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54편


1. 십 사람들이 스스로 사울에게 다윗을 고발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까(삼상 23:14-26)?

    두려움으로 인한 것: 다윗은 미래의 권력일 수 있지만 사울은 현재의 권력이다. 부지중에 다윗을 도왔다가 아히멜렉 제사장의 집안이 멸족을 당한 것(삼상 22:11-19)을 알고 있으니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는 것이다. 어느 편에 설 것인가? 하나님의 편에 서야 한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지키고 계심을 십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다윗의 편을 드는 요나단과 대조가 된다(삼상 23:16-17). 그리스도인이라면 죽고 사는 문제보다는 하나님의 편이 되는 것이 우선이다.

2. 은혜를 모르고 배신하는 인간들에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인간을 상대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답을 찾는다: 인간은 그렇게 멋있거나 은혜를 입었다고 해서 반드시 은혜를 갚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을 의지하는 것이 그래서 어리석다. 십 사람들은 유다 지파로서 다윗의 친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믿을 수 없었다.

3. 왜 주의 ‘이름으로’ 구원하시라고 할까(1)? 주의 능력으로 구원하시라고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 분의 총체적인 것, 본질과 속성, 능력을 다 포함하는 말이다. 여기서는 대구를 이루는 주의 힘과 동의어다. 그러니까 능력으로 구원하시라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구원에 대해서도 주의 이름에 감사한다(6). 그렇다면 이름을 더럽히는 것(출 20:7)이 정말 큰 죄다.

4. 다윗을 치는 자들은 다윗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3절의 ‘낯선 자’란 ‘이방인’이란 뜻이다) 그런다. 왜 그런 짓을 하는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다(3):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못된 짓을 하는 사람은 실제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아니다. 십 사람들이나 사울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인가? 지금 하는 짓을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5. 다윗이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이유, 혹은 근거가 무엇인가?

    하나님을 알기 때문이다(4):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관심이 없으면서 무조건 빌기만 하는 것이 이방인의 기도다. 그러니 중언부언하고 말을 많이 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반드시 자신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확신마저 있었다(6-7). 1절에 ‘나를 변호하소서’라는 표현은 자신의 올바름에 대한 확신도 있었다.

6. 1-3절을 우리 아이들이 엄마나 아빠의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와 비교해 보자. 무슨 차이가 있을까?

    역순이다: 우리 아이들의 경우라면 아마 ‘엄마, 애들이 날 때려(3), 가서 혼 내줘(1).’ 이럴 것이다. 역순이 된 이유는 그만큼 다급한 탓 아닐까?

7. 다윗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는가?

    내 생명의 주인: 본문에 유달리 많이 사용된 ‘주’는(9번) ‘아도나이’ 즉, 주인이란 뜻이다. 내가 죽고 사는 것이 십 사람이나 사울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고백이나 마찬가지다.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는 원문상 복수형태다. 하나님께서 친히 붙드시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하셔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붙드신다는 고백이다.

8. 온전히 선하신 하나님을 향해서 ‘원수에게 악으로 갚고, 성실함으로 멸하소서’라고 하는 것(5)은 어딘가 어색하지 않은가?

    전자는 원수들의 악한 행위를 그대로 되돌려주라는 의미이며 후자의 ‘성실함’이란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나에게는 신실함이 원수들에게는 멸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9.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다윗은 무엇을 꿈꾸고 있는가?

    낙헌제 드리는 꿈: 낙헌제는 자원해서 드리는 예물을 가리킨다(레 7:16). 서원제나 감사제와 달리 특별한 이유도 없이 좋아서 드리는 제물인 셈이다(참고로, 서원제, 감사제, 낙헌제는 모두 화목제다). 평화로운 가운데 하나님 사랑하며 살겠다는 고백이나 마찬가지다. 더 이상 원수에게 쫓기는 다급함이나 절박함이 보이지 않는다. 직장도 없이 고생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십일조를 드리는 꿈을 꾸는 사람과 비슷할까?

10. 낙헌제를 드릴 장래의 꿈을 이야기하더니 왜 시제가 갑자기 과거로 바뀌었지?

    장래에 대한 확신이 바로 과거의 체험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다윗에게는 지난 날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해주신 수많은 체험이 있다. 똑 같은 구원을 또 베푸실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확실한 미래를 완료형태(과거)로 나타내는 히브리식 표현도 이런 데서 유래한 것이리라!

11. 다윗이 이렇게 기도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셨는지 삼상 23장을 찾아보자.

    블레셋 군대를 동원해서 사울이 물러가게 한다: 블레셋이 우연히 이 때에 침공한 것일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을까?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이 그러하기에 이것을 굳이 나누어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방인에게 우연처럼 보이는 것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손길을 보는 것이 성도다(왕상 22:34, 삼상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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