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86편


1. 이 시편은 어려움에 처한 자신을 구해달라는 간구와 자신을 구원해주실 그 분에 대한 신앙고백이 핵심이다. 간구와 신앙고백으로 구분해보자.

    간구 = 1-7, 14-17, 신앙고백 = 8-13: 간구하는 가운데 신앙고백을 끼워놓은 셈이다. 얼핏 보면 그다지 위대한 고백 같지 않다. 평범한 우리네 기도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정말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하면 막무가내로 살려달라고 하는 수밖에 없다. 멋 부릴 여유가 없는 게 정상 아닐까?

2. 다윗이 가난하고 궁핍했다고? 언제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대충 짐작할 수 있는 표현이 있다면 무엇인가?

    환난 날에(7, 14): 사울에게 쫓기던 때일 수도 있고, 압살롬에게 쫓기던 때일 수도 있다.

3.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와주셔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가난하고 궁핍할 뿐만 아니라(1) 경건하기 때문이다(2): 어려운 형편에 처하자 막무가내로 알지도 못하는 하나님께 매달리는 사람도 많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당연히 자신을 도우실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 자신의 경건함(충성, 헌신), 즉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절의 ‘의지’, 4절의 ‘우러러보오니’, 5절의 ‘선하사’ 등도 같은 의미다. 자신의 공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4. ‘주’라는 표현이 몇 번이나 나오는가? 그 중에서 호격만 몇 번인가?

    주 = 31번, 호격 = 7번(=아도나이, 3, 4, 5, 8, 9, 12, 15): 그야말로 ‘주님, 주님’하고 매달린 셈이다. 영역본이 you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전부 ‘주’라고 번역함으로 24번이나 더 추가된 셈이다. 그 외에도 호격으로 ‘여호와’ 4번(1, 6, 11, 17), ‘엘로힘’이 3번 쓰였다(2, 12, 14).

5. 3절의 ‘종일’을 공동번역은 ‘매일같이’, 우리말 성경은 ‘날마다’로 번역했다. 내용상 어느 것이 맞을까?

    둘 다: 원문 자체가 두 가지 의미를 다 지니고 있다. 그러니까 다윗은 매일 종일토록 부르짖은 것이다. 이런 기도를 하루만 했을까? 시간 내서 잠간만 했을까?

6. 내가 가난하고 궁핍하다는 것이(1) 하나님께 간구해야 하는 이유가 될 수 있을까? 내 형편이나 내 열심보다는 그 분과의 관계가(2) 우선이다. 또 다른 근거가 있다면 무엇일까?

    그 분의 성품(5): 선하시고, 용서하기를 즐거워하시며, 인자하심이 후하시기 때문이다. 그런 분이 아니라면 내가 아무리 간구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7. 열심히 부르짖었으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확신을 가지고 기다린다: 명령형으로 계속된 기도가(1-6) 마무리 단계에서 ‘응답하시리이다’로 바뀐 것에(7) 주목해야 한다.

8. 열심히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은 더 중요하다. 다윗이 기도하는 대상인 그 분은 어떤 분이신가?

    신 중의 신(8), 혹은 주만이 하나님(10): 영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유일하신 분이시다(11)!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아는 자만이 바르게 기도할 수 있다.

9. 세상에는 많은 신들이 있다. 하나님이 이런 신들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행함: 하나님처럼 행하는 신은 없다(8, 10). 다윗이 어려운 지경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무슨 일을 행하셨는가? 지난날의 경험으로(신 4:34, 삼상 17:34-36) 그렇게 행하실 것을 확신하고 있을 뿐이다. 오늘날 기독교가 힘을 잃어버린 것은 바로 이런 체험이 없는 것이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들은 바 과거의 체험은 다 남의 일이고 스스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하지 못하는 탓이다. 말씀대로 살면서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 꼭 필요한 것이다.

10. 주의 도를 가르쳐 달라는 것은(11) 여태 몰랐다는 말인가? 주의 도를 모르면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고 하는 것(8-10)은 헛말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깨우쳐 달라는 의미다: 다윗이 주의 율법과 규례를 모를 리가 없다. 다만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를 가르쳐 달라는 것이다.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적용의 문제인데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을 따라 행하겠다는 것이다.

11. 이제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을 깊은 스올에서 건지셨으니(13) 영원토록 주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12) 한다. 14-17절을 보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 같은데?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해결을 확신하는 것이다. 지난날의 경험을 통해서 앞날에 대한 구원을 확신하는 것이다.

12.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면서도(13) 현실의 대적을 무시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서 자신을 반드시 구원하셔야 하는 이유가 또 무엇인가?

    이들이 하나님을 무시하기 때문이다(14): ‘자기 앞에 주를 두지 않았다’는 것은 ‘주님을 안중에 두지도 않았다’는 말이다. 주님을 무시하는 이들이 주님만을 섬기려는 나를 대적합니다. 아주 효과적인 고자질(?) 아닐까?

13. 하나님께서 아무리 긍휼, 은혜, 인내, 인자, 진실이 풍성하시다고 해도(15) 아무런 소용이 없는 자는 누구인가?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14) = 나를 미워하는 자(17): 하나님의 이런 좋은 성품은 자기 백성에게 향한 것이다. 편협하다고? 누구나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놓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없다.

14. ‘주의 종’과 ‘주의 여종의 아들’은 어떻게 다를까?

    주의 여종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종이라는 것을 더 강조하는 것이다: 종이란 점에서는 마찬가지지만 태생적으로 종이라는 것이다. 돈을 주고 시민권을 산 사람과 날 때부터 시민권을 가진 사람의 차이라고 할까? 실제적으로 차이는 없겠지만 그래도 날 때부터 시민이라고 하는 것이 더 당당한 모양이다(행 22:28).

15.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어느 정도의 은총을 달라고 하는가?

    대적자들이 부끄러워할 정도로(17): 하나님을 무시하던 자들이 다윗이 받은 하나님의 은총을 보고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확실하게 베풀어 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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