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74편


1. 무엇 때문에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버리셨다고 말할까?

    예루살렘의 멸망 때문: 성전이 불에 타서 완전히 파괴된 것(7)은 유다의 멸망 때의 일이다(왕하 25:1-21). 그렇다면 저자인 아삽은 어느 시대의 인물인가? 아삽은 다윗 시대의 인물이지만 시편에서는 성가대 악장을 맡은 아삽의 후손들을 의미하기도 한다.

2. 자신들이 당한 참상이 일시적인지 영원한 것인지 어떻게 알고 ‘영원히 버리시나이까’(1) ‘영원히 파멸된’(3)이라고 할까?

    도저히 회복될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 바벨론의 침입으로 예루살렘이 철저하게 무너지고 자신들은 머나먼 타국에 포로로 끌려간 상황에서 회복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을 것이며 실제로는 겨우 150년 밖에 지속되지 않았지만 한창 위력을 떨치던 바벨론이 망하리라고는 상상이 안 되었을 수도 있다.

3. 하나님께서 유다를 버리시는 것이 시인에게 이해가 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럴 거면 우리 조상들을 왜 속량하셨느냐는 것이다(2): 거의 천년 전에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해내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이러시겠나 하는 생각이 시인에게 없다는 것이 아쉽다.

4. ‘주의 대적이 주의 회중 가운데에서 떠드는 것’이(4) 도대체 어떤 상황을 가리키는 걸까? 이것이 어떻게 성전의 완전한 파괴와 관련될까?

    성전예배를 드릴 수 없는 상태: 주의 회중이란(in the place where you met with us: NIV)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모인 무리들이라고 보면 그 가운데서 대적이 떠드는 것은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다. 예배 중에 악한 무리들이 떠들고 나서서 예배할 수 없는 상황을 상상해보라. 얼마나 난감한 일인가! 대적들이 정복했다고 깃발을 성전이 아닌 어디에 세웠겠는가?

5. 대적을 벌목꾼에 비유했다(5). 나라가, 성전이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졌음을 잘 보여주는 표현이다. 그러나 이것은 선지자들에 의해서 예고된 일이었음을 보여준다. 어느 선지지가 이런 말씀을 했을까?

    이사야(사 10:15), 예레미야(렘 46:22), 에스겔(겔 26:9): 유다가 망하는 길로 가고 있을 때는 이사야가, 망하기 직전에는 예레미야가, 망한 후에는 에스겔이 말씀을 전했다. 유다의 멸망은 스스로 택한 길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음을 잘 보여주는 표현이다.

6. 회당이란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등장하는 것인데 유다 멸망 때에 회당을 멸했다는 것이 무슨 말일까?

    예루살렘 성전이 예배의 중심처소일 때에도 각 지방에서도 레위인들을 중심으로 ‘정한 시간’에 ‘만나는 장소’는 있었을 것이다. 이런 장소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말하자면 ‘비공식 회당’이라고나 할까? 포로기 이후에 공식적으로 회당이라고 부르게 된다. 교회가 세워지기 전에 기도소라고나 할까? 종교적인 박해가 극심했다는 것이다.

7. 우리의 표적은 보이지 않는다(9). 그러면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대적의 깃발(4): 대적이 표적으로 깃발을 세웠다. 눈에 보이는 것은 대적이고 우리의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선지자도 보이지 않는다(선지자가 있어도 말을 들어야지, 예레미야, 에스겔이 있었지만). 이런 암울한 상황이 언제 끝이 날지도 모른다(9-10). 이런 상황이 닥치지 않도록 말씀대로 살았어야 하는 건데...

8. 대적에게 능욕을 당하게 되니까 과거의 무슨 일이 생각나는가?

    출애굽 때 하나님께서 베푸신 이적들(13-15), 천지창조(16-17): ‘예로부터’란 말은 ‘하나님 우리 사이가 하루 이틀 사귄 사이가 아니잖아요?’ 하는 셈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의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이런 은혜를 베푸셨는데 오늘 우리에게도 그 은혜를 다시 한번 더 베풀어주시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9. 용(뱀)이나 리워야단이나 아주 강한 힘을 지닌 대적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머리를 깨뜨리면 치명적이다. 그런데 그것을 하필이면 사막에 사는 자들(짐승도 포함)에게 음식물로 주실까?

