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69편


부당한 고난(1-4)/절규
1. 다윗이 고난 가운데서 부르짖었다. 그런데 다윗의 이 부르짖음이 십자가 상의 예수님의 부르짖음이 된다(21). 다윗의 부르짖음이 어떻게 메시아의 부르짖음을 예언한 것이 되는가?

    많은 부분에서 다윗은 오실 메시야의 그림자다. 다윗의 고난이 메시야의 고난의 그림자로 쓰였다. 다윗의 고난을 통해서 메시야의 고난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2. 다윗은 익사하기 직전이다. 깊은 수렁, 깊은 물에서(2) 목이 마르다(3). 다윗의 인생에서 이렇게 절망스러운 때는 언제였을까?

    압살롬의 반역 때가 가장 유력하고, 사울에게 쫓기던 시절도 가능성이 있다. 8절을 참고하면 전자가 유력해 보인다.

3. 깊은 물에서(2) 어떻게 목이 마를까(3)?

    마실 수 없는 물, 즉 홍수를 말한다: 바닷물도 그렇지만 다윗이 바다에 빠지는 경우는 가능성이 별로 없으니까 홍수라고 봐야한다. 반역으로 위기에 빠진 것을 홍수에 떠내려가는 것으로 비유한 것이다.

4. 목이 마르고, 눈이 쇠한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기 때문: 부르짖느라고 목이 갈하고, 눈이 빠지도록 하나님을 찾았다는 뜻이다. 울부짖으며 하나님을 찾아 헤매는 고아같은 모습을 연상시킨다.

5. 까닭 없이 미워하는 자, 부당하게 원수 된 자가 많은데(4) 정말 이유 없이 그럴까(5)?

    그렇다: 5절은 하나님께 죄가 많다는 말이지 자신을 미워하는 자에게 대한 말이 아니다. 4절은 인간을 상대로 하는 말이고 5절은 하나님을 상대로 하는 말이다. 인간적으로는 너무 억울하다(4)! 대적하는 무리들(사울, 압살롬, 아히도벨, 아도니야, 압살롬, 아비아달...)은 본래 가까운 사람들이었지만 자신들의 부당한 욕심 때문에 일을 저지른 것이다. 예수님도 이렇게 까닭 없이 미움을 당했다(요 15:25).

조롱 받는 주를 위한 열성(5-12)/ 억울

6. 억울하다더니(4) 갑자기 죄가 많다(5)고 하는가?

    사람들 앞에서 아무리 당당해도 하나님 앞에서까지 그럴 수는 없다. 비록 하나님을 위하여 비방을 받고(7, 9) 주의 집을 위한 열성이 있다고 해도(9)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는 부족한 존재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이며 회복의 지름길이다.

7. 자신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지 말아야 하는 ‘주를 바라는 자들’과 ‘주를 찾는 자’는 누구일까?

    다윗을 따르는 백성들: 개인적인 아픔을 토로하다가 이제는 백성의 왕으로서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목사가 ‘성도들이 나로 이해서 수치를 당하지 않아야’ 이런다면(6) 얼마나 좋을까?

8. 다윗은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어머니의 자녀에게는 낯선 사람이 되었다’고 고백한다(8). 이런 일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어떻게 성취되는가?

    그리스도께서는 형제인 유대인들에게 배척을 당했고, 고향 사람들은 물론이고(마 13:53-58 )심지어 형제들조차 믿지 않았다(요 7:5). 예수의 그림자인 다윗은 이런 형편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9. 성도는 자신의 우매함이나 욕심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경우에도 하나님께 회개하고 도움을 요청해야겠지만 고난을 당하면서도 ‘주를 위해서 이런 비방을 받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성도에게 가장 적합한 말씀이 무엇일까?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강조점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 두어야 한다. 나머지 일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다.

10. 다윗이 고난당하는 구체적인 이유는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 때문이다. 예수님에게도 이런 열성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무슨 일을 하셨는가?

    성전을 청결케 하셨다(요 2:17): 성전의 장사꾼을 내쫓을 때 이 구절을 적용하셨다.

11. 대적하는 무리의 ‘욕, 말 거리, 노래’는(10-12) 요즈음 표현으로 한다면 무엇일까?

    안주 거리: 성도들이 귀하게 여기는 것이 대적하는 무리들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성문에 앉는 자들은 대체로 성읍의 재판장이나 지도자들이다. 존귀한 자나, 술취한 자나 구분없이 자신을 조롱한다는 호소다. 예수님도 그렇게 조롱을 당했다(마 27:29, 41, 46-49, 막 15:31, 눅 23:26).

부르짖는 간구(13-18)/간구

12. 언제 기도하는가?

