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78편


1. 이스라엘의 지난 역사를 길게 언급하는 것이 결국은 누구에게 초점을 맞추는가?

    다윗: 그러면 이스라엘판 용비어천가인가? 이 모든 일을 ‘주께서’ 하셨다(65)는 점에서 다르다. 다윗 왕을 통해서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4)를 노래하는 것이다.

2. 아삽은 성가대장이면서 감히 백성을 향해서 내 백성이라고? 잘 하면 반역 아닌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한다는 의미다.

3. 들어서 알고 있는 것, 조상들이 전해준 것(3)을 왜 비유, 비밀이라고 하는가?

    들어서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도 깨닫지 못하는 교훈이 있기 때문이다: 같은 성경을 읽어도 이해하는 바가 천양지차인 경우가 더러 있더라. 요한도 듣고 보고 만진 것에 대해서 추가로 설명했다(요일 1:1-2).

4. 시인이 조상들에게 들은 것을 통해서 드러내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4): 행하신 일보다 영예와 능력이 먼저 나온 것에 주목하자. 단순하게 일어났던 일을 알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게 하는 것이 목적이어야 한다.

5. 조상들이 전해준 여호와의 기이한 사적과 그 분의 능력을 아는 것보다 어쩌면 더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후대에 전하는 것: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듭거듭 명령한 일이다(5-8, 신 6:7, 11:19).

6. 하나님의 법도를 자손에게 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게 하려고(7): 단순하게 지식을 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모든 것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을 만드신 하나님의 의도이기 때문이다.

7. 시인이 전하려고 하는 내용을 두 가지로 요약하면 한 가지는 하나님의 법도다. 그러면 다른 한 가지는 뭘까?

    조상들의 불충(8):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했던 조상들의 본을 보지 말라는 것이다.

8. 이 시편의 대부분(9-64)은 에브라임 지파를 중심으로 이스라엘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왜 에브라임 지파가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인가?

    에브라임 지파가 일정 부분에서 장자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야곱의 장자는 족보상으로는 르우벤이지만, 명분상으로는 요셉인데(대상 5:1-2, 두 몫을 받음 =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독립된 지파가 됨) 요셉의 장자는 에브라임이다. 야곱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번성하는 데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이 요셉이니까 에브라임이 큰 소리를 칠만도 하다. 그래서 사사건건 시비를 걸기도 했다(삿 8:1, 12:1, 왕상 12:2-3) 나라가 쪼개졌을 때 북 이스라엘의 주도세력도 에브라임 지파이었다(왕상 12:25-30).

9.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능력이 없어도 싸우기만 하면 이기게 해주셨다. 그런데 에브라임의 문제는 무엇인가?

    하나님을 잊었다: 준비를 다 갖추고도 제대로 싸우지 않았다는 것(9)도 전쟁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싸울 때 싸워야 했는데 에브라임이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주로 사사시대). 이길 수 있는 적을 두려워해서 싸우지 않았던 이스라엘의 불충함을 지적하는 말이다.

10. 에브라임이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일이 무엇인가?

    출애굽의 하나님(12-17): 출애굽과 광야의 일을 잊었기에 사사시대의 불행(9-11)이 발생한 것이다.

11. 바다를 갈라 길을 내고 구름과 불빛으로 더위와 추위를 막아주고 반석을 쪼개어 물을 공급해도 감사하기보다는 원망이 끊이지 않는 근본 원인은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본문이 말하는 두 가지를 찾아보자.

    탐욕(18, 30)과 불신(22): 탐욕대로 음식을 구하여 그들의 심중에 하나님을 시험하였다는 것은 일종의 불신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일도 할 수 있을까 했다는 것이다. 날마다 놀라운 이적을 보면서도 또 다른 이적을 보려고 시험하는 일이 도대체 가능한 일일까? 엉뚱한 욕심이 사람을 이렇게 만든다. 만족할 줄 모르는 것이 인간이다.