    철저한 징벌을 의미한다: 사막에 사는 자들에게는 남기는 법이 없다. 깨끗하게 다 먹어치운다. 대적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는 말이다.

10. 바위를 쪼개어 큰 물을 내신 것은 호렙산에서의 일이다(출 17:6). 늘 흐르는 강들을 마르게 하신 것은 무슨 일일까?

    요단 강물을 걸어서 건넌 일: 그냥 강이라고 하지 않고 복수형태를 쓴 것에 대해서는 이것이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 아닌가라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요단강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가로 막고 있던 강력한 민족들을 전부 말려버린 것도 포함하는 표현 아닐까? 강으로 번역된 단어는 ‘번영, 풍요’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11.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이여’ 혹은 ‘주께서’라고 하더니 드디어 ‘여호와여’ 한다. 하나님의 이 이름을 부를 때는 하나님께서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상기하는 의미가 있다. 이 이름과 원수들의 비방이 무슨 관련이 있을까?

    ‘너희 하나님은 너희를 구원할 능력이 없다’고 비방한 것에 대한 반작용이다. 고대의 전쟁은 신들의 전쟁이었다. 유다를 정복한 바벨론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자신들의 신이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유다의 신을 비웃었을 것이다. 유다가 할 수 있는 일은 일러바치는 것뿐이다, ‘하나님을 욕하는데요?’(18, 22)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반드시 이룰 것이라는 확신을 담고 하나님의 이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12. 유다가 바벨론에게 삼킴을 당했지만 유다는 바벨론과 전혀 다른 존재임을 어떻게 고백하는가?

    유다는 멧비둘기, 바벨론은 들짐승이라고(19): 비둘기가 들짐승에게 잡아먹히는 일은 예삿일이 아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징계를 위하여 있을 수 없는 일을 행하셨다는 고백 아닐까? 또, 비둘기는 제사로 드릴 수 있지만 들짐승은 제사용으로 쓸 수 없는 것으로 큰 차이가 있다.

13. 자신들의 죄악으로 처절한 멸망을 당하면서도 하나님께 회복을 간구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언약(20):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주신 언약을 잊지 마시라는 것이다. ‘잊으라고 해도 잊지 않는다. 네 할 일이나 제대로 해라’ 이러시지 않을까? 언약을 어겼다가 이런 고초를 겪게 되었지만 다시 언약에 근거하여 회복을 바라는 것이다. 현실은 참담한데(=땅의 어두운 곳에) 포악한 자는 가득하다!

14. 학대 받은 자가 부끄럽게 돌아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나라를 잃은 판에 부끄러울 게 뭐가 더 있다고?

    구원해 달라는 호소가 거부당하는 것: 도와달라고 내민 손을 부끄럽게 마시고 오히려 주의 이름을 찬송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15. 마무리가 좀 약하지 않은가(22-23)?

    우리 번역이 좀 약하다: 원문은 ‘일어나소서, 싸우소서!’ 하듯이 매우 강렬하다.

16. 시인이 하나님께 호소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처지가 너무나 불쌍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가 있을까?

    나만 억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비방을 받기 때문(7, 18, 22): ‘나의 억울함이 곧 하나님의 억울함이요 나를 향한 비방이 곧 하나님을 향한 비방이오며, 나의 대적이 곧 하나님의 대적이니 일어나 싸우소서’ 하는 것이다.

17. 내용을 현재, 과거, 미래와 관련지어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보자.

    현재(1-11): ‘어떻게 자기 백성에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라는 현실적인 아픔을 호소한다.
    과거(12-17): 출애굽과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니십니까?
    미래(18-23): 구원에 대한 요청이다.

18. 이 시편의 아쉬운 점이 있다면?

    현재의 재난이 닥친 원인이나 그에 따른 회개의 모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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