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62편


1. 시인이 어려움 가운데 있는 것이 틀림없지만 우리가 보기에 그렇게 다급해 보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잠잠히 하나님을 바란다(1, 5)고 하니까: 속으로는 저주를 하지만 겉으로는 복을 비는 원수들이 가까이에 있다(4). 다가오는 위험을 감지하고 있으면서도 평상심을 잘 유지하고 있는 비결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뿐이다. 시인은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다. 홍해 앞에 선 모세가 그랬다(출 14:13-14). 반면에 사울은 다급하게 설치다가 망했다(삼상 13:6-14).

2. 1절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느낌이 드는가? “오직, 하나님만, 잠잠히, 나의 영혼, 그로부터, 나의 구원”

    하나님 앞에 미사여구를 늘어놓지 않는다. 어린아이처럼 더듬거려도 좋다: 1절은 아기말처럼 명사, 부사구로만 된 어설픈 구절이다. 자신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엎드린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리 세련된 말이 아니라도 좋다.

3. 시인은 어떤 형편에 처해 있는가?

    구원이 필요하고(1), 흔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2).

4. 시인을 공격하는 원수를 하필이면 넘어지는 담, 흔들리는 울타리라고 할까? 우연인 척하면서 공격한다는 말일까?

    비참한 최후를 내다보는 표현이다(사 30:13): 지속적으로 흔들리고 있다는 뜻으로 조만간 무너질 수밖에 없는 담이란 뜻이다. 공격하는 방법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번역상, 담과 울타리가 원수를 가리키는지, 시인을 가리키는지 논란이 있다). 원문의 순서를 살려서 번역하면 ‘너희는 언제까지 (한) 사람을 공격하느냐, 너희 모두가 (그를) 죽이려고? 넘어지는 담과 같이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된다. 아무래도 시인이 자신을 곧 무너질 담으로 여기지는 않았다고 본다. 반석 위에 굳게 설 것을 확신하고 있으니 말이다.

5. 인생을 의지하고 사는 것은 흔들리는 배 위에서 중심을 잡으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때로는 절망할 수밖에 없다. 인생을 의지하는 것이 왜 그럴까?

    겉과 속이 다른 것이 인생이기 때문(4): 믿었던 사람이 배신하는 경우는 흔히 있는 일이다. 미담 사례 중에는 잘못을 감추기 위한 포장이 적지 않더라. 우리 인생이 그렇더라. 하나님만 의지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우리 인생은 늘 그렇게 요동칠 수밖에 없다.

6. 1-2절과 5-6절은 내용에 차이가 있는가?

    약간의 차이가 있다: 구원(1)과 소망(5)이란 표현이 다르고, 2절에 있는 크게란 표현이 6절에는 없다. 전혀 흔들림이 없을 것이라는 의미다.

7. 악상기호로 추정되는 ‘셀라’가 때로는 문단의 구분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여기서는 내용상 아니라고 한다. 5-8이 단순히 1-4의 반복은 아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두 절(1-2절과 5-6절)은 거의 비슷한 내용이다. 7-8절은 3-4절과 어떤 관계일까?

    대조: 3절은 시인을 공격하는 대적에 관한 것이지만 7절은 시인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것이고, 4절도 대적에 관한 것인데 8절은 대적들의 악한 행위에 동참하지 말아야 할 백성들에 대한 권면으로 보면 될 것이다.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백성들에게 지혜를 가르치는 셈이다.

8. 인생은 입김,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인생이 이렇게 허무한 것인가?

    하나님 없는 인생을 말하는 것이다(사 2:22). 반면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인생은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 우뚝 선 영광스러운 것이다(5-7).

9. 인생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결국은 무엇을 의지하게 될까?

    포악, 탈취, 재물: 재물이 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오늘날에도 이 말씀은 여전히 유효하다.

10. 하나님께서 한 번 말씀하셨을까, 두 번 말씀하셨을까? (영역본 참조)

    하나님께서는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고 한 번 말씀하셨다. 그런데 시인은 두 번 들었다, 귀로 듣고, 마음으로 또 한 번!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11.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말도 있고 왕권신수설도 있다. 다윗은 어느 쪽인가?

    둘 다 아니다: ‘권능((=권세)은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고백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실 뿐 자신은 청지기라고 고백하는 셈이다. 이런 다윗의 권력은 누군가 빼앗아도 자기 것이 되지 못한다. 왕권신수설은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왕의 절대 권력을 합리화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이다. 다윗의 고백과는 전혀 다르다.

12. 인자하심과 행한 대로 갚으심(12)은 서로 상반되는 개념 아닌가? 마치 주께서 인자하시니 행한 대로 갚으시나이다 라는 것처럼 들리는데?

    시인에게는 인자로 대하시고 대적자들에게는 행한 대로 갚으실 것이라는 고백이다. 하나님의 속성에 인자와 공의가 공존하시니 당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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