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6편


1. 다윗은 현재 모습은 어떠한가?

    대적에게 쫓기면서도(1, 9-11의 역) 하나님의 훈계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양심의 교훈을 거부하지 않는다.

2. 다윗은 미래에 대해서 어떤 확신을 가지고 있는가?

    기쁘고 즐겁고 안전하다.

3.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나이다(2). 이건 완전한 사랑고백이다. 4절을 참고하면 다윗의 사랑은 어떤 것인가?

    일편단심: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들이 다윗을 유혹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오직 주님만 섬길뿐 결단코 다른 신을 섬기거나 심지어 이름도 부르지 않겠단다.

4. 땅에 있는 성도들이 왜 존귀하지?

    2절과 동일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고백이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들과 상종하지 않는 대신 하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성도들과 함께 즐거워하겠다는 의미다. 이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의미다.

5. 다윗 주위에 다른 신에게 예물 드리는 자가 있었다면 틀림없이 혼합주의자다. 하나님도 섬기고 다른 신도 섬겼다는 말이다. 여러 신을 섬기는 것이 왜 괴로움을 더하는 일일까?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신이란 신에게 모두 제사를 드리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긴 하다. 그것은 어느 신이 올바른 신인지 알지 못한 탓이다. 결국 어느 신도 섬기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수 많은 신을 섬기면서도 혹시 빠진 신이 있을까 싶어서 ‘알지 못하는 신’을 숭배하던 아덴 사람들(행 17:23)에게는 신을 섬기는 즐거움 대신 잘못하면 심판을 당한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6. 산업과 소득은 삶의 기반이다. 다윗은 왜 ‘여호와께서 자신의 산업이요 소득이라’고 할까?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기 때문: 다윗이 무슨 산업을 일으키고 어떤 소득을 얻든지 지킬 수 없다면 아무리 많은 것을 얻어도 소용이 없다. 얻게 하시는 이도 여호와시요 지켜주시는 이도 여호와시다.

7. 다윗은 하나님께서 줄로 재어준 구역에 살았단다(6). 얼마나 아름다운 곳이었을까?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고 사는 삶이 아름다운 것: 이런 삶은 어떤 곳 어떤 형편에서도 아름다운 것이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는 찬송을 기억하자.

8. 밤마다 양심이 교훈한다고? 양심의 교훈이 여호와의 훈계인가? 여기서 ‘양심’이라고 번역된 말은 ‘심장, 마음, 속내’로 번역되기도 했다. 원래는 콩팥(감정을 주관하는 기관으로 간주되었음)을 가리킨다(출 29:13). (개정성경은 의역을 한 셈이다.) 그러면 양심의 교훈이란 하나님께서 내 속에서 역사하시며 주시는 교훈이라는 의미가 된다. 양심이나 심장이란 단어에 그리 주목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밤마다 교훈을 주시지?

    항상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 아니면 어려운 때를 의미하거나! 곤고한 지경에 빠질 때마다 하나님께서 교훈을 주셨다? 다윗의 생애를 보면 이런 해석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9. 여호와를 앞에 모시는데 왜 오른쪽에 계시지(8)?

    두 가지 표현이 다른 뜻을 지닌 상징이기 때문이다: 앞에 모시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며 순종한다는 뜻이고 오른 쪽에 계신다는 것은 가까운 곳에서 그 분이 나의 능력이 되신다는 뜻이다(121:5). 그러니 흔들릴 이유가 없다.

10. 하나님을 모시고 그 분의 훈계를 따라 사는 다윗은 마음도 영도 육체도 즐겁다(9). 사람의 구성요소는 3가지인가?

    영과 육체, 두 가지다: 마음은 즐거운데 육체가 괴롭다거나 육체는 건강하게 필요한 게 충분한데 마음이 불편해도 진정한 기쁨을 누리기는 어렵다. 9절의 ‘영’이라고 번역된 말은 ‘영광’이란 뜻인데 ‘마음’과 평행대구를 이루는 말이다. 역본에 따라 ‘영광, 넋, 영혼’으로 번역하거나 빼버리기도 했다.

11.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주의 거룩한 자를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란 말로 익숙한 표현이다. 이 말씀이 어디에 어떤 용도를 쓰였기에 익숙하게 들릴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예언으로 인용되었기 때문이다(행 2:25-29, 13:35). 개역개정판은 여기서는 기존의 ‘썩지 않게 하실 것’을 ‘멸망시키지 않으실’로 고쳐놓고 이 구절을 인용한 신약의 두 곳에는 그대로 ‘썩지 않게’로 그냥 두었다. 부활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게 정립되어 있지 않았던 구약의 인식과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신약시대의 시각차를 반영한 걸까?

12.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주께서 지켜주시기를 기도하던(1) 다윗의 결말은 어떠한가?

    온통 기쁨(5-6, 9, 11)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8, 10)으로 가득 찼다. 더구나 자신의 장래에 대한 기쁨과 확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었다(행 2:25-29). 대적으로 말미암은 고통의 기도가 이런 놀라운 결말로 이어질 줄은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오늘 믿음으로 행한 작은 순종이 훗날 얼마나 큰 복으로 화할지 하나님만 아신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성도만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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