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88편 |
일반적으로 여호와는 언약과, 하나님(엘로힘)은 능력과 관련된다. 언약을 지키시는 분은 사적인 관계에 가깝고, 능력을 지닌 분으로 묘사할 때는 공적인 측면이 강하다. 이런 저런 모든 관계를 다 동원해서 구원해주시기를 간구하는 셈이다. 2. 하나님을 부를 때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과 ‘내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에 차이가 있을까? 이전에 개인적인 구원의 체험이 있었음을 전제로 기도하는 것이다. 지난날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다시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이다. 3. 시인이 간구하는 단 한 가지 소원이 무엇인가? 기도를 들어만 달라는 것(2): 구체적인 아무런 소원이 없다. 내 기도를 들으시기만 하면 그 다음이야 알아서 하실 것이다. 4. 거의 죽기 직전이다(3-5). 누가 시인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주께서(6-7): 이건 원망 아닌가? 근본원인은 ‘주의 노’ 때문이다. 파도도 ‘노’를 상징한다(욘 2:3). 주께서 왜 노하셨는가? 당연히 자신의 죄 때문이라는(32:3-5) 전제가 깔려 있다. 단순한 원망이 아니라 회개의 의미가 포함된 것이다. 5. 시인의 입장에서 죽음이 슬픈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는 것(5): 더 이상 하나님께로부터 아무 것도 바랄 수 없는 지경에 빠진다는 것이 시인에게는 가장 큰 고통이다. 동시에 사람들과 관계가 소원해지는 것이다(4, 8). 6. 주의 노가 심히 누르신다는 것은 질병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8절에 보면 사람들이 떠날 뿐만 아니라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단다. 무슨 병에 걸렸는가? 아마도 문둥병(한센병)? 요즈음 암에 걸렸다고 판정을 받은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이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드리는 기도다. 하나님이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7. 절망적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매일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두 손을 드는 것(9): 다른 방법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인생이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일이 한 둘이 아니다. 일찌감치 인정하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이 복이다. 이 시편이 마스길(지혜시)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다(잠 1:7, 9:10). 8.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래서 죽은 사람을 대상으로 재판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도 죽은 자에게는 방법이 없는 걸까(10-12)?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에도 그러했던 모양이다(욥 14:10, 전 9:10, 시 115:7). 죽은 자에게는 기이한 일을 보여줘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10-12). 찬송할 수도, 선포할 수도, 알 수도 없다. 실제로는 성도의 죽음은 그렇지 않다. 한 편 강도에게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셨다(눅 23:43).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었다(눅 16:23). 9. 시인이 지금 꼭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찬송하려고(선포도 포함해서): ‘죽은 뒤에는 하나님께서 기이한 일을 보여주셔도 찬송할 수 없지 않습니까?’라고 간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찬송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말한다. 이게 끊어지는 것이 가장 슬픈 일이다. 10. 기도가 왜 아침에 주님께 이르지(13)? 밤새 기도를 한 모양이다: 이렇게 고통스러우면 잠인들 오겠는가? 밤을 새우며 기도하면서 날이 새기 전에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11. 아침에 기도가 응답되기를 기다리던(13) 시인은 갑자기 절망적인 말을 내뱉는다(14-18). 왜 그럴까? 응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나의 영혼을 버리실 뿐 아니라 외면하는 상황은 정말 당혹스럽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그럴 수 있음을 보여주시는가? 이런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시험하시는 건가? 탄식을 할망정 하나님을 부인하지도, 포기하지도 않는다. 12. 16-17절이 연상시키는 두 종류의 장면은 어떤 것인가? 불이 뿜어져 나오는 장면과 홍수에 휘말린 장면: 진노라고 번역된 말은 본래 ‘불붙는 것’을 의미한다. 흔히 하나님의 진노는 맹렬한 불이 덮쳐오는 것으로 묘사된다(출 15:7, 레 10:6, 시 21:9). 에우며 둘러싼 물이란 홍수를 의미한다. 시인은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13. 시인이 당면한 인간적인 어려움이 무엇인가? 사랑하는 사람을 다 잃어버린 것: 사랑하는 자, 친구, 아는 자를 다 잃어버렸다. 얼마나 외롭고 고통스러웠을까? 이런 일이 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면? 그래도 하나님께 기도할까? 14. 절망적인 외침으로 끝나는 것은 성경답지 않아 보이는데? 이런 절망적인 상황도 주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고백이다(14-18). 나의 모든 문제가 잘 해결되는 것만이 결론일 수는 없다. 나의 기대와 전혀 다른 하나님이 뜻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바른 신앙이다. 매를 맞아야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응답되지 않은 답답함을 토로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