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53편


1. 이 시편에는 배경이 없다. 52편과 54편의 배경을 살펴보면 이 시편의 배경을 추측할 수 있단다.

    도엑의 밀고 사건(52편)과 십 사람들의 밀고 사건(54편) 사이에 있으므로 나발의 사건(삼상 25:2-38)과 관련된 것으로 보면 좋을 듯하다: 나발이 무식한 사람의 전형이니까(삼상 25:25)!

2. 하나님이 없다 하면 그걸로 끝이 아니다. 사람이 달라진다. 어떻게 달라질까?

    부패하여 악을 행한다. 선을 행할 수 없다(호 6:3, 눅 12:20): 부모를 모시고 사는 사람의 행동과 부모 없이 사는 사람은 행동이 다르다.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달라진다. 오죽하면 ‘애비 없는 자식’이란 말까지 생겼을까?

3. 하나님은 어떤 인생을 찾으시는가?

    하나님을 아는 자: 스스로 알 수도 없으니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계시하셨다. 그래도 알려고도 않고 찾으려고도 않으면 하나님도 더 이상 찾지 않으신다. 아이가 숨어 있는 곳을 알면서도 여기 저기 기웃거리며 ‘우리 애기 어디 있지?’ 할 때 웬만하면 ‘여기’ 하고 튀어나오는 것이 잘 하는 일이다. 애기가 아버지를 찾는 것이 아니라 엉뚱한 곳을 보고 있는 것 같아도 아버지가 애기를 찾은 것이다.

4. 인생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지각이(지혜가) 무엇일까?

    하나님을 찾는 것(2): 다른 것 다 가져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근시안적 안목) 아는 것이 아니다. 가진 것이 하나도 없을지라도 하나님을 알면(=거시적 안목) 모든 것을 가진 셈이다. 일시적인 것 다 가져도 영원한 것 한 조각에 비교할 수 없다. 곧 마를 저수지에서 붕어든, 잉어든 아무리 잘 나고 지혜로운들 그게 무슨 대수인가?

5.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인생이 정말 하나도 없을까?

    우리 인생은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계시하셔야 알 수 있게 되었다. 성경의 하나님은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시다. 인간이 만들어놓은 수 많은 신들의 이야기에는 신이 인간을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신을 찾아간다.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6.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는다는 것은 악한 자들의 어떤 태도를 말하는가?

    약한 백성들에게 악을 행하면도 자책하거나 미안하지 않는 것: 약한 자를 먹어치워도 전혀 미안하거나 부끄럽지 않다? 아니 오히려 즐거워할 것이다. 이게 갑질이다. 옛날에도 있었네!

7. 전혀 두려워할 일이 아닌데 두려워하는 일은 언제 생기는가(5)?

    보호자를 보지 않고 능력 없는 자신을 보기 때문이다: 보호자가 옆에 있는 것을 모를 때도 그렇다. 뛰어내리면 받아주려는 아버지가 있어도 아이는 뛰어내리지 않고 울기만 한다. 성 밖에 먹을 것이 지천으로 널려 있어도 성 안에서는 굶어 죽는다고 비명이다(왕하 7:12).

8. 하나님께서 대적을 버리셨는데 왜 네가 수치를 당하는가?

    하나님께서 버리신 자를 두려워하는 것은 죽은 개를 무서워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니 부끄러운 일이다. 아무리 강해보이는 대적이라도 하나님께서 치시기로 하셨다면 결코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그러실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지?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느냐 아니냐를 점검하는 수밖에 없다. 하나님 편에 섰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인도하심을 믿고 기꺼이 죽는 것이다.

9. 다윗의 글에서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란 말은 바벨론 유수를 가리키지 않는다. 그럼 언제 백성들이 포로가 되었는가?

    의인이 악인에게 억압당하는 것을 의미함: 다윗은 이런 경우를 많이 겪었다. 억울하게 사울에게 쫓긴 세월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셨다. 그 기쁨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잘 안다. 백성을 이렇게 회복시킬 분도 하나님 밖에 없다는 고백이다.

10. 이 시편은 14편과 거의 유사하다. 다른 부분이 어디인지 비교해 보자.

    5절이 많이 다르다: 53편이 더 자세하게 묘사한 셈이다. 여호와란 명칭이 사용되지 않은 점도 차이점이다. 7절도 좀 달라 보이지만 원문상으로는 거의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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