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79편


1. 하나님의 나라가 이방인들에게 완전히 무너지는 것을 목격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일반적으로 무슨 생각이 가장 먼저 들까?

    어떻게 이럴 수가? 기가 막히고 억장이 무너졌을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느끼지 않을까? 하나님의 나라라고 믿었던 로마가 야만족에게 무너지는 것을 목격한 당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어거스틴이 쓴 책이 ‘하나님의 도성’이다.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의 것이 아님을 설명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반면에 예루살렘의 패망을 바라보는 시인은 철저하게 무너졌음에도 이것이 끝이 아님을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다(9-13).

2.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서 망했다. 그런데 왜 이방 나라들이라고 하는가?

    바벨론이 많은 이방 나라들의 연합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큰 나라는 대체로 그렇다.

3. 이방인들이 성전을 더럽힌 것이 어떻게 기가 막히는 일인가?

    유대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거룩하게 여기던 것을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았던 이방인들이 함부로 다루고, 부수고...: 이방인이나 부정한 자는 말할 것도 없고 유대인들이라도 함부로 들어가지 못했던 성전이다. 그런데 이 놈들이...?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라고 하지는 않는다.

4. 안타깝지만 예루살렘이 돌무더기가 될 것(렘 9:11, 26:18)과 조롱거리가 될 것(렘 24:9)은 이미 예언되었던 일이다. 그것이 어떻게 위로가 되는가?

    하나님께서 징계를 선포하실 때에는 반드시 회복도 말씀하셨다(렘 24:5-7). 그래서 절망적이지 않다.

5. 가장 큰 비극은 성전이 더럽힘을 당한 것이다. 그 다음 비극은 무엇인가?

    죽은 사람을 매장하지 못한 것: 죽을 때 죽더라도 장례를 제대로 치름으로 위로를 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장례마저 제대로 치르지 못한 채 짐승의 밥이 됐다는 것은 엄청난 저주를 받은 것이다. 주의 종, 주의 성도들(2)이 이런 비극을 당하다니!

6. 모든 것이 끝나버린 것 같은 상황인데도 시인은 끝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은근히 회복의 때가 있음을 전제로 말하는 부분이 어디인가?

    어느 때까지, 영원히, 주의 질투(5), 우리를 속히 영접하소서(8), 우리 죄를 사하소서(9), 보존하소서(11),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13):

7. 이스라엘을 가리켜 왜 야곱이라고 할까(7)? 조상은 아브라함이라고 하면서?

    12지파의 조상이 야곱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민족이라는 느낌일 때는 아브라함이 등장하고 12지파의 공동체라는 점을 강조할 때는 야곱이 등장하는 것 같다.

8.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기댈 곳은 하나님 뿐이시다. 그 분의 어떤 성품 덕분인가?

    긍휼(8): 긍휼의 원어는 ‘태아를 품는 자궁’이란 의미다. 하나님의 공의는 두렵기만 하다. 그러나 시인은 그런 하나님에게서 태아를 품은 어머니의 따뜻함을 느끼는 것이다.

9. 이스라엘이 이런 고초를 겪는 것은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을 구원해야 할 무슨 이유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인가?

    주의 이름(영광)을 위하여(9): 자기들이 이렇게 수치를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수치라는 것이다. 진작 그런 사실을 알고 실천했더라면 이런 비극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 꼭 일을 당해야 이런 깨달음을 얻는 것이 우리 인생인가?

10. 하나님께서 이방나라들을 치셔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을 비방하는 것(10, 12):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셔야 할 이유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복수를 해달라는 것(10)도 포함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영예를 회복하는 것(13)이란다.

11. 누가 죽이기로 정했을까(11)?

    갇힌 자를 그대로 버려두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즉 ‘갇힌 자’와 ‘죽이기로 정해진 자’는 동의적 대구다(표현은 달라도 같은 내용의 반복). 바벨론으로 잡혀간 포로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12. 배상의 원리는 ‘그대로’ 아닌가(레 24:19-20)? 4배라면 몰라도(삼하 12:6) 7배는 너무 심한 것 아닌가?

    칠 배로 갚는다는 것은 산술적인 의미가 아니라 완전한 복수를 의미하는 것이다(참고, 창 4:15, 레 26:18-28).

13.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끝이 아닌 것은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인식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시인은 자신을 포함한 이스라엘을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주의 기업(1), 주의 종(2, 10), 주의 성도(2), 주의 백성, 주의 양(13): 끝내 하나님께서 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소유라는 인식이 절망 중의 절망 가운데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하는 것이다. 현실은 참으로 절망적이지만 시인은 이스라엘의 온전한 회복을 내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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