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44편


1. 본문의 단락을 다음처럼 나누었을 때 각 단락에 적절한 제목을 붙여보자.

    1-8: 과거에 대한 회고와 감사. 가나안 전쟁의 승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고백이다.
    9-16: 패전에 대한 수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떻게 이렇게 버릴 수가 있나?
    17-22: 언약에 대한 신실함. 굴욕적 패배가 억울하다. 패배를 당할 이유가 없다.
    23-26: 구원에 대한 간구. 궁극적 구원을 확신한다.

2. 본문의 내용을 과거, 현재, 미래로 정리해 보자.

    과거에는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승리했다(1-8). 현재는 하나님께서 버리셔서 대적에게 넘겨졌다(9-22). 그러나 미래에는 회복될 것이다(23-26).

3. 우리 조상들의 날 곧 옛날(1)은 어느 때를 가리키는가?

    가나안 정복 전쟁 때: 요단을 걸어서 건너고 여리고를 돌기만 해서 무너뜨리며 하나님께서 우박을 동원해서 적을 치고 해와 달이 원수를 다 치기까지 운행을 중단하던 때를 가리킨다. 어려울 때는 지난 날의 은혜를 뒤돌아보는 것이 큰 위로가 된다. 후손들이 이렇게 은혜를 누릴 수 있도록 잘 전해주어야 한다(출 10:2, 신 6:2, 욜 1:3).

4. 우리 조상들을 이렇게 인도하신 하나님은 마치 어떤 사람과 같은가?

    농부: 잡초와 돌을 제거하고 씨앗을 심어 뿌리내리게 하고 번성케 한다. 농부의 수고를 자세하게 묘사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농부의 수고를 다하여 우리 조상들을 번성케 하셨다는 고백이다.

5. 우리 조상들이 뭇 백성을 쫓아내고 이 땅에 뿌리를 박고 번성하게 된 것(2)은 누구 탓인가?

    조상들의 능력이 아니라 주께서 하신 일이다(3). 주께서 왜 우리 조상들을 기뻐하셨을까? 우리 조상들에게 특별한 이유가 없다.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다(신 7:7-8, 9:5-6, 10:15, 삼상 12:22).

6. 4절은 직역하면 ‘당신은 그 분, 나의 왕, 하나님이십니다’로 우리말에 번역되지 않은 ‘그’라는 표현이 들어있어서 하나님께서 왕이 되신다는 사실이 아주 강조된 표현이다. 또, ‘베푸소서’라는 말은 대체로 ‘명령하소서’라고 번역되었다. 조상들에게 베푸신 놀라운 은혜를 생각하면서(1-3) ‘당신이야 말로 나의 왕이십니다’라는 것과 ‘구원을 명하소서’라는 바탕에는 무슨 생각이 깔려 있는가?

    자신들이 당한 어려운 난국을 명령 한 마디로 해결하실 수 있다는 믿음과 기대가 깔려 있다: 가데스바네아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했다가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한 조상들과는 달리 자신들에게는 명령만 하시면 기꺼이 순종함으로 이 모든 대적들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다.

7. 조상들의 이야기를 회고하면서 시인은 무엇을 깨달았는가?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는 것(5)과 우리의 힘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6): 주의 이름으로 나아갈 때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된다. 주의 이름에는 주의 능력이 있다(신 28:10, 삼상 17:45, 렘 10:6, 눅 10:17, 요 16:23-24, 행 3:6, 4:10). 그것을 믿을 때에야 내 것을 내려놓을 수가 있다(삿 7장의 기드온의 군사 줄이기, 수 11:9, 삼하 8:4의 말 뒷발의 힘줄 끊기).

8. 7-8절은 미래의 얘기인가, 현재, 혹은 과거의 얘기인가?

    미래에 대한 확신이다: 확실한 미래를 과거형으로 표현한 것이다.

9. 8절에서 ‘종일’의 동의어는 무엇인가?

    영원히: 자랑은 종일하고 감사는 영원히? 둘 다 영원히 하겠다는 고백이다.