12. 재미삼아 21절(특히 개역)을 영역본과 비교해보자. 무슨 차이가 있는가?

    세 번이나 ‘(진)노’라고 번역된 말(개역)이 영역본에서는 다 다르다(furious, fire, anger): 중요한 문제는 아니나 같은 단어를 연속해서 반복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솜씨가 아니다. 원문도 세 단어가 다 다르다. 개역개정은 그 중의 하나를 겨우 ‘진노’로 고쳤다. 표준새번역의 노력이 엿보인다, ‘주님께서 듣고 노하셔서, 야곱을 불길로 태우셨고,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셨다’.

13.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왜 배부르도록 양식을 주실까?

    혼을 내더라도 밥은 먹여가면서 혼을 내야지: 죽으라고 매질을 하는 게 아니란 말이다. 매 맞으면서도 먹어야하는 게 우리 인생이다. 우리가 이런 존재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신다.

14. 고기를 얼마나 주셨다고 하는가?

    먼지처럼 많이, 비 같이, 바다의 모래 같이, 그들의 원대로(27-29): 거처를 두를 정도(28)로 주셨다는 말은 ‘진 사방에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약 90cm) 정도’로 쌓였다(민 11:31)는 것이다. 심하다. 하나님께서 기뻐서 주신 것이 아니라 먹고 죽으라고 주신 것이다. 그냥 퍼부으신 것이다. 준다고 함부로 넙죽넙죽 받아먹을 일이 아니다.

15. 놀라운 이적을 날마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지 않을 수가 있을까?

    이적도 일상화되면 이적이 아니란다. 그렇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보지도 만지지도 못한 채 믿는 우리는 뭔가? 아마 그래서 예수님께서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요 20:29) 하셨나보다.

16. 날들을 헛되이, 햇수를 두려움으로 보냈다는 것(33)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광야에서 무의미하게 40년을 지낸 것: 굳이 의미를 찾는다면 불순종한 자들이 다 죽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었지만 가나안으로 가야하는 것과 비교하면 정말 무의미한 방랑이다.

17. 하나님께서 저들을 죽이시려고 할 때 이스라엘은 어떻게 했는가(= 34-37절의 요약)?

    일시적으로 회개(34-37): 하나님의 긍휼(38) 때문에 살아난 것이지 입에 발린 회개 때문에 산 것이 아니다(민 11:1-2, 21:7-9).

18.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용서하시는 또 다른 이유를 백성들에게서 찾는다면 무엇인가?

    너무 연약한 존재이기에(40): 그들이 육체(=고깃덩어리)며 지나가는 바람(39)일 뿐이다. 싸움도 너무 격차가 나면 싸움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분을 내시기에도 너무 보잘 것 없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잠이 조금만 모자라도, 음식이 조금만 모자라도, 심지어 숨만 못 쉬어도... 이런 인생을 사랑하셨다는 것이 감사할 뿐이다.

19.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하나님을 시험하고 반항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떤 결함 때문인가?

    기억력 부족(42): 닭이나 붕어가 머리가 나쁘다고 놀리는 우리 인생도 하나님께서 보시면 마찬가지다. 놀라운 이적을 보고 감격하던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잊을 수가 있을까? 이런 치명적인 결함을 보강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많은 기념물과 기념일을 제정하셨다. 그래도 안 되더라! 감격은 짧고 불만은 길다.

20. 광야에서 일어나 일들을 언급하다가 갑자기 애굽의 재앙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무엇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것과 비교하기 위함이다(52-53): 애굽에 행한 일과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은혜를 비교해보면 하나님을 거역하고 원망한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가!

21.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 중에 몇 개만 비교해보자. 피, 개구리, 이, 파리... 의 순서인데?