    나를 반기시는 때에: 기도하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기뻐하시리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나를 가까이 하던 자들이 나를 배신하고 반역을 일으켜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기뻐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는 나의 필요, 나의 열심히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태도,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

13. 하나님에게는 인자가 많다. 다윗의 입장에서 보면 무엇과 대조를 이루는가?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들의 숫자(4): 원수들이 아무리 많을지라도 하나님의 인자보다 많을 수는 없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실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랄 것은 주의 인자와 긍휼 뿐이다(16).

14. 하나님을 무엇이라고 부르는가(1, 3, 5, 6, 13, 16, 17, 19, 24-28,)?

    하나님, 여호와, 주: 고난을 호소할 때는 하나님(엘로힘), 기도할 때는 여호와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엘로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의미하고 여호와는 언약을 맺고 지키시는 분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예컨대, 전자가 공적인 관계라면 후자는 사적인 관계를 의미하는 셈이다. 그래서 기도할 때는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하여 기도하기에 주로 이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다. 주는 우리말에 없는 ‘you’(2인칭 존댓말)를 번역한 것이다. 자신을 종이라고 하는 것(17)과 비교하면 아주 적절한 번역이다.

15. 다윗은 자신의 처지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14-15)?

    수렁, 깊은 물, 큰 물, 웅덩이: 수렁은 스스로 헤어나올 수 없는 진흙 구덩이, 깊은 물은 캄캄하고 어두운 바다 밑, 큰 물은 홍수, 웅덩이는 우물이라고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깊은 우물에 빠졌는데 입구를 막아버린다면? 요는 스스로 헤어날 수 없는 절박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다.

16. 16-17절을 요약하면 ‘들으시고, 얼굴을 돌려, 보시고, 빨리 들어주셔요.’ 하는 셈이다. 하나님께 이렇게 떼(?)를 쓸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인자와 긍휼(16): 13절에서는 인자와 진리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인자(헤세드)와 긍휼(라함)을 베푸시지 않는다면 다윗의 수많은 기도가 아무런 소용이 없다. 헤세드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말하고, 라함은 자궁을 뜻하는 말에서 나왔다. 어머니가 태아를 보호하고 기르는 느낌을 담고 있다.

17. 다윗에게 지금 가장 시급한 일은 무엇인지 기도의 결론 부분인 18절을 근거로 생각해보자.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까이 하는 것: 머리털 보다 더 많은 대적자들의 위협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얼굴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이다(17). 그러면 대적이 아무리 많고 강해도 문제 될 것이 없다.

공의의 심판 간구(19-29)

18. 19절의 앞 문장은 ‘주께서’ 와 ‘나의’가 아주 강조된 문장이다(참고, NKJV, NASB). 번역 과정에서 이런 의미가 잘 살아나지 않았다. ‘주께서, 나의 비방, 나의 수치, 나의 능욕...’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런 기분을 잘 살려서 5글자로 줄여보자. 우리 부모 세대들이 애용한 유명한 기도가 있는데 딱 이런 느낌이다.

    주님, 아시죠?: 기도 중의 최고의 기도란다. 굳이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다 아시는데! 대적이 얼마나 많은지, 자신이 얼마나 억울한지, 다 아시는데!

19.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데도 마음이 상하고 근심이 충만할까(20)?

    신앙인도 아픈 것은 동일하게 아프다. 반응이 다를 뿐! 이겨낼 힘이 있어서 좌절하지 않는다는 점이 다르다. 아픔도 슬픔도 없는 것이 아니다. 아픔과 슬픔은 작게 느끼고 기쁨은 크게 느낀다.

20. 쓸개나 초가 음식물이나 음료수가 될 수 있을까?

    될 수 없다: 음식물이나 음료수가 될 수 없는 것을 먹였으니 혹독한 고난과 모욕을 당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21. 다윗이 고난 중에 쓸개를 먹고 초를 마시게 되었다는 것은 자신의 고난을 비유로 표현한 것이지만 동시에 이것은 예언이 되었다. 훗날 누가 쓸개를 먹고 초를 마시게 되는가?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시키셨다(마 27:34, 요 19:29). 십자가 상에서 이 말씀을 기억하시고 ‘목 마르다’ 하셨다.

22. 밥상은 내용상으로는 평안과 동의어나 마찬가지다. 밥상이 올무가 되면 어떻게 되나?

    죽음을 피할 길이 없다: 밥을 먹지 않고 살 수 없다. 살려고 밥상을 받으면 그게 올무, 즉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안 먹어도 죽고 먹어도 죽는다.

23. 눈이 어둡고 허리가 떨리는 것은 밥상이 올무가 되고 평안이 덫이 되는 것에 비하면 형편이 좀 나은 것 아닌가?