10. 1-7절이 과거라면 9-16절은 현실이다. 과거와 현실이 얼마나 다른가?

    과거는 승리와 자랑이었지만 현실은 패전과 수치다. 과거에는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며 이기게 하셨지만 이제는 하나님께서 사라지셨다.

11. 하나님께 버림받은 이스라엘의 상태는 비유컨대 무엇과 같은가(9, 11, 12)?

    장군 없는 군대(9), 목자 없는 양(11), 헐값으로 처분하는 물건(12, 장사꾼의 떨이). 그 외에도 조롱거리(13), 이야깃거리(14)가 있다.

12. 이스라엘을 미워하는 자가 자기를 위하여 탈취하였단다(10). 가장 대표적인 예가 누구인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유다를 침공해서 성전의 기명까지 다 가져갔다(대하 36:7). 이스라엘이 결백을 주장하는 것을(17-18) 참고로 한다면 히스기야 시대의 일, 그 중에서도 앗수르의 2차 침공(왕하 19:1-37) 때의 일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히스기야는 앗수르에 의해 북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애굽과 동매을 맺었다가 앗수르의 침공을 받고 수모를 당한다(왕하 18장), 그 후에는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만 의지하기고 했는데 2차로 침공을 받았다.

13. 하나님께서 수치와 조롱을 당하게 하셨다고 하면서도 무엇이라고 항변하는가?

    결백을 주장함(17-18, 20): 하나님을 잊은 적도 언약을 어긴 적도 없으며 주의 길을 떠난 적도 없단다. 정말 특이한 주장이다. 이 주장은 실제로 이스라엘의 전역사와는 맞지 않는다. 아마도 히스기야가 2차 침공을 당했을 때라면 어느 정도 말이 된다. 궁극적인 구원에 대한 확신과 간구의 다른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박국의 항변이 어느 정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설령, 이 말이 옳지 않다고 해도 하나님의 백성은 끝까지 이래야 한다.

14. 잘못한 것도 없는데 하나님은 자신들을 어디에 던지셨는가?

    승냥이의 처소에 던지고 사망의 그늘로 덮으셨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믿는다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시 23:4)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15.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리지 않았다니? 그게 뭐 그리 어렵다고 자랑인가?

    예배를 드리지 않은 적이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예배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구원을 얻으리라! 단순히 소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방 신에게 손을 폈다는 것이(20) 이방 신을 숭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16. 이유 없는 고난을 당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무엇이라고 항변하는가? 20-22절을 아주 간단하게 줄여보자.

    ‘다 아시면서 왜 이러십니까?’ 라고 하는 셈이다.

17. 22절은 롬 8:36에 인용되었다. 두 본문의 문맥을 비교해 보고 도살할 양과 같은 존재는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지 생각해 보자.

    현실은 절망적이지만 하나님께서 계시니 절망할 수 없다. 본문은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하지만 로마서 본문은 오히려 감격스러움으로 이어진다. 예수 그리스도의 도살이 부활과 승천으로 이어진 것을 보라.

18. 우리에게 이런 비참함이 임한 것은 주께서 주무시거나(23) 얼굴빛을 가리시기 때문(24)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깨워야지: 이해할 수 없는 위기의 해결책은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신속하게 이 문제에 개입해달라고 요청하는 수밖에 없다. ‘깨소서, 일어나 도우소서, 구원하소서’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다.

19. 자신들을 버린 하나님을 향하여 결국에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구원을 요청함: 결코 자신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에 이렇게 간구한다. 조상들과 맺은 언약에 근거하여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하는 것이다.

20.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기본 자세는 무엇일까? 고압적으로 공갈치면 들어주실까? 무조건 고집을 부리면 될까?

    겸손하게 낮아지는 것(25, 참고 신 9:18, 대하 20:18): 철이 없을 때는 부모에게 공갈도 치고 고집도 부릴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면 우리는 그 앞에 낮아질 수밖에 없다. 국가적 재난을 당하여 여호와 앞에 스스로 낮추는 것이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최선의 길이다(왕하 19: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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