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9편 |
원래 셀라는 시의 끝부분에 위치하지 않는다(악상기호는 대체로 사용되는 위치가 정해져 있다). 셀라는 거의 대부분이 중간에 위치하는데(아마도 가장 최고조의 느낌을 표시하는 기호인지도 모른다) 여기서만 예외다. 이것은 9편과 10편이 원래 하나의 시였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10편에는 표제어도 없다). 사실은 9편과 10편은 소위 알파벳 이합체시(alphabetic acrostics)다. 도레미송처럼 알파벳 순서를 따라가면서 연을 이루는데 완전하지는 않다. 도중에 몇 연이 분실된 것으로 본다. 2. 이 시편은 문단 나누기가 쉽지 않다. 다음과 같이 단락을 나눈다면 각 단락에 제목을 붙여보자. 1-4: 보좌에 앉으신 주님께 감사와 찬송 3. 하나님 앞에서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 어떤 종류가 있는가? 감사하며 찬송하는 인간과 도망치려다 넘어져 망할 인간: 중간지대는 없다. 양쪽에 다 발을 담글 수도 없다. 4. 다윗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도 구원을 확신할만큼(4) 의로운 사람인가? 하나님께서 다윗의 편이 되셨기 때문: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절대적인 의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부족하거나 말거나 하나님께서 다윗을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세우셨기 때문에 다윗과 싸우는 이방은 악하고 자신은 의로운 것이다. 5. 시인은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가, 곧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가? 둘 다: 현재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다. 여전히 대적들이 존재하고 있다(13-14). 심판이 끝나지 않았다(7-8). 그럼에도 구원을 받은 것처럼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은 구원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너무나 확실한 일이기에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이다. 시련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구원의 기쁨을 미리 경험하는 것이다. 가불이 직장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6. 시인이 감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주의 모든 기이한 일로 인하여(1): 구체적으로 원수들을 물리치심(3, 5-6)을 의미하는 듯하다. 과거의 경험을 떠올리며 앞으로 그렇게 될 것에 대해서 확신하고 찬송하며 전파하리라고 노래하는 것이다. 7. 주님은 변호인인가, 심판자인가? 둘 다(4): 이러면 게임 끝이다. 심판하시는 분이 변호인의 말을 잘 들어주기만 해도 재판은 하나마다 이기는 것인데... 8. 이방 나라나 악인은(5) 같은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어느 정도로 심판하시는가? 이름이 사라질 정도로(5):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지으시고 이름을 주셨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므로 이름이 사라진다는 것은 존재 자체가 사라진다는 말이다. 후손들이 기억도 않는다는 것(6)은 철저한 멸망을 의미한다. 9. 원수들을 물리칠 것에 감사인가, 물리친 것에 대한 감사인가? 지난 날 원수들을 물리친 것처럼(6) 또 지금의 원수들을 물리칠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6절은 여호수아 시대의 승리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10. 하나님은 왜 영원히 앉아계시는 분인가(7)? 통치권을 의미하는 말이다. 어디에 앉아계시느냐가 중요하다. 왕의 보좌에 영원히 앉아계신다는 말이다. 11.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원칙은 무엇인가? 공의와 정직(공평): 이런 원칙이 흔들리면 어떤 사회도 바르게 서기 어렵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이렇게 널리 퍼지게 된 것은 우리 사회가 바르지 않다는 증거다. 12. 온 세상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은 재판장이시다(1-8). 그러나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보면 그 분은 어떤 분이신가(9-14)? 시온의 왕: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분이시며 따라서 백성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다. 하나님의 보좌는 하늘에 있다. 그 분이 상징적으로 정하신 이 땅의 보좌가 시온이다(11:4). 13. 여호와를 요새란다. 요새의 양면성을 생각해 보자. 대적들에게는 무서운 공격을 퍼붓지만 아군에게는 안전한 피난처가 된다. 하나님은 심판자요 동시에 구원자이시다. 14.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것(10)이 뭐 그리 대수인가? 개인적인 깊은 관계(=신뢰, 의지)를 의미한다: 이름을 지워버리는 것(5-6)과 비교해 보라. 우리말의 ‘알다’와 히브리어의 ‘알다’는 뜻이 전혀 다르다고 해야 한다. 히브리어의 이 단어(야다)는 종종 부부사이의 성관계를 의미한다. 그만큼 체험적이고도 개인적인 깊은 교제를 의미하는 단어다. 그러면 이어지는 표현 ‘주를 의지하는 것’이나 ‘주를 찾는 자’의 강도가 훨씬 더 강렬한 것이다. 번역할 때 이런 오류는 흔히 생긴다. 우리말의 ‘약속’을 영어로 ‘promise’라고 하면 안 된다. 약속의 강도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사람들은 우리처럼 함부로 이 단어를 쓰지 않는다. 목숨이라도 걸고 지킬 용의가 있을 때에만 쓴다. 15. 시온에 계신 여호와는 피를 흘리게 한(생명을 취한) 자와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신다(11-12). 누구 생각이 나는가? 가인과 아벨: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과 사람을 압제하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보복(고엘)하신다.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귀하게 만드신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땅에는 억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보인다. 전쟁이 그렇고, 독재자의 치하가 그렇다. 16. 이 시편은 시인의 개인적인 기도인가, 아니면 민족의 구원을 위한 기도인가? 자신의 구원(1-4, 9-10)이 곧 민족의 구원(5-8, 15-17)이다: 그래서 개인적이면서도 동시에 민족을 위한 것이다. 나의 대적이 곧 이방 나라들이다. 4절은 개인적인 재판이고 7-8절은 온 세계를 상대로 하는 재판이다. 17. 사망의 문은 어디며 딸 시온의 문은 어디인가? 사망의 문은 구체적인 장소가 아니라 자신의 처한 상황이며 딸 시온의 문은 예루살렘을 가리킨다.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 건져주시면 하나님의 성,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리라는 것이다. 전혀 상관이 없는 두 상황을 문이라는 비유를 통해서 대조를 시킨 것이다. 18. 악한 자들을 심판하실 때 하나님께서 즐겨 쓰시는 방법이 무엇인가? 자기 꾀에 빠지게 하는 것(15-16):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지고, 자기가 숨긴 그물에 걸리고, 자기가 손으로 행한 일에 얽힌다(모르드개를 죽이려던 하만의 장대). 당하는 입장에서는 얼마나 억울할까? 심판의 방법 치고는 가장 정당한 방법이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런 걸 자승자박이요, 부메랑 효과라고 한다. 19. 이방 나라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서야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아는 것(16):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하시는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심판을 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란 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깨달아 아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장 큰 복 중의 복이요,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가장 큰 불행 중의 불행이다. 그들이 가야 할 스올이 무서운 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20. 궁핍하고 가난한 자의 복이 무엇인가? 항상 잊어버림을 당하지는 않고, 영원히 실망하지는 않는다(18): 때로는 하나님께서 잊어버리신 것처럼 보이고, 때로는 소망이 전혀 없는 듯싶어도 영원히 그런 것은 아니다. 결국은 주님께서 돌보아주실 것이다. 최후 승리를 믿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21. 어려움 가운데 처한 시인의 결론적인 간절한 소망이 무엇인가? 여호와께서 여호와다움을 나타내시는 것: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악을 행하는 저 나라들에게 본 때를 한번 보여달라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