    그럴 리가 없다. 내용상으로는 동일한 것(22-25)으로 봐야 한다. 눈이 어두우면 사리분별이 불가능하고 허리가 떨리면 더 이상 힘을 쓸 수가 없다. 반역을 일으킨 무리에게 이런 일이 생긴다면 바로 파멸로 이어진다. 눈과 허리만 약해지는 법은 없다. 몸 전체가 그렇게 허물어진다.

24. 다윗이 고난을 당하는데 왜 하나님께서 분노하신다고(24) 생각할까?

    자신은 정당하고 반역하는 무리는 분명하게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다윗의 경우에는 문제가 없지만 역사적으로도 이런 생각으로 끝장이 나도록 싸운 경우가 한 둘이 아니다. 지금도 이런 싸움이 적지 않다. 잘못 판단해서 이렇게 생각한다면 정말 끝장이 난다. 그렇다면 확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올바른 판단이다.

25.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면 악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장막에는 사는 자가 없게 하신다. 이런 예를 찾아보자.

    여리고(수 6:26), 가룟 유다(행 1:20): 이 구절이 훗날 가룟 유다 대신 다른 사도를 세우는 근거 구절로 인용이 된다.

26. 악인들이 주께서 치신 자를 치는 것(26)은 하나님의 일을 돕는 것 아닌가?

    하나님께서 치시는 것은 잘 되리고 하는 것이지만 악인들이 치는 것은 죽으라고 치는 것이다. 아버지가 자식을 야단치는데 다른 형제가 거든다고 형제를 때리면?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것은 수용하지만 이유 없이 대적들이 날뛰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심판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이다.

27. 주의 공의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죄악에 죄악을 더하라고? 그러면 하나님 책임이잖아?

    악을 행하는 자들을 악한 그대로 버려두시라(롬 1:28)는 의미다. 구원을 받으려고 나아오는 것을 막으라는 의미는 아니다. 버려두시는 것 자체가 심판이다.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것이지 결코 누구의 파멸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28.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야한다는 개념이 구약에도 있었네. 이걸 최초로 언급한 분이 누구더라?

    모세(출 32:32): 민족의 죄를 사해달라고 하면서 여차하면 자신를 희생시킬 각오로 언급한 것이다. 모세가 어떻게 이런 사실을 알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구약시대에도 익숙한 개념이었던 모양이다.

29. 다윗은 복을 받을 수밖에 없네! 가난하고 슬프니! 가난하고 슬픈 자가 왜 복인가?

    예수님의 8복에 두 개나 해당되니까! 그가 가난하고 슬프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는 자신에게 이유 없이 닥쳐온 고난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런 가난과 애통하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복으로 갚아주실 것을 아는 것이다.

복락 선언(30-36)

30. 예수님 시대에도 유대인들은 제의보다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다윗은 그보다 거의 1000년이나 이전에 제사보다 더 소중한 것이 마음(30-31)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구약시대에 이럴 수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렇게 말씀하셨다. 할례는 마음에 행하라는 말씀(신 10:16, 30:6)이나 제사를 드리되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도록(열납되도록) 드리라는 말씀(레 1:3, 4, 19:5, ...)이 그렇다. 자기 백성의 찬양과 감사를 황소보다 더 기뻐하시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하나님을 그만큼 잘 알았다는 의미다.

31. 하나님을 찾는 자들은 대체로 마음이 곤고하다(32). 어떻게 마음을 소생시키는가?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함으로(30-31, 33-34, 35-36):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노라면 현실적으로 어려울 수 있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게 된다. 이것을 확신하고 꿋꿋하게 믿음의 길로 나아가라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찾는 자들의 기본자세다.

32. 자신의 구원과 하나님을 찾는 자들의 구원(30-33)이 왜 천지와 모든 생물이 찬송해야 할 이유가 되는가?

    구원의 감격이 너무나 크다는 뜻이다: 또, 모든 피조물의 중심이 바로 인간이며 하나남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 바로 모든 피조물이 해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롬 8:19-23).

33.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더니(4) 어떻게 결말이 지는가?

    시온의 구원: 자신의 구원이 곧 시온의 구원이다. 자신의 고난을 호소하는 것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도이었다는 말이다. 우리도 우리의 개인적인 문제가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이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복된 것일까?

34. 시편은 단순히 다윗의 개인적인 작품이 아니다. 때로는 자신이 당한 고난 중에 부르짖는 기도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자신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후손으로 오시는 메시야의 고난을 대신 부르짖기도 한다. 특히 22편과 본 시편이 두드러진다. 이런 고난의 최종적인 모습은 무엇인가?

    다윗의 입장에서 보면 시온의 구원(=성읍을 건설하고 후손들이 안연히 거함)이고 메시야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다. 거룩한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를 상속해갈 것에 대한 예언이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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