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편 |
나는 여호와께 피하였다: 설령 터가 무너지면 산으로 피한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다. 피할 곳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굴이 많은 산으로 피하는 것(막 13:14)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 실제로 어려움에 봉착해서 그렇게 믿고 행동하기는 쉽지 않다. 하나님께 피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일까? 다윗도 실제로는 고난을 피해서 도망 다녔다. 하나님을 의뢰하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수단을 다 하는 것을 말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하거나 같은 모양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도망 다녔기 때문에 이상한 행동이 더러 보이는 것이다. 사울을 죽일 절호의 기회가 왔어도 죽이지 않은 것이나 안전한 모압 땅을 떠나서 다시 위험한 유대로 들어와서 쫓겨 다니는 등,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포기하고 하나님만 신뢰하는 모습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2. 악한 자들이 얼마나 악한가? 잘 하면 터를 무너지게 한다(3): 다윗은 악인이 어두운 데서 화살을 쏘는 행위가 결국은 나라를 기초부터 허물어버릴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낀다. 시인의 절망이다. 나라야 망하든지 말든지 자기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부류가 적지 않다. 머리가 나쁜 인간들이다. 나라가 망하면 자기가 가진 것이 아무리 많아도 지킬 수 없다는 것도 모른다. 3. 시인에게 당장 들리는 것은 친구들의 조언이고 자세히 살펴야 할 것은 악인들의 악한 꾀다. 엄청난 위기를 느끼면서도 시인의 눈은 어디로 향해 있는가? 오직 여호와만 바라본다(4-7). 그것도 확신에 차서! 좌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면 회복이 가능하다.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차이도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4. 다윗은 여호와는 어디에 계시다고 하는가? 성전과 하늘(4): 하나님의 보좌가 하늘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초월성, 세상의 주관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서 이 땅에 잠시 임재한 곳이 성전이라는 것을 다윗은 잘 알고 있다. 흔히 ‘달을 보라고 하는데 왜 손가락을 보느냐?’고 하는 것처럼 본질적인 것을 잊어버리고 현상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강한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서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시는 유한한 분이 아니시라는 것이다. 5. 하늘 보좌에 계신 하나님께서 의인과 악인을 정말 감찰하고 계실까? 시인은 그렇게 확신하고 있다: 문제는 우리다. 우리가 억울함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전후 사정을 아신다고 확신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확신한다면 세상의 불의함에 대해서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 6. 악인들이 어두운 곳에서 화살을 겨눈 소득이 무엇인가?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6): 불과 유황이 비오듯(‘그물을 던지시리니’는 원문상으로 ‘비를 내리시리니’라는 뜻) 쏟아지는 장면은 소돔과 고모라를 연상시킨다. 거기다가 바람까지 불어대면 최악이다. 이것이 악인들의 소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