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5편


1. 링컨이 그랬다던가?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기를 바라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의 편이 되자. 본 시편에서 개인적인 원한을 풀어달라는 다윗은 링컨보다 못 하네? 다윗을 위해서 무엇이라고 변명해줄까?

    개인적인 원한을 풀어달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시켜 달라는 것이다. 다윗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다. 그러하기에 개인적인 일처럼 보이는 것조차 하나님의 대리인이라는 공적인 일을 수행하는 것이다.

2. 다윗을 이렇게 억울하고 원통하게 만드는 대적은 사울이라고 본다. 다윗의 수 많은 시가 사울로 인한 고통 가운데 만들어졌다면 사울의 이유 없는 박해가 다윗을 제대로 된 시인으로 만들었네! 이건 사울의 공로인가?

    사울의 택도 없는 짓이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고 해서 사울이 칭찬 들을 이유는 하나도 없다. 그릇된 동기에서 비롯된 선한 결과는 하나님의 은혜일 수는 있어도 자신의 공로가 될 수는 없다.

3.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에도 사울을 죽이지 않았던 다윗이 하나님께서 사울을 이렇게 심판하시라고 했을까?

    다윗이 자신이 사울을 죽이지 않으려고 했을 뿐이지 사울에게 섭섭하거나 미운 감정이 전혀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 감정을 억누르고 신앙적인 생각을 실천했다는 것이 놀라운 것이다. 억울하게 비난 했던 시므이를 아무런 감정도 없이 용서한 것이 아니다. 죽을 때 솔로몬에게 시므이를 그냥 두지 말라고 당부했다(왕상 2:8-9).

4. 하나님도 방패와 창을 들고 싸우시나?

    아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묘사하는 것을 신인동형론이라고 한다. 하나님을 인간에 비유한 것인데 성경은 이런 방식을 많이, 아주 많이 사용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도구를 써서 하나님을 설명하려다보니 그렇게 되었을 뿐 하나님을 인간과 동일한 것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5. 다윗이 대적에게 쫓길 때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기를 기대하는가?

    하나님께서 창을 빼들고 ‘짜잔’ 하고 나타나셔서 ‘나는 네 구원이라’ 하시며 대적을 막는 것: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영화에서는 갑자기 대적을 가로 막고 아무 말 없이 대적과 싸우던데? 그게 더 멋이 있던데? 아니면 ‘여기는 내가 맡겠다, 먼저 가라’?

6. 다윗의 생명을 찾다가 수치를 당한 자가 있는가?

    사울: 자기는 다윗을 죽이려하는데 다윗은 자기를 죽일 수 있음에도 살려 보냈으니 정상이라면 다시는 다윗 앞에 나타나지도 못할 것이다.

7. 다윗을 상해하려다가 낭패를 당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누구일까?

    아마도 시므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얼마나 놀랐으면 제일 먼저 달려와서 용서를 구했을까?

8. 다윗이 생각하는 대적자의 말로는 어떤 것인가?

    바람 앞의 겨, 어두운 길에서 미끄러지며 방황하는 자: 무가치하고 도울 자가 없고 갈 바를 알지 못할뿐더러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대적의 상황을 보고 있다. 자신을 해하려고 용감하게 덤비는 현실 너머 천사를 통해서 역사하실 때의 모습을 보며 두려움 없이 용기를 내는 것이 성도의 복이다.

9. 그물을 왜 웅덩이에 숨길까?

    짐승을 잡는 방법 중의 하나다: 웅덩이를 그물로 덮고 그 위를 다른 것으로 덮어서 짐승이 웅덩이에 빠지도록 하는 것이다.

10.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징벌하시는 방법 중에는 ‘행한 대로’ 라는 원칙이 있다. 다윗의 간구 중에 어떤 표현이 그런가?

    자기가 숨긴 그물에 자기가 잡히게 하시라는 것(8): 모르드개를 해하려던 하만이 가장 대표적인 경우다. 행한 대로 외에 갑절로 라는 원칙이 하나 더 있다.

11. 대적들이 정말 고약한 점은 무엇인가(2가지)?

    까닭 없이(7), 선을 악으로 갚는 것(14-15): 둘 다 견디기 어려운 심적 고통을 안기는 것이다.