    순서가 똑같지는 않고 ‘이’ 재앙이 빠졌다(우리도 순서대로 암기하지 않아도 되겠다).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파리 → 쇠파리, 50절의 전염병)은 오히려 이 본문이 추가로 더 설명해주는 셈이다. 표현방식에 따라 재배치를 하거나 보강도 했다(강과 시내, 쇠파리와 개구리, 황충과 메뚜기, 우박과 서리, 우박과 번갯불, 노여움과 진노, 분노와 고난...).

22. 애굽에서 인도하여 양떼같이 지도하시고 그 다음에는 어떻게 했는가?

    거주할 땅을 주셨다(54-55): ‘성소의 영역’과 ‘오른손으로 만드신 산’은 동일하게 자신의 이름 두시려고 택한(신 12:11) ‘시온’을 가리킨다. 넓게 보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묘사된 가나안 전체를 가리킨다(55).

23. 광야에서 새던 바가지(40-42)는 가나안 땅에서도 샌다(56-58). 그래서 당한 심판이 무엇인가?

    실로의 파괴(60): 가나안 정착 이후 크고 작은 심판이 많이 있었지만 종합적으로 보면 실로의 파괴가 가장 결정적인 심판인 셈이다. 실로는 여호수아 때부터 사무엘이 등장하기 직전까지 회막과 언약궤가 놓여 있었고 따라서 이스라엘의 수도이었던 곳이다. 이곳이 블레셋에 의해서 폐허가 되고 언약궤는 빼앗긴다(삼상 4:5-11).

24. 하나님께서 대적에게 넘기신 ‘그의 능력(영광)’, 분을 내신 ‘그의 소유’, 불에 살라진 ‘그들의 청년’은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의 능력’은 블레셋에게 빼앗긴 언약궤를 가리킨다. 그래서 ‘그의 영광’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의 소유’는 그의 백성을 가리키고 ‘그들의 청년’은 블레셋과 싸우러간 군인들이다.

25. 제사장들이 죽임을 당하고 과부들은 너무 슬퍼 애곡도 못한 실례가 무엇인가?

    엘리 제사장의 죽음과 며느리의 해산(삼상 4:19-22): 엘리 제사장은 목이 부러져 죽고, 그의 아들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전쟁터에서 죽고, 비느하스의 아내는 해산의 고통에 남편과 시부의 죽음과 언약궤를 빼앗긴 소식을 들으며 죽어갔다. 이런 판국에 눈물은 사치다.

26. 이스라엘의 고난이 하나님의 주무심 때문인가(65)? 포도주를 마시고 고함치는 용사는 또 뭔가?

    자는 사람과 잠에서 깬 자의 차이처럼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주무시거나 졸지도 않으신다(시 121:4, 사 40:28). 전쟁터에서 포도주는 사기진작용 음료수다.

27. 사사시대의 고난 뒤에 이제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가 열린다. 하나님은 누구를 통해서 위대한 일을 이루시는가?

    다윗: 그 과정에 사무엘을 쓰셨다. 결론적으로는 다윗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에브라임 지파(실로)에서 유다 지파(예루살렘)로 홀이 옮겨졌다(67-68, 창 49:10).

28. 왕의 선택은 왕궁에서 왕족을 대상으로 하는 법인데 다윗의 선택을 하필이면 ‘양의 우리’에서 택하셨다고 하는가?

    다윗의 선택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렸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다윗의 좋은 점을 열거한다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양의 우리에서 택하셨다는 것은 비천한 목동에서 이끌어 내셨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역사가 인간적인 많은 장점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29. 용비어천가는 왕의 조상들의 위대함을 선전함으로 왕의 권위를 세우려는 목적이 있다. 에브라임 지파에서 유다 지파로 권력(?)이 옮겨오는 것을 정당화 하려고 에브라임 지파를 과도하게 비난한 어용시가 아닐까?

    다윗을 과도하게 높이지 않은 점과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강조하는 점을 보아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무리다. 왕을 찬양하고 높인다고 무조건 어용이라고 모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높일 자를 높이고 존경할 자를 존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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