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4편 |
3:5에 ‘자고 깨었으니’와 4:8에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라는 표현이 그렇게 쓰기 적합하기 때문 아닐까? 2. 1절에 사용된 네 개의 동사중 3개는 명령형이고 한 개는 과거서술형이다. 내용상 이것도 명령형 아닐까? 원어상으로는 시제가 다르다. 그러나 내용상으로는 그렇게 보는 것이 타당성이 있단다. 3. 이 시인이 온전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표현을 찾아보자. 하나님을 ‘의로우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과 자신을 경건한 자라고 하는 것: 이 둘은 같은 의미다. 하나님을 가리켜 의로우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을 행하는 자에게 철저하게 징벌을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자신은 그런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는 확신이 없이는 하나님을 이렇게 부를 수 없다. 4. 남이 잘 되는 것을 함께 기뻐해주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형제나 이웃의 잘 되는 일에서도 어떻게든 험을 찾으려고 애쓴다.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찾는다. 어떻게 인간이 이런가? 이런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여호와를 의뢰하라: 인간의 노력으로 이런 못된 버릇에서 벗어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높은 담을 뛰어 넘어야 한다(삼하 22:30, 시 18:29). 믿노라고 하면서 못된 버릇을 고치지 못하는 사람은 어떻게 된 걸까? ‘행함이 없는 믿음’(약 2:17) 아닐까? 5. 악한 자들을 향하여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라고 했다. 이 악한 자들이 흔히 하는 말이 무엇인가?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도록 하시면 감히 못된 소리하는 인간이 하나도 없을텐데 왜 숨어 계실까?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찾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시면 모두가 굴복은 하겠지만 진실한 사랑은 아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된다. 6. 하나님께서 이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셨는지는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럼에도 이 시인이, 마음에 기쁨이 넘치고, 대적들의 비난 가운데서도 평안히 누울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응답에 대한 확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택하신 것과 택하신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실 것에 대한 신뢰가 확실하므로 그는 대적들의 비난 가운데서도 기쁨과 안전함을 누리고 있다. 7. 부자들의 풍족한 삶이 부러울 때가 많다. 좋은 집에 좋은 차에 마음대로 노는 모습이 부러울 때는 어떡하지? 돈이나 재물로 살 수 없는 것이 마음의 평안, 기쁨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 없이 곡식과 새 포도주가 아무리 풍성해도 시인이 누리는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없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대적들이 많이 있음에도 평안히 누울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