12. 대적에게서 건짐을 갈구하던 다윗이 갑자가 태도가 돌변하여 소리 높여 하나님을 찬양한다(9-10). 너무 갑작스런 변화 아닌가?

    성도의 삶에는 이런 일이 흔히 일어난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상황을 전혀 다르게 변화시켜버리거나 현실만 보고 있다가 시선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순간에 생기는 현상이다. 죄수에서 총리로(요셉), 죽음에서 생명으로(홍해 앞의 이스라엘, 베냐민의 귀환을 기다리던 야곱), 동족의 장래에 대해서 근심하던 바울(롬 (9-11장), 예수 부활의 소식을 들은 제자들...

13. 입으로 찬양할 수도 있고 몸으로 찬양할 수도 있는데 다윗을 뭘로 찬양을 하는가?

    모든 뼈(10): 온 몸과 마음으로 찬양한다는 표현보다 더 강한 느낌을 준다. 고난을 당해서 부러질 수도 있던 뼈(34:20), 혹은 뼈만 남긴 채 사라질 수도 있었던 위기와 대조적이다.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던 이스라엘에게 홍해가 열린 것만큼이나 감격스런 느낌을 표현하는 셈이다.

14.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다고? 병든 자를 위해서 진심으로 기도했었는데 그들이 오히려 나를 해치려한다. 그런데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다?

    타인을 위한 기도가 그 대상자에게 적합하지 않을 때 기도한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 타인을 위해서 평안을 빌면 그 평안이 평안을 빈 사람에게 되돌아오는 것과 같은 이치다(마 10:13, 눅 10:6). 정말 억울한 순간에도 전혀 억울할 이유가 없는 이유다. 그들에게 베푼 은혜를 하나님께서 다시 내게로 돌리셨으니!

15. 불의한 증인이 내게 질문한다는 것은 어딘가 어색한 표현이다. 말이야 맞지만 느낌이 이상하다는 것이다. 느낌을 살린다면 ‘질문’을 어떻게 바꿀까?

    힐문(개정), 비난: 재판정에서 거칠게 비난하며 묻는 것을 의미한다.

16. 다윗을 치는 일에 웬 불량배가 끼어드는가?

    배신한 친구나 형제들을 일컫는 말이다(원어상, 치는 자, 때리는 자): 다윗의 대적은 다윗이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어려울 때 도와준 친구나 형제 같은 자들이 말로 치며 찢는 것이다.

17. 다윗에게 있는 유일한 것이 뭘까(17)?

    영혼: 앞의 표현과 평행구절이다. 결국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영혼이라고 말하는 것은 육체보다 영혼이 중요하다는 사상의 발로다.

18. 부당하게, 까닭없이, 거짓말로 모략하며 증언하는 자들에게 다윗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호소할 뿐이다(17, 19-27). 하나님께서 공의로 심판하시길 바랄뿐 자신의 감정이나 분노를 드러내지 않는다. 내 맘 같지 않은 세상(14-16)을 향해서 분노해봐야 분노만 더 커질 뿐이다. 오히려 하나님께 기도하고 감사하며 찬송하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비결이다(17-18).

19. 다윗은 구원의 기쁨을 어디서 표하는가?

    대회 중에서(=많은 백성 중에서): 다윗의 구원이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문제라는 것이다.

20. ‘서로 눈짓한다’는 것(19)이 무슨 의미일지 평행대구법을 근거로 생각해 보자.

    승리의 기쁨을 나누는 것: ‘부당하게 나의 원수된 자’가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들’과 평행구절이니까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이 ‘서로 눈짓하는 것’과 평행을 이룬다. 못된 짓을 해서 이기면 크게 소리 내지 않고 몰래 눈짓만으로 기쁨을 나눌 수밖에 없다. 나중에 아무도 없는 곳에서 크게 소리 내어 기뻐하겠지만.

21. 다윗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원수들로부터 구원받는 것이다. 그러니 원수들을 멸하시라는 것은 당연하다(19, 24-26). 그러나 다윗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서 무슨 소원을 말하는가?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나고 여호와는 위대하시다는 찬송이 불려지기를: 자신의 구원이 곧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결과라는 이런 자신감을 성도들도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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