님께서 좌정하시는데 왜 땅이 떨리는가?

    좌정하신다는 것은 ‘공식적인 자리에 앉으셨다’, 즉 ‘집무를 시작하셨다’는 뜻이니 앞의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와 같은 의미다. 그러니까 1절은 표현이 달라도 같은 의미의 반복이다.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께서 납시었으니 만물이 그 앞에 떨며 엎드리는 것은 당연지사다.

4. 이 시편이 언제 기록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윗이나 솔로몬 시대라면 모를까 다른 시대에 ‘시온에 계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고 모든 민족보다 높으시도다’ 라고 말하는 것은 이불 속에서 만세 부르는 것 아닌가?

    인간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만민 위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별로 없어서 그럴 수 있다. 문제는 정말 하나님은 그런 분이신지 아닌지 믿느냐 마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진짜 실력있는 분이 꼭 실력을 드러내야 하나? 실력을 쉽게 드러내는 것은 진정한 실력자가 아닐 수 있다. 하나님의 문제가 아니라 믿을지 말지를 결정해야하는 우리의 문제다.

5. 여호와를 찬송하라고 해야지 왜 그 분의 이름을 찬송하라고 할까?

    이름이 그 분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사물에 이름이 있다. 누가 붙였을까? 아니 누가 이런 방법을 생각해냈을까? 만드신 분이 그러셨다(창 1:5, 10).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이름을 주시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이름이라는 기막힌 방법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땅에 지번을 붙이거나 컴퓨터 메모리에 주소를 부여해서 편리하게 사용하게 고안한 것과 비교해보자.

6. 정의를 사랑하는 것과 왕의 능력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4)? 정의를 사랑해야 능력이 있는 걸까?

    적지 않은 역본들이 ‘왕의 능력은 공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다(개역, 표새, 우리말, NKJV). 공의를 행하여야 능력(자격)이 있는 것처럼 여겨질 가능성이 있다. 하나님의 능력은 거기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개정역처럼 읽는 것이 옳아 보인다. 공의를 행함으로 능력을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공의를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7. 왕이 정의를 사랑하면 어떻게 되는가?

    나라가 제대로 된다. 백성이 왕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다. 정의를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것만 해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는데 아예 ‘정의를 사랑한다’는 것은 좋은 음식을 자녀에게 먹이기 위해서 온 정성을 다 하는 부모의 모습처럼 여겨진다.

8.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하셨다면 이스라엘은 얼마나 공의로운 나라였는가?

    실제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온전하게 세워지도록 선지자, 제사장, 왕을 세웠으나 제대로 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하게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온전하게 공의가 세워지는 것은 종말에, 최후심판 때에야 이루어질 일이다. 성도는 그런 확신을 가지고 그 나라를 사모하며 사는 것이다.

9. 발등상이란 왕이 보좌에 앉았을 때 발을 놓는 곳을 가리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필이면 발등상 앞에서 경배하는가? 그냥 ‘하나님 앞에서’라고 하면 좋을 텐데? 대상 28:2을 참고하자.

    성전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라는 의미다(9절의 ‘성산에서’ 참조):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데 다윗은 발등상이라고 여겼다(132:7, 애 2:1). 언약궤 자체를 하나님처럼 여기지는 않았다. 언약궤 자체를 주목하지 않고 거기에 발을 얹고 계시는 하나님을 주목했다는 것이다. 대단한 다윗이다!

10. 모세와 아론, 사무엘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간구와 응답: 백성들을 위하여 간구하여(6-7), 응답을 받았다(6, 7, 8). 모세(출 32:11-13)와 사무엘(삼상 7:8-12, 12:23-25)은 확실히 그런 적이 있는데 아론도 그런가? 여기서 세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간구한 것은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진짜 제사장 노릇을 한 분은 아론이다. 그렇다고 아론이 공식적인 제사장 역할만 수행한 것은 아니다(민 16:44-50).

11. 하나님께서 이 세 사람의 간구에 응답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주신 증거와 율례를 지켰기 때문이다(7):하나님께서 이들을 특별히 준비하신 측면이 강하지만 인간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당시의 불순종과 패역한 세대 속에서도 하나님께만 충성했던 분들이었다. 이런 분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

12. 사무엘은 구름기둥을 본 적이 없지 않은가?

    구름 기둥의 여러 역할 중에서 하나님을 가리는 역할이 있다. 그러니까 ‘구름 기둥 가운데서’라는 말은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가운데서’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한 채 음성만 들은 것을(삼상 3:1-14)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음성만 들은 것과 같이 취급한 셈이다.

13. 하나님의 응답의 핵심은 무슨 내용이었을까?

    용서(8): 이 세 분들이 하나님께 간구한 것이 대부분 백성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것이었다. 원문이나 영역본을 보면 ‘그들의 행한 대로 갚기는 하셨으나’란 표현은 용서하시는 하나님보다 뒤에 첨부된 것이다.

14. 결국, 하나님을 높이고 예배해야할 중요한 하나님의 두 가지 성품은 무엇인가?

    공의(4)와 용서(8): 일반적으로 신이라고 불리는 존재와는 전혀 다른 성품이다. 하나님 외에 공의와 용서를 중요하게 여긴 신이 있는가? 힘이 있든지, 크든지, 먹을 것을 주든지 해야 신의 자격(?)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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