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95편


1. 시편 95-100편은 작자 미상의 신정시(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에 대한 찬양시) 모음이다. 그 중에서 95편은 서론 격이다. 95편도 객관적으로는 작자미상이지만 히 3:8-11과 히 4:7절을 참고해보자.

    7-11절이 히브리서에 인용되었는데(히 3:8-11) 재차 인용되는 부분(히 4:7)에서 다윗의 글이라고 한다! 다윗의 작품이라는 객관적 증거는 없지만 그렇게 알려졌던 모양이다.

2. 1-2절을 ‘오라, 나아가자, 노래하자’로 요약한다면 6-8절은 어떻게 대구를 이루는가?

    ‘오라, 무릎을 꿇자, 듣자’로 요약할 수 있다. 1절과 2절은 3+3음절의 반복이다. 우리네 시조가 3+4음절의 반복인 것처럼! 그래서 1-2절을 세 단어를 4번 반복하는 형태로 고쳐보려니 아무리 해도 안 된다. 이것이 번역의 비애다.

3. 하나님께 나아가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노래하든지 듣든지, 둘 중의 하나다. 듣는 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며, 노래하는 것은 그 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인생의 목적이 그렇다(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서 교리문답 1번).

4. 여호와께 나아가서 즐거워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 여호와께서 구원의 반석이 되셨기 때문이다(1, 신 32:15). 이 시편은 출애굽의 감격을 바탕에 두고 있다(8-11). 성도의 삶의 기본이 바로 이 구원의 감격이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잊을 수 없듯이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잊을 수 없다(고전 5:7).

5. 꼭 시를 지어 노래해야 할까? 시를 지을 재주가 없으면 어떡하지?

    다른 번역들을 참고하면 시를 짓는다는 의미보다는 ‘악기로 반주되는 노래를 크게 부르는 것’이란 의미다.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래를 부르자는 의미다.

6. 하나님의 크심에 대하여 노래하는데 하나님이 모든 신들보다 큰 왕이라고(3)?

    왕신(?)인 셈이다. 신중의 신이라는 의미이지만 온갖 잡신을 섬기는 이방인의 관점을 차용한 것일 뿐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다는 관점에서 보면 영 이상한 표현이다.

7. ‘땅의 깊은 곳’은 ‘산들의 높은 곳’과 대조를 이루고(4), ‘바다’도 ‘육지’와 대조를 이룬다(5). 이런 것들이 전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하면 될 것을 왜 이렇게 표현할까?

    고대인들에게 하늘과 땅은 경험할 수 없는 곳이지만 여기서 언급된 4곳은 잘 하면 경험할 수도 있는, 손에 닿을 듯 닿을 듯 하면서도 잘 닿지 않는 곳이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더 실감날 수 있는 표현 아닐까? 돈의 위력도 수천억이나 수조원이라고 하면 영 실감이 나지 않지만 우리가 다룰 수 있는 금액보다 조금 더 많은 것이 실감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8.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어떠한가?

    목자와 양(7): 백성이라는 단어에 주목하면 왕과 백성의 관계도 되겠지만 ‘그가 기르시는’ 표현(대부분의 영역본, the people of his pasture)에 주목하면 목자와 양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해야겠다. 목자가 있으면 양이 걱정할 일은 없다.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는 목자의 소관이다. 그냥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목자의 음성을 듣기만 하면 된다. 므리바나 맛사에서 이스라엘은 쓸데없이 똑똑한(?) 양이었던 셈이다.

9. 므리바나 맛사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

    물이 없어서 불평하다가 모세를 향하여 대들었던 사건이 있었다. 므리바라는 말이 ‘다투다’는 뜻으로 같은 짓을 두 번이나 저지른 탓에 같은 이름을 지닌 곳이 두 군데가 있다(출 17:1-7 호렙산 부근, 민 20:1-13 가데스 바네아 부근), 맛사는 ‘시험하다’는 뜻으로 처음 므리바와 같은 곳이다. 모세를 향하여 다툰 것이 곧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었다(출 17:7, 민 20:13).

10. 9절부터 왜 갑자기 주어가 바뀌었지?

    하나님의 음성(9-11)을 바로 들려준다. 사실은 8절부터 하나님의 말씀의 직접 인용한 것이다. 개역성경은 7절에서 문단을 끊어주고(... 듣기를 원하노라) 8절부터 인용한 것으로 명시했는데 개정은 다소 애매하다.

11. 학기 초에 학생들은 은근히 선생님을 시험해본다. 그러다가 제대로 걸리면 혼이 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시험할 뿐만 아니라 조사했단다(9). 그러면 어떻게 되나?

    맞아 죽어야 하는데 야단만 맞고 끝났다. 그럼에도 40년 동안 근심하며 돌보셨다. 장본인들이 광야에서 죽는다고 해도 후손들이 가나안으로 갈 수 있도록 하셨다. 오래 참으시고 관용하시는 하나님(롬 9:22),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시다(롬 15:5).

12. 학생들이 선생님을 시험해볼 수 도 있지만 보통 한, 두 번의 시도로 선생님다운 것을 알고 끝이 난다. 이스라엘은 정말 악한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행한 일을 보고도 계속 시험했다: 광야 40년은 날마다 기적의 연속이었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는가, 아닌가?’ 이럴 수 있었을까?

13.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은 므리바에서 끝내야 했다. 하나님께서 많이 참으셨지만 어디, 무슨 사건에서 터지고 말았는가?

    가데스 바네아의 불순종(민 14:23-24):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는 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함을 의미한다. 이 안식이 곧 천국의 모형이다(히 4: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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