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98편


1. 왜 새 노래를 부를까(96:1 사 42:10, 계 5:9)?

    알맞은 노래가 없어서: 하나님께서 기이한 일을 행하셨기 때문이다. 이전의 어떤 노래도 어울리지 않는 기이한 방법으로 구원을 베푸셨기 때문이다. 새 노래가 곧 새로운 간증인 셈이다.

2. 찬송의 대상은 당연히 하나님이시다. 그러면 찬송의 이유, 방법, 주체에 대해서 무엇이라 하는가?

    찬송하는 이유: 기이한 방법으로 구원을 베푸셨기 때문이다(1-3).
    찬송하는 방법: 소리 나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찬송한다(4-6).
    찬송하는 주체: 만물이 찬송해야 한다(7-8).

3. 여호와의 구원은 기이하다. 모든 나라 사람들이 알 수 있는 방법이었다. 무슨 일을 염두에 두고 이런 고백을 하는 걸까?

    출애굽: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사건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일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이할 뿐이다. 이스라엘이 흔들릴 때마다, 하나님을 잊어버렸을 때마다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출애굽 사건이다.

4. 하나님도 오른손잡이 이신가?

    손은 권능을 상징하고(출 6:1, 사 59:1), 오른 손은 의로우신 권능을 상징한다(출 15:6). 지금도 중동사람은 오른손은 밥을 먹거나 악수를 하는데 쓰고, 왼손은 화장실에서 사용한단다.

5. 이스라엘의 구원이 어떻게 하나님을 위한 것인가?

    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온갖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 자식을 위한 것인가, 본인을 위한 것인가? 둘 다 해당되겠지만 결국은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구원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것이라면 이스라엘이 하도 변덕이 심해서 취소될 위험이 크지만 변함없으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서 하시는 일이기에 변함이 없으시다.

6. 이스라엘의 구원이 어떻게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는가? 예컨대 애굽에 내린 징계와 이스라엘의 정착과정에서 가나안 원주민에게 내린 징계에 대해서 설명해보자.

    애굽은 요셉의 은혜를 잊고 이스라엘이 번성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엄청난 압제를 가했다. 심지어 아들이 태어나면 강에 던져 죽이도록 했다. 가나안 원주민에게 내린 징계도 그들의 죄악이 가득 차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400여년 전에 이미 예고하셨다(창 15:16). 실제로 가나안 주민들은 우상숭배에다 음란하기 그지없었다(레 18:24-27).

7. ‘그가 이스라엘의 집에 베푸신 인자와 성실을 기억하셨으므로’(3) 이 번역은 좀 헷갈린다. 누가 무엇을 기억하셨다는 말인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한 인자와 성실을 기억하셨다: 그래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더니’ 세상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되었다는 말이다. 인자와 성실은 조상들에게 맺은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실 것을 가리킨다.

8. 무악기파가 있었다. 아마도 악기가 사람을 흥분시키는 요소가 있다고 본 것 일까?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겠지만 시편은 모든 악기를 동원해서 하나님을 찬송하란다(4-6). 찬송하는 데에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

    즐거워하는 것(4, 6, 8): 노래가 즐겁지 않은 법도 있는가?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감격없이 의무적으로 하는 찬송은 즐겁지 않고 고역일 수도 있다.

9. 바다와 세계와 산악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빠져서는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여호와가 왕이시기 때문이다(6): 개념상으로는 여호와가 왕보다 더 상위개념이 아닌가? 그런데도 ‘왕이신 여호와’란 말을 쓰는 것은 ‘여호와께서 통치하신다’는 의미다. 바다도 산악도 그 왕의 통치 아래 있다(9)는 전제를 가지고 하는 말이다.

10. 하나님은 이미 임하셨고 통치하시지 않았는가(1-3)? 그런데 또 심판하러 임하실 것이라고?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그 분이 언젠가 다시 임하실 것이라는 사상은 성경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것을 우리는 종말론적인 최후 심판이라고 부른다. 반드시 끝날이 있다는 것이다(96:13, 사 2:2-5, 단 12:13, 암 5:18, 습 1:7, 마 28:20, 막 13:13, 행 17:31, 롬 2:5, 살전 5:2, 벧전 4:7, 계 1:7).

11. 하나님의 심판 잣대는 의와 공평이다.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심판이 될 것이다(계 16:7, 19:2). 그러면 안심인가?

    자력으로 이 심판을 통과할 수 있는 인생은 없다. 그래서 독생자를 보내주셨다. 믿는 자는 바로 이 의를 충족시킨 것으로 간주하시겠다고 하셨다. 사랑과 공의의 접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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