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76편


1. 이 시편은 두 단락으로 나누는 것이 좋을까, 세 단락으로 나누는 것이 좋을까?

    (셀라)를 기준으로 하면 세 단락이 좋겠다.

2. 새삼스럽게 하나님이 알려지셨다니(1)? 그 동안 몰랐다는 얘기일 수는 없는데?

    히브리어 ‘알다’는 단순한 지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체험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직접 체험했다는 뜻이다. 이름이 알려졌다는 것도 그 이름에 걸맞은 일을 하셨다는 고백이다. 원문상으로는 ‘그 이름이 크시도다’라는 말이다. 가령, 유다를 포위하고 있던 산헤립의 군대가 하루 밤 사이에 전멸을 당했을 때의 그 느낌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해보라.

3. 위대하신 그 분(1)이 살렘, 즉 시온에 계시다(2)는 것이 왜 감격스러운가?

    누가 감히 살렘을 넘본다는 말인가? ‘살렘에 계신다’는 것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우리를 누가 감히?

4. 3절의 화살은 원어상으론 불화살이다. 적이 포위하고 있는 상태에서 예상되는 적의 불화살, 칼이 얼마나 두려운 것이었을까?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산산조각이 나도록 부숴버렸다. 앗수르의 위협이 제거 되고난 뒤의 고백이라면 이것이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오늘 우리는 이런 염려가 전혀 없는가?

    없을 수가 없다. 북한이 가진 무기들, 지구를 몇 번이나 깨고도 남을(?) 만큼의 핵무기? 지구를 향해 날아오고 있을지도 모르는 유성, 직장에서 잘릴 지도 모르는 위험, 어떤 미친 놈이 무슨 미친 짓을 할지도 모르는 위험...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 평화는 없다.

5. 하나님께서 영화롭고 존귀하신 것이 하필이면 약탈한 산에서? ‘산에서’라는 말은 ‘산보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그러면 하나님은 산보다 더 영화롭고 위대하다는 말이 되는데 무슨 산보다 더 그러할까?

    약탈 산? 약탈을 일삼는 앗수르를 의미할 수도 있고, 전리품을 산더미처럼 쌓은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의미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비교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6. 대적이 아무리 강하고, 장사라고 한들 하나님 앞에서는 잠자는 자일 수밖에 없다. 잠 자는 자의 특징은 무엇인가(다른 역본 참조할 것)?

    자기 것을 지키지 못하며 힘을 쓰지 못한다: 물론 이 잠이 영원한 잠을 의미할 수 있고, 무덤에 묻힌 장사를 의미할 수도 있다. 어쨌거나 하나님께서 꾸짖으시면 무력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가장 위력적인 무기인 병거와 말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6). 다른 역본들은 대체로 ‘자기의 손을 쓰지 못한다’는 것으로 번역했다.

7. 경외 받을 분이시라는 것(7)은 두려운 분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두려우면 어떻게 가까이 할 수 있을까?

    본질적으로 두려울 수밖에 없는 그 분(7)이 온유한 자를 가까이 하시기 때문에(9) 온유한 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친근히 해야 한다. 주의 목전에 설 수 없는 자는 노함, 판결, 심판의 대상자, 즉 대적자들이다. 대적자들에 대한 심판은 온유한 자의 구원이다.

8. 하늘과 땅은 어떤 관계인가(8)?

    하늘은 땅에 대해서 초월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다. 하늘이 땅에 대해서 간섭하거나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땅은 하늘에 대해서 어떻게 해볼 수가 없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일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다는 것은 초월, 전능, 절대적 주권을 의미한다.

9. 하나님께서 일어서시면 잠자는 자처럼 된다더니(5) 여기서는 왜 잠잠하였다고 할까(8)?

    그 전에는 시끄러웠다: 산헤립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다. 얼마나 많은 말로 비난을 퍼부었는지 모른다(왕하 8:19-35). 그런데 갑자기 조용해져버렸다. 이 잠잠함이 포위되어 있던 이스라엘에게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10. 결국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사람의 노여움’이란 무엇일까?

    대적자들의 분노: 분노하던 이들이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음으로 그것을 목격한 자들이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남은 노여움이 금지된다는 것은 그것이 대적자들의 것이라면 더 이상 노를 발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고, 하나님의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참으시고 더 이상 노여움을 발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11. 대적으로부터 놀라운 구원을 받은 이스라엘은 당연히 감사해야한다. 누구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호와(언약에 신실하신 분) 하나님(전능하신 창조주), 곧 모든 사람이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려야 한다: 예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땅히 경배해야 할 분이 누구신가라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의 고관이나 왕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두려워할 이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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