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7편


1. 표제에 등장하는 베냐민인 구시는 누구인가?

    성경에 없는 인물이다. 다윗이 베냐민 사람들에게 억울한 고난을 많이 당한 것(삼상 24-26, 삼하 16:5, 20:1)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2. 시인의 현재 처지는 어떠한가?

    맹수가 달려드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 피하는 중: 비록 대적자에게 쫓긴다고 해도 하나님께 피하는 자는 희망이 있다. 다윗이 고난을 많이 겪었지만 진정한 해답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수많은 시편에서 하나님께 피하였다고 고백한다(11:1, 16:1, 18:2, 25:20, 43:2, 삼하 22:3).

3. 무죄선언, 혹은 해명성 맹세에 해당하는 표현을 찾아보자. 정말 하나님 앞에서도 이렇게 당당할까?

    3-5, 8, 10: 하나님의 앞에서 무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대적하는 악인의 말과 비교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가정이긴 하지만 구체적인 잘못을 지적하기 전에 ‘내가 이런 일을 행하였거나’라고 하는 것은(3) 법정에 고발된 내용을 가리킨다고 보면 좋겠다(창 3:14, 대상 21:8).

4. 시인을 쫓아오는 자들이 사자같이 난폭하지만 실제로 사자도 아니고 칼을 들고 쫓아오는 것도 아니다. 도대체 무슨 난폭한 짓을 저지르는 걸까?

    무고(거짓 증언): 심판(6, 8), 재판장(11)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의 법정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무죄를 확신하는 것(3-5)도 하나님의 재판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이 표현 자체가 법정에서 무죄를 주장하는 용도로 쓰였단다). 사람을 말로 비방하는 것이 사자가 물어뜯는 것과 같이 잔혹한 행위가 될 수 있다.

5. 구체적으로 무죄를 천명하는 내용이 몇 가지인가? 만약 자신의 말이 틀렸다면 자신이 받아도 좋은 형벌은 몇 가지인가?

    둘 다 세 가지: 3-4절에서 구체적인 자신의 죄악을 가정하는 내용은 ‘손에 죄악’ ‘화친한 자를 악을 갚은 것’ ‘대적에게 까닭 없이 빼앗은 것’이다(‘이런 일을 행한 것’은 대적의 고소내용 전체를 가리키는 것). 그래서 자신이 당해도 좋다는 것도 세 가지로 대응시키는 셈이다. 영혼과 생명과 영광을 잃어도 좋다는 것이다.

6. 시인은 대적자들을 심판하시라고 기도를 한다(6-8). 6절의 간구에는 네 개의 동사가 있는데 한 개가 약간 이상하지 않은가?

    심판을 명령하셨나이다: ‘일어나사, 막으시며, 깨소서’는 이해가 가지만 ‘심판을 명하셨다’는 것은 그냥 ‘심판하소서’ 혹은 ‘판결하소서’라는 뜻이다.

7. 하나님께서 대적을 심판하실 때는 대적이 행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행한대로) 더 강하게 심판하신다(계 18:6). 가령, 속이는 자를 심판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더 크게 속게 만드는 것이다. 시인은 분노하는 대적들에게는 어떻게 하시라고 하는가?

    하나님께서 (더 크게) 노를 발하시라고 한다(6): 소위 부메랑 효과요 자업자득이다. ‘이게 누구는 화를 낼 줄 몰라서 가만히 있는 줄 아나? 하나님! 하나님께서 노를 발하시면 어떻게 되는지 한번 보여주세요.’ 하는 셈이다. 경상도 식으로 하면 이렇다, ‘가마이(가만히) 있으니 가마이(가마니) 떼긴줄 아나?’

8. 하나님께서 재판장이 되셔서 높이 앉아주시기를 간청한다. 그 재판장 앞에는 누가 서 있는가?

    민족들(7): 만민, 뭇 백성, 모든 인류라고도 번역이 된다.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도 틀림없이 하나님의 재판정 앞에 나와야 할 대상이라는 확신을 담은 표현이다.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잘 먹고 잘 살고 출세하는 인간들도 정말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는가? 이것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지 않는 셈이다. 시인은 기도는 이런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

9. 하나님 앞에서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을 따라 나를 심판하소서’ 이렇게 말해도 될까?(8) ‘마음이 정직하다’고 말해도 될까?(10)

    그럴 수 있어야 한다: 구약시대에는 일반적으로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다윗이 절대적인 의와 성실을 소유한 자가 아니면서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남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데려온 자식은 당당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눈치를 본다. 낳은 자식은 제대로 자식 노릇하지 못해도 당당하다.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의 문제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확신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10.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의로우시다(9). 심판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을 바르게 하실 것이라는 말이다. 이런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어떻게 하시라고?

    악인의 악을 끊으라고 한다(9): 악만 제거하면 악인도 악인이 아닐 수 있다. 그 악이 사람을 악인으로 만들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조금만 잘못해도 나쁜 놈이라고 낙인을 찍고 아무리 회개하고 돌이켜도 여전히 몹쓸 인간으로 보는 우리의 고약한 버릇과 비교해보면 놀랍고도 놀랍다.

11. 정직한 자는 손해를 보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 오늘 우리 사회다. 마음이 정직한 자를 하나님께서 방패로 지키신다는 고백(10)은 다윗의 시절에나 통하는 얘기가 아닐까?

    정직해서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결정적인 위험을 막아주신다. 전투에서 여러 번 지더라도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백성은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최후의 승리를 확신하라고 하셨다(요 16:33).

12.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매일 분노하신다고? 성질이 너무 메말라서 그런 것 아닐까?

    당연하다. 이런 분이 자기 백성에게는 끝없이 인내 하신다: 하나님은 눈이 정결하여 죄악을 차마 보지 못하신다(합 1:13). 한 치의 흐트러짐도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깔끔한 사람을 생각해 보자. 참는 것이 불가능한 일인데도 잘 참고 있다면 조심해야 한다. 참다가 폭발이라도 하는 날에는 줄초상이 날 수도 있다(12-13).

13. 하나님에게는 무슨 무기가 있는가? 어떤 상태인가?

    칼, 활, 불화살. 준비는 물론이고 조준완료 상태다(12-13): 이런 줄도 모르고 대적자들은 여전히 득세하고 있다. 이러니 악인의 득세를 보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14. 하나님은 무슨 무기를 쓰셨는가?

    굳이 하나님 자신의 무기를 쓸 필요도 없다(14-15). 자기가 만든 함정에 스스로 빠지게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모르드개를 달려고 세운 장대에 하만 자신이 달린 것처럼!

15. 성도가 굳이 악인의 득세를 두려워하거나 부러워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충분히 있다. 14절을 근거로 설명해 보자.

    악인의 꾀는 일종의 상상임신이다: 아기를 잉태했다고 좋아했고 고통도 다 견뎌냈는데 알고 보니 실제 임신이 아니란다. 이런 허망할 데가 있나? 엄청난 횡재를 노렸는데 알고 보니 재앙이요, 낳고 보니 거짓이더라는 것이다.

16. 3-7편은 탄식 시편이라고 하는데 마지막 부분만 비교해 보고 7편의 마지막이 어떻게 다른지 찾아보자.

    7편만 유일하게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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