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89편


에스라人 헤만은 88, 에스라人 에단은 89 편을 지었다. 아마도 가까운 사람이었으니 두 편을 가까이 배치한 것 아닐까? 차이점이라면 88편은 개인적인 슬픔이 주를 이루지만 89편은 다윗 언약과 관련된 공동체적 슬픔이 주를 이룬다.

1. 시인의 영원한 찬양주제는 인자와 성실이다(1-2). 하나님께서 얼마나 인자하시고 성실하셨는지 본문에서 찾아보자.

    언약을 끝까지 이루실 만큼 인자하시고 성실하실 것: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회초리를 들망정 언약을 폐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30-37). 결국은 회초리를 들었다(38-41). 그로 인한 깊은 탄식과 호소가 이 시편의 핵심이지만 그런 아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은 변함없다는 고백이다.

2. 인자의 짝은 주로 진리다(시 25:10... 잠 16:6). 그런데 여기서는 성실이다(1, 2, 24, 33, 49). 진리와 성실은 본래 같은 어근에서 나온 말이라서 의미상 큰 차이는 없다. 다만, 진리는 ‘거짓이 없다’는 의미라면 성실은 무엇이 없을까?

    변함이 없다: 인자가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의미하므로 인자와 성실은 변함없는 사랑을 거듭 강조하는 셈이다.

3. 2절에서 시인이 하는 말은 누구의 말인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하늘에서 무엇을 세운다는 것이 말이 되나? 단순한 하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이라는 의미다(NKJV, in the very heavens). 하나님의 처소에서 인자와 성실을 견고히 하시는 분은 하나님일 수밖에 없다.

4.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의 구체적인 예가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시인이 영원히 찬양할 구체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다윗과 세우신 언약(삼하 7:12)을 지키시는 것: ‘누가 우리 주와 같으리이까?’ 하는 것도 ‘언약을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그럴만한 능력이 있으니까요(8)!’ 하는 말이다. 나라가 망하는 지경에서도 하나님께서 이 언약을 이루실 것을 확신하고 찬양하는 것이다. 2절에 사용된 두 개의 동사(세우다, 견고히 하다)가 다윗 언약에서도 동일하게 사용된다(4).

5. 동일한 현상을 두고 나라마다 다른 표현을 쓰기도 한다. 우리는 ‘몸을 푼다’고 하는데 영어는 ‘몸을 덥힌다’(warm up)고 하고 일본은 ‘몸을 조인다’고 한단다. ‘언약을 맺으며’라는 말을 직역하면 ‘언약을 자르며’가 된다. 언약은 자르는 것이다. 왜 언약을 자를까?

    언약을 맺을 때 짐승을 반으로 잘라서 언약의 당사자들이 그 사이로 통과했다. 언약을 어기면 짐승처럼 되겠다는 서약이다.

6.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5-8)?

    지존: 영광과 존귀와 능력은 물론, 어떤 분야에서도 비교할 대상이 없는 유일하신 분이시다.

7. 여호와를 찬양하는 주체가 하늘이 될 수 있는가(5)?

    하늘은 천사를 의미한다: 바로 뒤에 이어지는 ‘거룩한 자’들과 대구를 이루는 것으로 보아 ‘하늘’은 ‘하늘에 있는 존재들’을 가리킨다.

8. 여호와와 비교할 자를 왜 구름 위에서 찾을까? 땅 위에서 찾지 않고?

    땅에서는 아예 없다는 뜻이다. 최소한 구름 위(하늘)에 있는 존재, 즉 신들이라야 명함이라도 내밀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명함을 내밀기는커녕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7).

9. 비교할 대상이 없는 유일하신 하나님, 하늘의 존재들조차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어떤 점을 찬양하는가?

    능력과 성실하심: 지존자를 떠받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멸망해가는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가장 절실한 것이다.

10.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9-14)?

    창조주: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것은 일도 아니다.

11. 바다와 하늘과 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설명하는데 라합이 왜 나오나?

