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40편 |
감사(1-10)에서 탄식(11-17)으로: 일반적으로는 탄식하며 슬퍼하다가 구원에 대한 감사로 이어지는데 여기서는 찬양이 먼저다. 그래서 비평가들이 두 개의 별도의 시였는데 하나로 편집한 것이라고 주장했단다. 조금만 이상하게 보이면 편집이라고? 그렇다면 편집자의 실력을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닌가? 2. 지금은 이렇게 찬송하지만 어떤 어려움에 빠져 있었는가?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 빠져 있었다: 자신의 힘으로는 빠져 나올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있었다는 것이다. 웅덩이와 수렁을 문자 그대로 생각하는 수도 있겠지만 고통과 질병에 대한 비유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여기서 건지셔서 두신 곳 반석이 비유인 것과 마찬가지다. 3. 웅덩이와 반석이 대조라면 수렁은 무엇과 대조를 이루는가? 걸음을 견고하게 함: 수렁에서는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더 빠져 들어간단다. 4.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사람은 왜 새 노래를 부를까(사 42:10, 계 5:9)? 알맞은 노래가 없어서: 이전의 어떤 노래에도 어울리지 않는 기가 막히는 방법으로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찬송을 듣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더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 새 노래가 곧 새로운 간증인 셈이다. 5.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 셀 수도 없이 많다고? 주의 생각이 많은 것은 또 어떻게 알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눈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이다: 예수님과 3년을 함께 지냈던 요한의 고백을 보라(요 21:25).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로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것이 우리 하나님의 사랑 얘기다(찬 304).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복되다(71:15). 파란만장한 삶을 살면서도 하나님을 한 순간도 잊지 않았던 다윗이기에 이런 고백이 가능할 것이다. 6. 레위기의 제사법을 통해서 제사할 것을 명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다윗은 “주께서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는 말을 들었단다. 잘못 들은 것 아닐까? 제사 제도를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제사의 참 뜻이 무엇인지 알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이나(삼상 15:22), 무수한 제물에 배가 부르다(사 1:11-12)는 하나님의 비명도 이해가 된다. 하나님께서 진짜 원하시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순종(8)이라는 것이다. 7.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6)가 각각 다른 것이라면 제사와 예물 의미하는 것이 뭘까? 아마도 감사제? 제사(제바흐)는 ‘피를 드리는 제사’를 의미하고 예물(민하흐)은 ‘피 없는 제사’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이 두 단어는 모든 종류의 제사를 다 포함한다. 8. 제사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시인은 무엇이라고 대답하는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 7-8절을 정돈하면 ‘나에 대하여 율법에 기록한 대로(7), 주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기 위하여(8) 제가 여기 대령하였나이다.’ 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다음 많은 무리 가운데서 선포하였다(9-10). 9. 6-9절은 아무래도 다윗보다는 다른 어느 분의 말씀이라고 해야 어울릴 것 같지 않은가? 하나님께 아뢰는 예수님의 말씀 같다: 히 10:5-7절은 시 40:6-8의 간접인용(변형)이다. 주님의 법에 대한 다윗의 성실성을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사건에 적용한 것이다. 구약을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일부를 삽입하거나 변형한 이유는 율법의 준수가 최대 과제인 구약적 상황의 시편을 그림자에 불과한 율법보다는 실체인 예수를 중요하게 여긴 신약적 상황에서 재해석하였기 때문이다. 다윗의 진실한 고백이 자신도 모른 채 예수님의 고백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10. 다윗은 말로 할 수 없는 많은 은혜를 체험했다. 그것을 묻어두지 아니하고 선포하고 전했다(9-10). 왕이 전도자의 삶을 살면 어떻게 되나? 온 백성이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래서 다윗의 시대가 더 빛이 나는 것이다. 사단장이 정복을 입고 군대교회에서 병사들을 섬긴다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그걸 보면 그리스도인이 진급을 하고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11. 구원의 기쁨을 노래하다가 갑자기 탄식과 저주가 나온다. 이런 시인의 모습의 우리의 삶에서도 볼 수 있는가? 아주 흔하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다가 곧 불평과 불만이 나온다. 그러다가 곧 또 돌이키고... 이런 것을 반복하는 것이 우리 인생 아닌가!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이 좋은 예다. 환경의 변화보다는 우리 자신이 변화되어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환경이나 대적자들은 우리 평생에 완전하게 사라지지는 않는다. 12. 다시 터져 나오는 다윗의 기도를(11-17) 둘로 구분해 보자. 영적침체에서의 구원 요청(11-13), 원수들로부터의 구원 요청(14-17) 13. 이렇게 기도하기 전에 구원의 감격을 누리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표현은 무엇인가? 주의 긍휼을 거두지 마시고, 항상 보호하소서(11), 낙심하였음이니이다(12). 14. 스스로 침체에 빠지기도 하지만 대체로 그 원인이 있게 마련이다. 다윗이 이런 영적침체에 빠진 원인을 무엇이라고 고백하는가? 자신의 수 많은 죄악: 무슨 죄가 그리 많았는지 모르지만 다윗의 경우에는 밧세바와의 관련된 범죄일 것이다. 그로 인해 징계가 임하고 대적들이 등장하여 목숨을 노리고 조소하는 것이다. 15. 두 종류의 ‘찾는 자’가 있다. 어떤 사람인가? 내 생명을 찾아 멸하려는 자와 주를 찾는 자: 전자는 수치와 낭패를 당하게 하시고, 후자는 주 안에서 기뻐하게 해달라고 간구한다. 진정한 승리자는 주를 찾는 자다. 16. 다윗이 가난하고 궁핍하다고? 하나님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이 그렇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권력이나 부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존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모습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란 뜻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