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4편


1. 앞에서도 22절짜리 시가 여러 개 있었는데(9+10, 25, 33) 이 시편도 22절짜리다. 이유가 같을까?

    같은 이유(알파벳 시)다.

2.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다 지쳐서 블레셋으로 일종의 망명을 갔는데 거부당한 셈이다. 블레셋 왕 아기스의 신하들이 다윗을 죽이려 하자 미치광이 행세를 해서 간신히 탈출했다(삼하 21:10-15). 자기 꾀로 위기를 탈출한 것인가, 하나님께서 구해주신 것인가?

    여호와께서 건지셨다고 고백한다(4): 자기의 노력이 빛을 발하도록 해주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다. 자기의 꾀만으로 일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다윗은 확실히 알았기에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이다. 최선을 다 하고도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아는 것이 진짜 지혜다.

3. 삼하 본문에는 가드 왕이 아기스인데 왜 여기서는 아비멜렉이라고 할까?

    아비멜렉은 관직이고 아기스는 개인 이름이다: 아브라함이 만났던 왕이 아비멜렉인데(창 20장) 먼 훗날 이삭이 만나는 왕도 아비멜렉이다(창 26장). 동일인이 아니다. 동일 직책을 가진 다른 사람이다.

4. 다윗에 따르면 찬송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광대하심(3), 구원(4, 6), 보호(7), 부족함이 없을 것이니(8-10): 하나님의 어떤 행하심보다 그 분 스스로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할 만큼 광대(위대, 무한)하시니 찬양해야 한다. 그런 분께서 자신을 구원하시고 보호하시니 더 더욱 찬양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5. 찬송하는 것을 몇 가지 단어로 표현하는가(1-3)?

    4가지(송축하고, 찬양하고, 자랑하고, 높이는 것): 동일한 내용을 표현하는 단어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발달했다는 의미다.

6.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며 아비멜렉에게 죽임을 당할 뻔한 이런 위험한 일을 한두 번 겪은 것도 아니며 일, 이 년 쫓긴 것도 아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 세월이었을까?

    전적으로 두렵고 고통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고 고백한다(4, 6, 8-10): 모든 두려움과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고 복이 있었고, 부족함이 없었단다. 객관적인 상황은 죽음과 한 걸음 밖에 안 될 정도였지만(삼상 20:3) 그 모든 고통(시 40:2)을 이길 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고백이다.

7. 하나님께서 다윗을 건지셨다고 하지만 현실은 계속해서 도망 다니는 상황이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마음이 원통한 400명(삼상 22:2), 혹은 600명(삼상 23:13, 25:13, 27:2)이나 되는 식솔을 거느린 채 말이다. 이들도 다윗처럼 두려움과 고난에서 구원을 받았을까?

    동일한 은혜를 누렸다고 보아야 한다: 5절의 ‘그들이’ 바로 이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같은 은혜를 누리고 같은 고백을 하지 않는다면 그 긴 세월을 함께 지낼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다윗과 같은 수준은 아니었을 수는 있지만(삼상 30:6).

8. 주를 앙망하고(바라보면) 광채를 낸다? 차라리 주를 앙망하면 광채가 난다고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개역은 ‘광채를 입었으니’)? 왜 광채일까?

    하나님께서 빛이시니 그 분을 향하면 그 빛이 반사되게 마련이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시기 때문에 극한의 고통 가운데서도 얼굴이 어두울 수 없다. 범사(고통 가운데서라도)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다.

9. 다윗이 친히 구원한 그일라 백성마저 다윗을 돕지 않았고(삼상 23:12), 나발마저 우습게 여길 만큼(삼상 25:10) 다윗은 연약한 존재였다. 그래도 600명의 군사가 있었지 않은가?

    아니다, 그를 둘러 진 친 여호와의 천사가 있었다: 다윗이 진정으로 의지한 것은 바로 여호와였다. 그의 군사 600명은 흔히 하는 말로 오합지졸 중의 오합지졸이었다. 갈 곳이 없어서 도망 온 사람들이었다(삼상 22:2). 얼마나 힘들었을까? 눈에 보이지 않는 여호와의 천사가 그를 보호하였기에 안전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10. 여호와의 선하심을 어떻게 맛을 보지? 맛을 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먼저 맛을 본 사람이다.