    여리고의 기생(거의 라캅에 가깝다)이 아니라 거대한 바다 괴물을 일컫는 말이다. 발음이 약간 다르다.

12. ‘남북’은 ‘다볼과 헤르몬’과 대구를 이룬다. 다볼과 헤르몬도 남북의 의미일까, 동서의 의미일까?

    두 산이 위치상으로는 남서와 동북이다. 남북의 대구라는 점에서는 동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해 보인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동서남북을, 즉 온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의미다.

13. 능력 있는 분이 이걸 함부로 휘두르면 문제가 크다. 하나님은 어떤 원리를 따라 능력을 발휘하시는가?

    의와 공의를 따라, 인자와 진실로(14): 그러므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원칙도 없이 능력만 크고 힘만 있다면 믿을 수 없다. 세상의 많은 독재자들이 그랬다.

14. 하나님은 우주 만물의 창조자요 주인이시다(9-14). 이제 그 분께서 무슨 일을 하셨다고 하는가?

    다윗과 언약을 세우시고, 언약을 어긴 백성에게 징계하셨다(19-45).

15. 시인의 현 상황은 징계를 당하고 있는 중이다. 하나님께서 노를 그치시고 우리를 구원해달라고 해야 정상인데 그런 간구를 하기 전에 무슨 말을 하는가?

    하나님을 기뻐한다고 고백함(15-16): 현실의 징계보다는 최종적인 구원을 확신하고 있는 셈이다. 징계를 당하는 가운데서도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기뻐하고 있는 상태다.

16. 이스라엘의 힘이 영광스럽고, 뿔이 높아질 것이란다(17).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왕이 여호와께 속하였기 때문이다(18): 잘 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소속이 어디냐가 중요한 것이다. 비록 지금은 어려움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인자와 진리로 대하실 것을 믿기 때문에 오히려 기뻐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17. 19절에서 인용하기 시작한 말씀은 어디서 끝이 나는가?

    37절: 앞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먼저 찬양하고 이제 그 분이 성도들에게 어떤 약속을 하셨는지 회상한다.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것을 확신하면서! 그 약속이 바로 다윗 언약이다.

18. 소위 다윗 언약은 누가 누구와 체결하셨다고 하는가?

    주께서 성도들에게(19): 실제로는 나단이 전해준 말씀이다(삼하 7:1-17).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환상이란다. 다윗에게 주신 말씀이지만 다윗만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성도들을 위한 말씀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단을 통해서 전한 말씀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19. 19-20절의 내용은 누구를 통해서 이루어진 일인가?

    사무엘: 다윗 언약은 나단을 통해서 주어진 것이지만 다윗을 왕으로 세우는 일은 사무엘의 몫이었다(삼상 16:1-13).

20. 기름을 부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왕으로 세웠다: 거룩하게 구별한다는 의미다(출 30:25-30). 사람의 경우에는 왕과 선지자, 제사장을 세울 때 기름을 부었다.

21. 다윗을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우신 것은 하나님께서 대리인을 세우신 셈이다. 그러면 다윗이(19-37) 어떻게 하나님을(5-18) 닮았는지 찾아보자.

    강한 손과 팔(21-23 ↔ 13), 높아진 뿔(24 ↔ 16-17), 해상 장악력(25 ↔ 9-10), 최고 통치자(27 ↔ 5-8): 이런 약속은 다윗과 솔로몬을 통해서 완벽하게 실현되었다. 문제는 솔로몬의 말년부터 그 이후의 왕들이 이런 은혜를 이어가지 못한 것이다. 은혜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받은 은혜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은 더 중요하다.

22. 동일한 하나님이시지만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모습을 보이시지는 않는다. 대적을 박멸하시는 하나님께서(23) 자기 백성들을 대하시는 모습은 어떠한가?

    성실과 인자함: 왜 이렇게 차별하느냐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아주 쉬운 방법을 알려주셨다. 믿기만 하면 된다는데 믿지 않고 대적하면서 ‘왜 차별하느냐?’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모든 사람에게 차별없이 무조건 은혜를 베푸시지는 않는다. 인간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마지막 자존심 아닐까?

