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84편 |
몸이 쇠하도록(2): 아마 성전을 그리워하되 갈 수 없는 상황이었던 모양이다(가령, 압살롬의 반역으로 쫓겨났을 때처럼). 2. 성전을 왜 ‘장막’이라고 했다가 ‘궁정’이라고 했다가 ‘집’이라고 할까? 장막이란 이 시가 아직 성전이 지어지기 전, 그러니까 다윗 시대에 지어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하는 표현이다. 조립식 텐트로 만들어진지 벌써 500년이나 된 장막이다. 그 장막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비록 장막일지라도 궁정이요, 집이다. 3. 시인은 성전에 올라갈 수 없는 상황에서 성전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예를 찾아보자. 몸이 쇠약하도록 성전을 그리워하는 것(2, 7), 성전에 거하는 자를 부러워하는 것(4, 10), 시온의 대로가 마음에 있는 것(5), 눈물 골짜기를 지나는 것(6). 4. ‘만군의 여호와’란 표현과 ‘사랑스럽다’는 표현(1)은 그다지 잘 어울리지 않는다. 왜 그런가? 만군의 여호와란 표현은 위엄에 가득 찬 경외의 대상이고, 사랑스럽다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관계에서 느끼는 느낌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이 두 가지 요소(경외와 즐거워함)가 존재한다. 5.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는 영혼과, 하나님께 부르짖는 마음과 몸(2)은 어떤 관계일까? 동일한 것이다: 영혼이라고 번역된 ‘네페쉬’는 전인격적인(마음과 뜻과 정성과 목숨까지) 의미이다. 이것을 부연 설명하는 것이 마음과 몸이다. 6. 주의 제단에 참새와 제비가 보금자리를 틀면 어떡해? 쫓아내야 하지 않을까? 참새와 제비조차 부럽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전에 나아가지 못한다면 참새나 제비보다 더 불쌍하다는 고백이다. 7. 주님께 복을 받은 자가 복이 있는 것 아닌가? 어떻게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는가? 주님과의 관계가 일차적인 복이다. 주님께 받는 복은 이차적인 것이다: 주의 집에 거한다는 것은 주님과 교제하고 예배하는 것, 즉 올바른 관계에 있는 것이다. 관계가 우선이다. (찬송가 438)내 주 예수 계신 곳이 그 어디나 천국이니... 이차적인 복에 먼저 관심을 갖는 것은 어린아이들의 짓이다. 8. 주의 집에 거하는 자 외에도 복이 있는 자가 누구인가? 주의 집을 사모하는 자(5):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다는 것은 시온으로 갈 수 있는 길이 마음에만 있다는 얘기다. 무슨 이유인지 지금은 마음 뿐이지만 그 곳을 사모하며 힘을 얻는 자도 동일하게 복이 있다. 고난의 길을 통과한 후에(6) 시온에 나아갈 수 있을 것을 소망하는 자들이다(7). 9. 눈물 골짜기와 많은 샘은 무슨 공통점이 있을까? 없다, 상대적인 개념이다: 여기서 눈물과 샘은 동일한 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성도의 고난을 비유하는 눈물 골짜기는 물이 없는 척박한 곳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면 많은 물이 흘러넘치게 될 것이라는 고백이다.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를 영역본들은 대체로 ‘the autumn rains also cover it with pools’로 옮겼다. 은택과 pool로 옮긴 단어의 자음이 동일하기 때문에 양쪽으로 읽을 수 있어서다. 어느 쪽으로 읽든지 결과적으로 동일하다. 이런 것이 시의 묘미다. 10. 하나님을 굳이 만군의 하나님(1, 3, 8), 방패라고(9, 11) 부르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능력이 필요한 상황, 즉 대적에게 쫓겨 주의 집에 나아갈 수 없는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그래서 더 간절하게 기도를 드린다(8-9). 예배드릴 곳이 없어서 방황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이 심정을 조금이라도 알지 않을까? 11. 기도의 핵심 내용은 주의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보시라는 것이다. 기름 부으신 자는 누굴까? 왕일 가능성이 크다. 아마 압살롬에게 쫓겨나간 다윗의 경우가 가장 적합해 보인다. 왕이 회복되어야 시인도 함께 회복되어 성전에 나아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12. 1대 1000이라면 비교대상이 될 수 없는 큰 차이다. 단 하루만이라도 주의 궁정에서 지내는 것이 평생소원이라는 식이다. 그 다음 표현도 아마 같은 의미일텐데, 문지기는 무엇과 비교대상인가? 장막에서 편히 쉬는 주인: 문지기는 밖에서 고생을 해야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궁정이라면 장막 안에서 편안하게 쉬는 주인 노릇보다 낫다는 것이다. 사랑의 수고가 얼마나 단지 아는 사람의 고백이다(참고, 잠 17:1). 천국에서 왕노릇 하거나 기와집에서 떵떵거리며 사는 꿈을 가진 성도가 많더라! 슬픈 일이다. 13. 하나님을 왜 해에 비유하였을까? 그런 예가 성경에 별로 없는 것 같은데? 해가 어두움을 물리치고 세상을 밝게 비추듯 은혜와 영화, 좋은 것을 풍성하게 주시는 분이기에: 실제로 하나님을 해라고 표현한 것은 여기 밖에 없다. 간접적으로 비유한 곳은 많이 있다(삼상 23:4, 말 4:2, 사 9:2, 60:1-3, 호 6:3). 14. 이 시편의 처음과 끝을 비교하면 어떤가? 만군의 여호와라는 동일한 호칭으로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 이런 방식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을 강조하는 수사학 기법을 수미상관법(首尾相關法, inclusio)이라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