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0편


1. 거의 모든 시편에는 표제어가 붙어 있다. 이 시편에는 왜 없을까?

    10편이 9편과 하나의 시였기 때문일 것: 9편과 10편은 소위 알파벳 이합체시(alphabetic acrostics)다. 도레미송처럼 알파벳 순서를 따라가면서 연을 이루는데 완전하지는 않다. 도중에 몇 연이 분실된 것으로 본다. 그럼에도 이렇게 나누는 것은 9편과 10편이 음조가 전혀 다르고 또 내용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시편 9편을 보면 하나님께서 마음을 다해서 경배와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모든 하나님의 행하심 때문에 기뻐하고 지금도 그 하나님이 보살피리라는 큰 기쁨으로 그렇게 노래하고 있는데 10편에서는 이방에 대해서 승리하시는 하나님보다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 섞여 있는 간사한 자들로부터 구원해 달라고 탄식하는 기도로 되어 있다.

2. 하나님께서 멀리서 숨어계시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악한 자의 교만을 견딜 수 없어서(3, 4): 어떻게 이런 인간을 그냥 두고 보실 수 있느냐는 것이다. 불행자체보다 하나님의 부재가 더 가슴이 아프다. 이 문제는 이 시인의 문제만이 아니다(사 45:15, 애 3:56, 시 13:1, 22:1, 35:22...).

3. 신체적인 압박이나 재산상의 손실도 견디기 어려운 폭력이지만 그에 못지않은 또 다른 폭력은 무엇인가?

    언어폭력(4, 7, 11):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서 악한 짓을 하는 것을 시인이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성도들에게는 신성모독이 가장 견디기 어려운 일이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대수롭지 않게 이런 소리를 하고 있으니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4. 잘 하는 것을 자랑해도 보기가 좋지 않은데 악인들은 무엇을 자랑하는가?

    욕심(3): 악한 자가 자신이 얼마나 용감한가를 자랑하는 경우에는 대체로 악한 것을 자랑한다(창 4:23-24). 그게 절대로 자랑거리가 아닌데?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악을 행한 것이나 별(?)을 몇 개나 달았는가 하는 것이 자랑거리가 된다.

5. 악한 자들이 겁도 없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형통하기 때문(5-6): 일시적인 형통이지만 악인들의 생각에는 영원한(6절의 대대로) 형통이다. 하나님이 전혀 두렵지 않다. 주의 심판이 ‘높다’는 것(5)은 ‘멀다’(먼 나라의 얘기라)는 뜻으로 효력이 없다는 의미다.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형통이 결국은 영원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 되었으니 정말 불행한 일이다.

6. 악한 자들이 어떻게(무엇으로) 악을 행하는가?

    마음(6)과 온 몸으로(7-9): 말로만 악할 뿐 아니라 눈으로 정보를 모아서 말한대로 그렇게 행한다.

7. 말로만 악할 뿐 아니라 실제로 행동한다. 악한 자의 행동이 마치 누구, 혹은 무엇과 같은가?

    산적(8)과 사냥꾼(9): 사자는 사냥꾼에 포함시키면 되겠다.

8. 사자와 악한 자의 공통점이 있을까?

    약한 자를 공격하는 것(8-10, 9): 사자는 무리에서 뒤처진 짐승을 노린다. 악한 자는 가련한 자를 노린다. 가뜩이나 가련한 자를 왜 노리는가? 힘 있고 권력 있는 자보다 공략하기가 쉬워서? 교활하다는 뜻이다. 가련한 자가 악한 자의 희생이 된다는 점에서 악한 자는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

9. 악한 자들이 온갖 방법을 악을 행하고도 양심의 가책이나 거리낌이 없는 이유가 뭘까?

    하나님이 계시다고 해도 자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11): 결국은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신은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면 인간은 가장 나쁜 짓이라도 서슴지 않을 기본을 갖춘 셈이다.

10. 악한 자들을 바라보며 분통을 터뜨리던 시인이 이제 하나님을 바라본다. 시인의 눈에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가난한 자(고아)를 도우시는 분(12, 14): 그래서 예수님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하셨다.

11. 결국 악인(5-11)과 시인(12-15)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인간사를 실제로 주관하시느냐 아니냐 라는 것: 악인의 생각은 하나님께서 인간사에 전혀 상관이 없다. 혹은 개입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반면에 시인은 개입하신다는 것을 믿고 구한다. 우리 눈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같아 보여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보는 것이 신앙인의 눈이다. 무신론자들이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하는 것은 그 사람들의 눈에 그렇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의 기준으로는 그 말이 맞는 셈이다.

12. 악한 인간들의 팔만 꺾으면 되나? 못된 말을 하던 입을 틀어막아야지?

    팔을 꺾는다는 표현은 악인의 힘(능력)을 소멸시키는 것에 대한 상징이다. 이어지는 ‘악을 더 이상 찾아낼 수 없을 때까지 찾으소서’라는 말과 평행구절이다. 그러니까 완전한 파멸을 의미한다.

13. 하나님께서 멀리 숨어계시는 것을 원망하더니 이제는(16-18) 하나님을 어떤 분이라고 하는가?

    영원무궁하신 왕(16), 가난한 자의 보호자(17-18): 악한 자 한 둘에 꽂혔던 시선을 거두고 온 세상을 다스리는 영원하신 분이 하나님을 바라보며(=확신하며) 찬송으로 마무리 짓는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주권을 믿지 못하는 한 이 세상의 부조리를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이렇게 탄식(1-4)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신뢰의 대한 고백과 간구로 끝나는 시를 비탄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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