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9편


1. 하나님은 모든 곳에 존재하신다. 그러므로 사람이 무엇을 전공하든지 깊이 파고 들어가 보면 그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감격하게 된다. 사람마다 여호와의 위대하심을 발견하는 과정이 다를 수 있다. 시인은 어디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발견하고 찬송하는가?

    소리: 천둥치는 소리 가운데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았던 모양이다. ‘여호와의 소리’가 7번이나 반복된다. 해와 달을 보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노래한 19장과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가 있겠다.

2. 왜 하필이면 권능 있는 자들에게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라고 할까?

    제 아무리 능력이 많은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어떤 존재보다 뛰어나시다는 것이다. 아무런 능력이 없는 자가 그러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3. 아버지라고 부르면서(=아버지를) 아버지로 대우하지 않으면 정말 나쁜 자식이다.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부르면서 그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정말 나쁜 놈이다. 왜 그렇지?

    여호와라는 이름이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하신 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모셔야 한다: 스스로 계시는 분이라고 스스로 계시하셨다(출 3:14). 전능하신 창조자보다 더 위대한 이름이다.

4. 예배하기 전에는 무엇을 입어야 하는가?

    거룩한 옷(2): 여기서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의 복장을 가리킨다. 오늘 우리도 이런 외형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것은 곤란하지만 진정한 거룩은 성도의 행실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계 19:8).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섬기기 전에 제사장 복장을 챙겼다면 오늘 우리는 우리의 행실을 돌아보아야 한다(롬 13:14).

5.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다. 무슨 물인가?

    구름: 우렛소리와 관련지어 보면 그렇다. 고대에 천둥소리는 신의 노여움으로 인식되었다(이게 자연 현상이라고 깨닫게 된 것이 그리 오래 되지 않는다). 그런데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렸다. 위엄에 가득 찬 소리지만 두려운 것이 아니라 예배하려는 마음만 불러일으킨다.

6. 소리에 백향목이 꺾어져 사방으로 튀어오른다(5-6). 거기다가 화염에 진동까지 수반된다. 무슨 소리가 이렇지?

    단순한 천둥소리가 아니라 번개, 벼락, 폭우, 홍수까지 동반한 모습이다: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할 듯한 모습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평강을 누리고 있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는다면 어디서든 평강할 수밖에!

7.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묘사하는 방법으로 과장법을 쓰고 있다. 어느 부분이 가장 과장스러운가?

    레바논과 시룐으로 들송아지 같이 뛰게 하심(6): 레바논도 온통 산악지대지만 시룐은 헤르몬 산을 가리킨다. 여호와의 소리에 산들이 뛰놀더라는 것이다. 가데스 광야는 유다의 남쪽지역이다. 이것도 과장법이다. 북쪽 헤르몬산에서 남쪽 가데스까지 뛰놀고 진동한다는 것은 전국토가 요동을 쳤다는 말이다. 그 와중에 암사슴이 낙태를? 이것은 유머다.

8. 천둥, 번개, 벼락, 폭우, 홍수 속에서 발견한 하나님 모습을 보면 인간 뿐 아니라 그 어떤 피조물이 할 수 있는 것이 뭘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9b).

9. ‘홍수 때 좌정하셨다’는 것은 바로 다음의 ‘왕으로 좌정하셨다’는 것은 같은 의미다. 그러면 홍수가 무슨 의미가 되는가? 방석?

    대적에 대한 심판: 왕이 좌정하시면 통치가 이루어진다. 상을 줄 자에게 상을 주고 벌을 줄 자에게 벌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좌정하시면 교만한 자에게는 심판이 자기 백성에게는 힘과 평강이(11) 임한다. 홍수가 심판이라면 레바논의 백향목이 꺾어지는 것도(5) 같은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다윗이 고난 가운데(11절을 역으로 읽으면 힘이 빠진 상태), 굴에 피해 있으면서 쏟아지는 폭우와 뇌성 가운데서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을 보았을 것이다.

10. 고대인들은 자연 만물 속에도 신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자연을 대상으로 실험하고 연구할 수 없었다. 그런데 무서운 천둥, 번개, 벼락, 폭우, 홍수 속에서 시인은 힘을 얻고 평강을 누린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자연만물도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신다는 믿음 때문이다: 근대에 들어오기까지 자연 만물을 상대화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반면에 다윗은 그 옛날에 자연만물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문제라는 것을 고백한다. 하나님의 손에 잡힌 것은 그 무엇이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힘이 되고 평강의 도구가 된다.

11.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며 형통케 하셨다고 한다(창 39:2, 3, 23). 그러면 종으로 팔려가지 않게, 감옥에 들어가지 않게 해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 본문에서 이 질문에 답을 찾는다면?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시고, 평강의 복을 주신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방법이 우리의 생각과 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환경이나 처지가 확 바뀌기를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흔들리지 않기를 원하신다. 어려운 고비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시고 그런 가운데서 평강으로 이끄신다. 환경이나 형편이 바뀌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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