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59편


1. 원수들이 노리고 있는데 ‘높이 드소서’라고 하는 것은 원수들의 손이 미치지 않는 높은 곳으로 옮겨달라는 의미다. 원수들을 개에 비유하고 있는 점을 참고하면(6, 14) 어떤 모습이 그려지는가?

    개가 물지 못하도록 손으로 높이 쳐드는 것: 아니면 닭을 지붕 위로 던지는 것? 하나님을 아버지로, 자신을 어린아이로 여기고 물려고 덤비는 개에게 물리지 않도록 번쩍 들어 올리는 모습을 그리는 셈이다.

2. 자기를 죽이려고 군사들이 집을 포위하고 기회를 노리고 있다면 제일 먼저 할 일이 무엇인가?

    기도하는 일: 적어도 다윗은 그랬다. 당장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날이 밝으면 체포해서 끌고 가려고 포위하고 기다리고 있었으니 여유가 있었던 걸까? 비슷할지 모르지만 여호수아가 지도자가 되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전쟁을 준비하는 일보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라고 하셨다(수 1:8). 전쟁을 눈 앞에 둔 지도자가 말씀을 묵상하고 따르는 일이 먼저라고?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먼저다.

3. 내게 허물이 없는데 악한 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는 이런 일들이 왜 생기지?

    타락한 이후에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다: 나만 잘한다고 어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다. 운전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방어운전이라는 것도 있다. 우리 인생에게는 나의 잘못이 없음에도(3, 삼상 19:4, 22:14, 26:21) 이런 불행이 있을 수 있다.

4. 악한 자들도 종류가 많다. 다 같은 의미이겠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악한 자는 어떤 자인가?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 누가 미워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이유없이 재미로 남을 해하는 사람이다. 시한폭탄 같은 사람이다. 피를 흘린다는 것은 단순한 위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살인을 가리키는 말이다(3, 창 9:5, 잠 29:10).

5. 못된 것들이 게으르면 좋으련만 더 열심인 게 문제다. 악한 자들이 얼마나 열심인가?

    달려와서 스스로 준비하오니(4): ‘빠르고 열심’이라는 의미다. 좋은 일은 시켜도 잘 안 하면서 못된 짓은 왜 스스로 준비하느냐 말이다, 대충하지! 그러니 기댈 곳은 하나님 밖에 없다. 참고로, 원문의 뜻을 잘 살린 NRSV는 4절의 후반부를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Rouse yourself, come to my help and see! 깨소서, 오소서, 보소서!

6. 왜 갑자기 벌을 받아야 할 대상이 바뀌지(5)? 벌을 받아야 할 대상은 자기를 해하려는 악한 무리인 것이 틀림없는데 갑자기 모든 나라, 즉 열방이 여기서 등장하는 이유가 뭘까?

    자신을 해하려는 자들을 이방인(=모든 나라)처럼 여기는 표현이다: 성경에서 열방은 흔히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나라, 즉 이방인들을 총칭하는 표현으로 쓰인다. 6-7절에도 벌 받을 대상이 세상의 모든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우상을 섬기는 모든 나라를 심판하듯이’ 하나님과 상관없는 짓을 하고 있는 저 악한 무리들을 벌하시라는 것이다.

7. 우리나라 사람들이 개를 좋아하면서도 욕할 때 개를 들먹이는 이유 중의 하나는 개는 자라면 어미를 몰라보고 교미를 하기도 한다는 점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개를 불결하게 여기는 이유는 죽은 고기를 먹는 것(출 22:31, 왕상 21:19)과 토한 것을 다시 먹는 습성(잠 26:11)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개들이 왜 저물었을 때 울며 성을 돌아다닐까? 다윗을 노리는 군사들은 몰래 숨어 있을텐데...

    들개의 습성이 그렇다: 성경이 말하는 개는 대부분 들개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대적자들의 행동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개처럼 불결하고 혐오스럽고 위협적이라는 말이다.

8. 사울이 다윗을 죽이라고 명령하면서 분명히 그럴듯한 이유를 댔을 것이다(7). 멀쩡한 사람을 나쁜 말로 비방할 수 있는 근거가 뭘까?

    그걸 알고 시비를 걸 자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누가 들으리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태연자약하게 거짓을 말하고 악을 행할 수 없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악의 시작이다. 악인들이야 이렇게 제멋대로 설치지만 하나님께서 보고 계심을 믿는 성도는 악한 방법으로 대응할 수는 없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서는 이런 아픔을 이겨내기 어렵다. 웃고만 계시던 하나님께서 일어나시는 날을 고대하며 사는 것이 성도다(10).

9. 대적자들이 개처럼 몰려 다니며 위협을 가하고, 악한 말을 내뱉어도 시인이 별로 요동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요새 안에 있기 때문(9): 하나님께서 자신의 요새라는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안전할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요새로 여기고 평안할 수 있는 것이 성도의 특권이다.

10. 죽이지 말라면서(11) 소멸하라고(13)?

    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잊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다(11, 13): 한 방에 끝을 내면 백성들이 그 순간에는 환호할지 몰라도 곧 잊어버린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서서히 지속적으로 시행하시라는 것이다(흩으시고 낮추는 것). 하나님께서 가나안 백성들을 천천히 쫓아내리라고 하신 것(신 7:22)과 좀 비슷하다.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 속에서 백성들이 하나님을 기억하기를 기도하다니...

11. 대적자들의 말이란 저주와 거짓말 뿐이다(12). 저렇게 악한 말만 해대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주시면 좋을까?

    그 말이 오히려 자신들에게 임하게 하시기를 간구한다: ‘저주와 거짓말로 말미암아 그 교만한 중에서 사로잡히게 하소서’라는 표현이 자기들이 말한대로 자신들에게 임하게 하소서라는 의미다. 아브람에게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내가 저주를 내리고...’ 하신 말씀(창 12:3)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12. 가데스바네아에서 반역한 무리들에게 한 사람도 빠짐없이 광야에서 죽을 것이라고 하셨다. 광야에서 늙어서 죽은 사람은 겉으로 보이기에는 자연사한 것처럼 보여도 분명히 하나님의 심판이다. 본문의 표현을 이용해서 그런 현상을 설명해보자.

    서서히 흩으시고 낮추시지만(11)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로 소멸되는 일이다(13): 하나님의 심판이 때로는 느리긴 하지만 철저하게 진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무 느리다고 심판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가 많다.

13.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고 계시다는 것은 땅 끝까지 알게 하소서? 하나님의 통치는 일반 왕들의 통치와 다른가?

    하나님의 통치는 완전한 통치, 즉 공의로운 통치다. 왕이라도 공의롭지 못하면 심판의 대상이다. 이런 말을 고대에는 할 수도 없었거니와 생각도 못 했다. 왕의 말이 곧 선이던 시절이니 말이다. 공의롭지 못한 사울이 심판을 받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14. 대적들의 상태를 두 번이나 ‘저물어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는 것’으로 표현했는데(6, 14) 내용상 어떻게 다른가?

    6절은 악을 행하는 모습이고, 14절은 심판을 받아 쫓겨난 모습이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방법 중에는 동일한 모습, 즉 행한대로 심판하시는 방법이 있다(옵 1:15, 계 22:12). 개처럼 굴었으니(6) 개처럼 당해보라(14-15)는 식이다. 15절의 ‘못하면’은 ‘못하고’로 번역하는 것이 옳단다(공동번역).

15.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면 대적들과 다윗의 처지는 어떻게 달라지는가?

    대적들은 밤새 굶주린 개가 되고 다윗은 아침에 노래하는 새가 된다: 이렇게 대조시켜보면 의미가 선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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