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80편


1. ‘소산님에둣’이라는 말이 ‘증거의 백합들’이란 뜻이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같은 유형의 노래가 45, 69, 80편인데 길이가 비슷한 점을 염두에 두고 추정을 해보자. 참고로, 80편은 19절, 45편은 17절, 69편은 36절(18×2)이다.

    아마 길이가 비슷한 어떤 곡조였을 것: 개사해서 부르는 것처럼 소사님에둣이라는 곡조에 이 가사를 넣어서 불렀던 모양이다. 올드 랭 사인 곡조를 애국가로도 부르고, 찬송가로도 부른 것처럼!

2.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구원을 호소하는 걸까?

    이스라엘(=요셉, 1)의 멸망(12, 16): 명확하지는 않으나 70인역 표제에 ‘앗수르에 관한 시’라는 말이 있는 걸로 보아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목격하고 쓴 것으로 추정한다.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키는 야곱대신 굳이 요셉을 언급한 것도 그렇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북이스라엘 소속이지만 베냐민은 유다에 속했다. 다만, 벧엘, 길갈, 여리고 등이 베냐민의 성읍이지만 북 이스라엘에 속해 있었던 점과 세 지파가 다 요셉의 후손이라는 점을 감안해보면 북이스라엘을 가리킨다는 추정이 가능해보인다.

3. 이스라엘과 하나님은 어떤 관계인가?

    양과 목자(1), 포도나무와 농부(8-9): 그런데 이 목자가 양떼를 버렸다. 포도원의 담장을 헐어버렸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4. 목자와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분은 어떤 면에서 동일하신가?

    이스라엘의 인도자: 출애굽 때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백성을 인도하셨고 언약궤를 만든 후에는 언약궤가 백성을 인도했다(민 10:33, 수 3:14). 언약궤의 뚜껑 부분이 바로 ‘그룹 사이’다.

5. 3절은 일종의 후렴구처럼 쓰였다. 어디에 있는가 찾아보자.

    3, 7, 19: ‘돌이키시고’(3, 19), ‘회복하여 주시고’라고 번역한 원문은 같은 말이다. 그냥 ‘회복시키시고’ 라고 하지 ‘돌이키시고’라고 번역한 이유는 원문 자체가 회개(죄에서 돌아섬)와 구원(심판에서 돌아섬)이라는 이중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6. 주님께서 얼굴빛을 자신들에게 비추면 어떻게 되는가?

    구원을 얻는다: 얼굴을 돌려버리는 것은 관계가 단절되는 것이다. 반대로, 얼굴을 향한다는 것은 관계의 회복이며 사랑과 관심의 표명이다. 당연히 은혜와 구원으로 이어진다(민 6:25).

7. 고대의 전쟁은 신들의 전쟁이었다. 전쟁에 패하는 것은 자기들의 신이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고 믿었다. 이스라엘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나님이 약해서 진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죄 때문에 진노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4). 앗수르 신이 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노하셨기 때문에 전쟁에서 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회복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여전히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다. 노를 그치시기만 하면 모든 것이 회복된다.

8. 눈물이 양식이며, 눈물이 음료다(5). 어느 때 무엇과 대비되는가?

    출애굽 때 주신 만나와 메추라기, 반석에서 난 물: 은혜의 시절에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주신 양식과 물이었는데 이제는 눈물뿐이다. 그것도 아주 많이! 원문상으로는 세 배의 눈물이다.

9. 원수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된 것이 창피하다는 말인가? 지금 자기들의 창피함을 호소할 형편인가?

    회개의 다른 표현이다: 이스라엘이 불순종하면 원수들에게 이런 비웃음을 당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신 28:37)이 실현된 것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경고하신대로 되었으니(6) 이제 우리를 돌이키시고 구원해달라는 것이다(7).

10. 하나님께서 포도나무를 심으셨는데 어느 정도로 크게 자랐는가?

    최고 번성기 때의 전국토를 덮을 정도로: 엄청난 과장법을 쓰고 있기는 하지만 9-11절을 요약하면 그런 셈이다. 바다는 지중해를, 강은 유브라데 강을 의미할 수 있다(창 15:18, 왕상 4:21). 산이 남부 산악지대를 가리킨다면 백향목은 레바논 지역을 염두에 두었을 수도 있다. 나라가 완전히 망해버린 이 시점에서 가장 번성하던 때를 회상하며 애통해 하는 셈이다. 이렇게 번성했던 나라가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됐는가!

11. 이스라엘을 양떼나 포도나무로 본 것은 좋은데 문제는 왜 목자가 양떼를 버렸는지, 혹은 농부가 포도원의 담장을 헐었는가?

    잘못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자기반성이 부족하다. 하나님에게서 나온 이유는 16절의 ‘면책’이다(안색의 꾸짖음). 분노한 얼굴로 꾸짖으시기 때문이라는 의미다. 面責이란 한자는 대면해서 책망하는 것이다.

12. 멧돼지가 포도나무를 상하게 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율법적으로 생각해보자.

    정결한 포도를 부정한 짐승이 먹는 것: 멧돼지도 돼지다. 들짐승도 부정하지만 멧돼지는 더욱 부정한 짐승이다.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엄격하게 구별하던 사람들에게는 정말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돼지가 보물을 삼키는 격이다(마 7:6).

13. 조그만 일에도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고, 잡혀가는 판에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만군의 하나님’이라고(4, 7, 14) 부를 수가 있을까?

    일이 이렇게 된 원인을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이 모든 것을 회복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라는 믿음을 고백하는 셈이다. 원망하지 않고 능력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 모든 일의 책임이 자신들에게 있음을 인정하는 셈이다.

14. 회복을 요청하는 14절에서 하나님께서 하셔야 하는 일은 우리말로는 3가지지만 원문으로는 4가지다. 영역본을 참조해서 동사만 다시 번역해보자.

    돌아오소서, 굽어보옵소서, 살펴보옵소서, 돌보소서: 실제로 시인은 아주 다급하게 외치고 있는 셈인데 우리말 번역은 조금 밋밋한 셈이다.

15. 이 포도나무를 소생시켜야 할 이유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주의 것이기 때문에(15): 아무리 징계를 당하고 있다고 해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의 것이라는 확신이다. 이 구절에서 줄기와 가지는 대구를 이룬다. 참고로 ‘가지’로 번역된 단어(벤)는 본래 ‘아들’을 의미하는 단어다. 가지라고 말하면서 은근히 아들이라고 하는 셈이다.

16. 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 인자는 누구를 가리킬까? 신약에서 이런 표현이 나오면 예수님인데?

    주께서 세우신 자라는 의미로 보면 왕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왕의 회복이 곧 이스라엘의 회복이니까!

17. 회복시켜달라고 하면서 내건 보답이 겨우 ‘물러가지 않는 것’과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18). 좀 약하지 않은가?

    다시는 배반 않고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서원인 셈이다. 좀 더 강렬한 약속이라면 좋겠지만 사실은 이보다 더 소중한 약속은 없다. 헛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 눈에는 좀 약해보이는 표현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정도면 만족하실 것이다. 더 바래봤자 감당할 능력이 없으니까! 야곱의 서원(창 28:22)이 부끄러운 것과 비교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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