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72편


1. 왕은 누구며 왕의 아들은 누구인가?

    같은 사람이다: 자기가 왕인데 동시에 왕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합법적으로 계승된 자라는 것이다. 유다에서는 ‘다윗의 왕위는 영원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왕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언약(삼하 7:11-16)을 계승하는 것이 왕의 자리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이렇게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까지 담겼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이어가야 할 사명이기도 하다.

2. 1-3절에 사용된 단어들, ‘판단력(1), 공의(1, 2), 재판(2), 정의(2), 의(3), 평강(3)’은 무엇과 관련된 단어들인가?

    통치: 통치의 원리와 수단, 결과다. 공의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재판이 제대로 이뤄져야 하고 그렇게 되면 백성들이 평강을 누리게 된다. 왕의 역할이 외적의 침입에 신경을 쓰지 않고 통치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것도 복이다.

3. 재판에 올바른 판단력과 공의로움은 필수다. 이와 관련해서 솔로몬이 칭찬받아야 할 이유를 찾아보자.

    주의 판단력과 주의 공의를 원한다는 점(1): 나라를 자의적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서 나라를 다스린다는 인식을 분명히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라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백성도, 가난한 자도 다 주의 것이다(2). 솔로몬이 이런 자세를 끝까지 가져갔어야 하는데...

4. 왕의 역할을 수행하기에 꼭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해서(1) 얻었다면 누가 그것을 실행하는가? 나? 그? 왜 그럴까?

    그(3, 4): 3인칭으로 객관화시킴으로 그런 역할을 수행해야 할 왕은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의 뒤를 잇는 또 다른 왕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결국 온전한 성취는 메시야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5. 결과적으로 본다면 왕의 역할은 무엇인가?

    백성들에게 평강을 주는 것(3-4):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는 것이다. 공의로운 재판의 결과다. 실제로 왕권을 제대로 누리려면 있는 자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야 하기 때문에 이런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이스라엘에서도 찾아보기가 어렵다. 솔로몬도 평생 그러지는 않았다. 온전한 성취는 만왕의 왕이신 그 분이 오실 때에야 제대로 성취될 것이다.

6. ‘궁핍한 자를 구원하며’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라는 하는 것은 어디에 관심이 있는 걸까?

    가난이 대물림 되는 현상을 끊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겼을 것이다. 가난의 굴레가 사회적, 제도적 구조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대물림 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이런 구조적인 문제를 왕이 해결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왕의 역할이다.

7. 왕이 제대로 통치하면 나타나는 또 다른 결과는 무엇인가?

    하나님 경외(5):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왕의 역할을 제대로 한다면 당연한 결과다.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는 왕, 제사장, 선지자, 나아가 목사, 교사의 역할도 결국은 이것이다. (5절은 역본에 따라 뜻이 전혀 다르다. 70인 역이 인위적으로 고친 탓이다. 6-7절이 왕과 관련된 내용이라서 5절의 복수 형태를 단수 형태로 고치고 왕에 관한 내용으로 바꾼 것인데 그럴 필요가 없다.)

8. 왕의 통치에 대해서 영향력, 기간, 영역, 질로 나누어 설명해보자.

    영향력(6-7): 건기와 우기가 뚜렷이 구별되는 지역에서 비나 소나기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왕이 이 역할을 잘 하면 백성들은 평강을 누린다.
    기간(7): 달이 다할 때까지, 영원을 의미한다.
    영역(8): 국내만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다스리는 강력한 나라를 이룬다. 과장일까, 실제일까? 이 왕이 단순한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왕을 가리키는 탓이다. 통치의 질도 마찬가지다.
    질(10-11): 왕이 아니라 황제요, 왕중왕이다. 한 때 솔로몬이 이런 왕이 된 적이 있기는 하지만 대를 이어 누릴 수 있는 영광이 아니다. 결국은 메시야 왕국에 대한 예언이다.

9. 12-14절은 2, 4절의 반복 아닌가?

    반복이긴 한데 단순 반복이 아니라 더 구체적이고 적극적이다: 2-4절이 재판을 통한 구원, 즉 공의의 통치에 주안점이 있다면 12-14절은 도움이 절실한 자를 찾아가서 직접 구원해낸다. 온 세상의 황제격인 왕이(9-11) 이런 일에 매달릴 수 있을까? 일반적인 왕은 그럴 수 없다.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백성에게 다가가서 구원해낼 분은 우리의 고통과 슬픔을 친히 체험하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다.

10. 절망에 빠진 자들을 구원했더니 그들이 생존하여 스바의 금을 왕에게 드린다고(15)? 어디서 그런 능력이 생겼을까? 다른 역본들을 참고해보자. 12-14절의 주어는 3인칭 남성 단수(왕)다. 15절의 동사 네 개(살다, 받다(드리다의 수동형), 기도, 찬송)의 주어도 3인칭 남성 단수다. 기원문인지 미래서술형인지도 분명치 않다. 서술형이라면 왕이 ‘살 것, 받으실 것, 기도와 찬송을 들으실 것’이다. 기원문으로 본다면 어떻게 될까?

    만수무강 하시고, ...받으시고, ...들으시옵소서: 대부분의 역본들은 이렇게 번역했다. 개역은 15절이 구원받은 사람들이 왕을 칭송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의역을 했다(단수 주어를 복수로 고쳐서 해석함).

11. 의로운 왕이 의로 통치하면 그 영향이 어디까지 미치는가(16)?

    자연계: 산꼭대기의 땅이란 계단식 농사를 짓는 경우의 제일 높은 곳의 밭이다. 이 곳까지 열매가 풍성할 정도면 다른 땅이야 말할 것도 없다. ‘레바논 같이 흔들린다’는 것은 레바논의 백향목 숲이 흔들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거대하게 쭉쭉 뻗은 백향목이 요동치듯 열매가 흔들린다는 것은 과장이긴 하지만 느낌이 살아있다. 백성이 ‘땅의 풀 같이 왕성하리라’는 것도 그렇다.

12. 왕의 이름이 영구한 것이 백성에게 복일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의 복이다. 어느 왕이 이런 왕인가?

    복음이 온 땅을 뒤덮는 그 나라의 왕이다.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다. 의로 통치하며 모든 백성에게 복을 내리며 자연만물조차 풍성하게 열매 맺게 하는 왕은 메시야 외엔 없다.

13. 왕을 칭송하더니 갑자기 여호와를 찬송하라고 하는가?

    이 모든 일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18-20절은 후대에 추가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 부분은 시편 제 2권의 끝 부분이다. 특히, 18-19a절은 1, 3, 4권의 끝부분에도(41:13, 89:52, 106:48) 비슷한 구절이 있다. 이 견해를 따르면 72편은 17절이 끝이다.

14. 솔로몬의 시라고 하고선(1) 다윗의 기도가 끝이라니?

    지금까지의 모든 시편에 대한 마무리 구절로 본다(60/72편만 다윗의 시편이지만 전체적으로 다윗의 시편이라고 부른다). 후대에 편집자가 삽입한 것으로 본다. 본문에서도 다윗의 시대라기보다는 솔로몬의 시대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이 있다(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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