    다윗처럼 하면 된다: 간구, 앙망, 부르짖음, 그에게로 피함(찾음), 경외함, 이것이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본 다윗의 방법이었다. 12절에서 가르치려고 하는 여호와 경외하는 법도 마찬가지다.

11. 젊은 사자가 궁핍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젊은 사자란 힘센 맹수라는 의미도 가능하지만 어미를 의존하고 있는 어린 사자란 의미도 가능하단다. 다윗이 의지하고 있는 하나님은 어린 사자가 의지하고 있는 어미 사자보다 더 확실하게 자신을 지키시고 돌보신다고 고백하는 셈이다.

12. 하나님께 피하는 자는 부족함이 정말 없을까(9, 10)? 다윗은 언제부터 하나님께 피하였으며 언제부터 부족함이 없었을까?

    가장 어려웠을 때도 하나님께 피하였다. 그 때도 부족함이 없었다는 고백이다(19): 가시밭길을 걸으면서도 부족함을 느끼지 않았다는 말인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가면서도 부족함이 없었다고 고백하는 것(시 23)과 같다.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죽이지 않는 것은 그의 이런 고백이 진실하다는 증거다. 비록 역경 가운데서도 주의 도우심과 구원을 확신하는 것(19)은 모든 것을 현재 소유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도통한 수준의 얘기다. 진정한 득도는 이런 것이다.

13. 생명을 사모하(=장수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기에 생명을 사모하라는가?

    여기서 생명은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특별한 생명, 즉 영생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오래 오래 누리기를 사모하라는 말이다.

14. 다윗이 가르치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법은 무엇인가?

    생명을 사모하고 연수를 사랑하고 혀와 입술을 금하고,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르는 것 = 영원을 사모하고, 말을 정결케(잠 18:21, 약 3:2) 하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15. 여호와를 경외해야 할 이유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복과 심판이 그 분에게 있기 때문(12, 15-17):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말과 부르짖음을 다 듣고 계실 뿐 아니라 결국은 구원하실 것이지만 악을 행하는 자도 절대로 그냥 버려두시지는 않는다.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다는 고백(31:15 개역)이나 마찬가지다.

16. ‘마음이 상한 자’는 직역하면 ‘마음이 산산이 부수어진 자(broken)’이며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는 ‘두들겨 맞은 마음을 가진 자(crushed)’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가까이 하시고 구원하시는 두들겨 맞아 산산이 부숴진 마음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회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각이 떠져야 하고 곡식이라면 가루가 되어야 하고 열매라면 기름이 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17. 의인은 많은 고난 가운데서도 건져주신단다(19). 다 죽어 가는 의인을 어떻게 보호하시는가?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않도록(20): 죽지 않게, 평화롭게 살도록 지켜주셔야지 이게 무슨 보호인가? 아무리 의인이라도 하나님의 뜻하심에 따라 죽을 수도 있다고 고백하는 셈이다. 죽을지언정 그것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벗어난 것이 아니라는 고백인데 다윗의 이런 도통한 고백이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설명하는 것이다(요 19:23). 우리는 이런 것을 성령의 감동이라고 한다.

18. 의인의 뼈는 정말로 부러지지 않을까?

    뼈 자체라기보다는 몸을 지탱하는 기본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비유다. 의인에게도 고난이 많은 게 현실이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기초까지 흔들리지는 않게 하신다. 고난 가운데서 다윗도 많은 근심과 번민을 겪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모르긴 몰라도 단 한 순간도 하나님을 잊지 않았다는 고백이다.

19. 하나님을 찬양하자! 여호와께 피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 경외하는 법을 가르치겠다. 다윗이 이렇게 노래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여호와께서 속량하시니(22): 악인은 그가 행한 악으로 말미암아 죽을 것이고 벌을 받을테지만 여호와께 피하는 자는 속량을 받을 것이다. 다윗이 긴긴 고난의 세월을 돌아본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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