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55편


1. 다윗이 극도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3). 원수들의 압제와 위협 외에 다윗에게 진짜 두려운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숨으시고 대답하지 않으시는 것(1-2):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하나님이라고 믿는 다윗에게는 이것이 더 큰 아픔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이다. 설마 하나님께서 숨으실까? 아이들이 아버지에게 ‘장난치지 마세요’하는 것처럼 보인다. 욥도 자신의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에 더하여 엉뚱한 대답을 하는 친구들 때문에 더 힘들었기는 하지만 대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때문에도 힘들었다.

2. 다윗에게 근심이 그렇게 많았는가?

    실제로 다윗의 일생은 험난하기 그지 없었다: 다윗이 남긴 시편에도 이런 비탄시가 제일 많다(시편 전체 비탄시는 36편, 감사시는 29편인데 그 중에서 다윗의 비탄시는 27편).

3. ‘원수의 소리’는 다윗을 추격하는 군대의 함성이라고 이해하면(3) ‘그들이 내게 죄악을 더하며’ 란 표현은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누명을 씌우는 것: 쿠데타에도 대의명분이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없는 죄도 만들어서 덮어씌워야 한다. 멀쩡한 사람을 내어 쫓았으면 남은 자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죄를 덮어씌워야 하는 것이 인생사다. 원수들이 ‘소리를 지르며 추격하고 누명을 씌어가며 핍박합니다.’ 이런 말이다.

4. 다윗이 이렇게 약하나(5)? 두려움과 떨림, 공포? 골리앗과 싸우던 장면을 생각해보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데?

    골리앗과 싸우던 모습을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라고 하면 지금 다윗이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죽음으로 내몰리는 자연인 본연의 모습 아닐까?

5.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소망이 다윗에게도 있었네! 구약의 어느 인물이 비슷한 마음을 품고 실제로 행동에 옮겼는가?

    요나: 요나는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서 자기 생각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바다로 도망을 쳤다. 어쩌면 우리 모든 인생이 현실에서 도피하는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속히(8)! 고향에서 쫓겨난 인생이니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그럴지라도 성도는 이 땅에서 주어진 사명이 있음을 알고 현실의 아픔을 이겨내야 한다. 다윗이 소망한 산비둘기가 원어로 ‘요나’다.

6. 왜 하필이면 광야에 머무르고 싶을까?

    사람이 없는 곳이라서 숨어 지내기에 좋은 곳이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길 때에 숨어 지냈던 곳이다. 왕좌를 버리고 도피했던 사람들(말년의 견훤, 이성계)의 아픔을 생각해보면 다윗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을지 알 것만 같다.

7. 악한 인간들의 소행이 도대체 어떠했기에 폭풍과 광풍이라고 하는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알기는 어렵다. 폭풍과 광풍의 차이는 뭘까?

    폭풍은 세기는 하지만 일정한 방향이 있다면 광풍은 방향도, 시간도 예측하기 어렵다. 센 바람도 무섭지만 예측하기 어려운 바람도 무섭기는 매 한 가지다. 미국의 예를 든다면 허리케인과 토네이도가 한꺼번에 들이닥치는 격이다.

8. 사랑을 말하는 그리스도인도 이렇게 저주를 퍼부을 수 있을까(9)? 다윗도 그랬는데?

    하나님께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람에게는 안 되고!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우리의 모든 응석을 받아주시는 분이시니 그럴 수 있지 않을까?

9. 원수들이 멸망 당해야할 죄악은 강포, 분쟁, 죄악, 재난, 악독, 압박, 속임수다(9-11). 어디에서 이런 짓을 했다고 고발하는가?

    성내(9-11에 다섯 번): 예루살렘(평화의 터전) 성 내에서 그랬다는 것이다. 까짓 거 애초에 산적의 소굴에서 그랬다면 누가 뭐래나? 하나님께서 세우신 평화의 도시를 악인의 소굴로 만들어버렸다고 고발하는 것이다.

10. 하필이면 원수들의 혀를 잘라버리라고 할까(9)? 그들을 멸하는 것과 혀를 잘라버리는 것은 아무래도 연관성이 부족해 보인다. 참고로 개역은 ‘혀를 나누소서’ 표새는 ‘그들의 언어가 혼잡하게 되도록 하여 주십시오’ 라고 번역했다.

    말이 나누어진다는 것은 생각의 불일치를 의미한다고 보면 원수들이 스스로 무너지기를 소망하는 표현으로 이해하면 좋겠다. 실제로 다윗은 그런 기도를 드린 적이 있다(삼하 15:31). 결과적으로 아히도벡의 계략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것이 다윗이 무사하게 탈출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11. 배신이란 원래 믿었던 사람이 주는 아픔이다. 그래서 더 고통스러운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무엇인가?

    그럼에도 관계를 완전히 끊지 못하는 것(12): 차라리 원수거나 미워하는 자라면 모든 것을 끝낼 수 있지만 이건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하는 관계라 더욱 고통스럽다. 예전의 즐거웠던 추억(14)과 비교하면 더욱 고통스럽다.

12. 다윗을 이렇게 고통스럽게 만든 배신자들이 도대체 누구일까?

    압살롬(아들)과 아히도벨(친구 삼하 15:17-18): 이들을 따랐던 무리들도 원래 다윗의 가까운 신하들이었다(시이저를 배신했던 브루투스도). 함께 의논하며 함께 하나님의 집에 다닐 때 참으로 즐거웠다. 언약을 맺은 화목한 사이였다(20). 그런 기억을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고통스러울 뿐이다.

13. 스올은 죽은 사람이 가서 고통을 당하는 곳이다. 그런데 왜 배신자들이 산 채로 스올에 내려가기를 바라는가? 죽은 채로 가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울까?

    갑작스럽게 죽으라는 의미다(=사망이 갑자기 임하여): 모세를 대적했던 고라와 그 일당이 땅이 갈라져 산 채로 스올에 빠진 것처럼(민 16:33). 승승장구하던 압살롬이나 아히도벨의 최후가 그렇게 닥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나무에 걸리고(삼하 18:14-15), 자살하고(삼하 17:33)!

14. 다윗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일어선다. 유일한 방법이 무엇인가?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 대적들에게 갑작스런 심판이 임하고 자신에게는 구원이 임할 것을 확신한다(16-18). 성도가 환경에 굴하지 않아야 할 이유다. 좌절할 것인가, 기도할 것인가? 18절의 ‘나를 치는(=원어, 가까이 하다) 무수한 대적들’이라면 백병전에서 많은 대적에게 둘러싸인 장면을 연상케 한다.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셨다는 고백이다.

15. 기도 시간이 아침, 점심, 저녁이 아니고 왜 저녁, 아침, 정오인가?

    유대인들의 시간 개념은 저녁부터 하루의 시작으로 보기 때문이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라(창 1:5). 일정한 시간에 끊임없이 기도하겠다는 것이다.

16. 하나님과 악인에게 공통점이 있을까?

    변하지 않는 것(19): 하나님도 영원하시지만 악인들도 변함없다. 하나님은 공의로심이 변함없는데 악인들은 악함이 변함없다. 그러면 악인들이 죽는 수밖에 없다. 결국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확신이다.

17. 입은 부드러우나 마음에는 악독이 가득한 이런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 아닌가?

    하나님께서 개입하시지 않으신다면 그렇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요동케 하심으로(22) 반도 못 산다(23).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은 일시적으로 성공하는 듯하나(능력 있어 보이나) 결국은 자기 꾀에 빠져서 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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