23. 이스라엘은 해양국가가 아니다. 솔로몬 시절에 해상무역을 활발하게 한 적이 있으나 일시적이었을 뿐이다. 그러면 강과 바다를 정복할 것이라는 말은(25) 무슨 의미일까?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 외의 지역, 즉 모든 세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다윗 언약의 최종 목표는 정치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나라 건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강과 바다도 통치 영역의 일부로 보는 것이 당연하다.

24. 하나님을 아버지라고(26) 부른 이가 누구인가?

    예수님: 다윗과 언약을 세우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예수님 이전에는 누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다. 아버지라고 생각은 했지만 부르지는 않았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가깝게 해주셨다. 그럼에도 지금도 하나님과 친밀하게 느끼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인다.

25.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은 언약은 영원할 것이라고 하셨다(28-29). 그런데 다윗의 자손이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징계는 하겠지만(32) 취소는 하지 않는다(33-37): 일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시작하신 이가 끝을 내야지(빌 1:8).

26.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다. 이와 비슷한 것이 본문에 무엇이 있는가?

    해(36), 달(37), (궁창, 37): 해와 달은 영원불변한 것으로 여겨졌다(72:5). 해와 달이 어두워지고(마 24:29, 막 13:24, 행 2:20) 하늘이 풀리는 것이 세상의 종말이다(벧후 3:10, 계 6:14).

27. 19-37절과 38-45절을 간략하게 비교해보자.

    언약과 징계(=기대와 절망): 과거에 주신 다윗 언약이 얼마나 은혜로운 것이었는지 회상하지만 현재 겪고 있는 위기는 언약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는 호소다. 확실하게 지키실 것이라고 하신 언약이 완전히 파기될 것만 같은 위험을 느끼며(39) ‘정말 그럴 수 있습니까?’ 라고 항변하는 듯하다. 기대가 완전한 절망으로 바뀐 상태다.

28. 언약을 받은 이스라엘의 현실은 어떠한가?

    대적에게 점령당하여 왕이 폐위된 상태: 전쟁에서 졌고(43), 왕은 왕좌에서 쫓겨났고(38-39, 44), 백성들은 탈취를 당했다(41).

29. ‘그의 젊은 날들’이란(45) 이스라엘 나라를 가리킬까, 아니면 어떤 왕을 가리킬까?

    분명하지 않다: 양쪽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다. 전자로 본다면 나라가 너무 일찍 멸망당했다는 의미가 되고(바벨론에 의한 멸망) 후자라면 통치 기간이 짧았던 왕들에게(르호보암, 여호야김, 여호야긴 등) 일어난 일로 볼 수도 있다.

30. 38-45절과 46-52절을 비교하면 어떤 반전이 있는가?

    절망과 희망: 하나님께서 언약을 파기하신 것이 아닌가 싶은 절망 속에서도 그럴 리가 없다고 믿고 다시 하나님께 호소한다. 절망이라고 해도 완전한 절망은 물론 아니었겠지만!

31.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 무엇일까?

    하나님의 부재(46):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듯한 상황이 분노하신 것보다 더 큰 고통이다. 무관심이 분노보다 더 먼 관계인 것처럼!

32.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을 자가 없다(48). 산다고 해도 너무나 짧아서 허무하기 이를 데 없다(47). 인생의 허무함을 이렇게 강조하는 이유가 뭘까?

    가뜩이나 짧은 인생인데 이런 고난 가운데 있을 시간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잘못했다고 엎드리지는 않고 이럴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 이건 순 어거지인데 간 크대이!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가 없이는 이럴 수가 없다. 주의 성실하심과 인자하심을(49) 여전히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다.

33. 절망적인 위기 상황에서 시인이 최종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기억(50): 하나님께서 원수들의 비방을 반드시 기억하시고 갚으실 것이라는 확신이다. 그래서 찬송으로 매듭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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