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편


1. 시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모르겠다. 그런데 이 시는 시편의 입문서 혹은 서문인 셈이다. 이에 따르면 하나님의 복을 누리려는 자는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율법을 즐거워해야: 그래야 복이 있다. 하나님을 알고 싶으면 율법부터 알아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시편은 율법을 가르치는 책이 아니다. 그러나 율법을 알아야 하나님을 알고 시편도 안다고 말하는 셈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는 수단으로 율법을 주셨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요 14:21).

2. 율법이 어떻게 즐거울 수 있을까? 교칙이 즐거운 때가 언제인지 생각하면서 비교해 보자.

    입학허가가 나면 준수해야 할 교칙이 주어진다. 어려운 관문을 뚫고 합격한 기쁨이 바로 교칙을 얻게된 기쁨이다. 오랜 고생 끝에 외국에서 영주권을 얻은 사람의 기쁨도 비슷하지 않을까? 그래서 십계명보다 십계명의 서문(출 20:2)이 더 중요하다: 율법을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자신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가 되었는지를 분명하게 아는 사람(하나님의 자녀가 된 기쁨이 어떤 것인지 아는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만이 율법을 즐거워할 수 있다(19:10). 시편기자처럼 구약시대에도 신약시대의 성도들이 누리는 감격을 누릴 수 있었다. 반면에 신약시대에도 구약시대처럼 율법에 얽매인 성도도 적지 않다.

    결국 ‘율법을 즐거워한다’는 말은 율법을 알아야 하나님을 안다는 말도 되고, 하나님을 알아야 율법을 안다는 말도 된다. 물에 떠야 수영을 하나, 수영을 알아야 물에 뜨나? 둘 다 맞다. 둘 중에 하나라도 하면 둘 다 된다. 탁구는 쳐야 배우나? 맞다, 그러나 배워야 잘 치게 된다는 말도 맞다. 수영이든, 탁구든, 아니 무엇이든 즐기는 수준으로 올라가려면 배워야 한다.

3. 아무리 율법을 즐거워해도 그렇지 어떻게 주야로 묵상한다는 말일까?

    즐거우면 그럴 수 있다: 연애편지의 내용은 별 것 없다. 그래도 반복해서 읽는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을 느끼기 때문이다. 별 내용이 없는 연애편지도 그렇거든 하물며 속이 꽉 찬 하나님의 말씀이야 얼마나 더 달겠는가! 율법이 단순히 인간의 행동을 규제하는 법 조항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이 느끼는 하나님의 사랑을 담은 것이다.

4.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그렇지 그렇게 해서는 사업을(장사를) 할 수 없다.’ 흔히 이런 말을 하기도 한다. 이런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 해야 할 무슨 일을 소홀히 한 사람일까?

    묵상: 묵상이란 되새김의 의미가 있다. 소가 되새김질을 해서 풀을 완전히 소화시키듯이 말씀을 온전하게 이해하면 그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다. 묵상이 덜 되었기에 소화불량에 걸린 것처럼 그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다.

5. 시편 1편을 예수님의 산상수훈처럼 고쳐보자.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6. 서로 대조적인 표현을 세 쌍 찾는다면 무엇인가?

    악인(죄인) ↔ 복 있는 사람(의인)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 ↔ 여호와의 율법
    시냇가에 심은 나무 ↔ 바람에 나는 겨

7. 복 있는 사람은 무엇을 하지 않는가?

    악인의 꾀를 좇는 것, 죄인의 길에 서는 것,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 것: 소위 꾀도 많고, 똑똑하고, 능력도 있는 사람들이 하는 짓을 하지 않는다. 이런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현대인들이 보기에는 다소 어리석은 사람이다.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을 자신도 하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돌을 떡으로 만드는 것은 요술이지 이적이 아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한 탓이 아니다.

8. 잎사귀가 무성하고 많은 열매를 맺으려면 나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물가에 서 있어야 한다(성숙한 성도의 대답): 열심히 물을 빨아올려서 자라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초신자의 대답).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물가에 심기우는 것이다. 스스로 하는 일이 아니다. 거기에 서 있는 것조차 하나님의 은혜다. 예수님의 포도나무 비유에서처럼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는 일도 마찬가지다(요 15:4).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있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하나님께서 우리를 물가에 심으셔야 한다). 그저 감사할 수밖에 없다.

9. 복있는 사람과 악인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인가?

    삶의 근거 유무: 시냇가에 뿌리를 단단히 내린 나무와 바람이 불면 정처없이 날릴 수밖에 없는 겨의 가장 큰 차이는 근거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다. 악인이 재물과 명예와 권력을 누린다고 해도 바람이 불면 그냥 날려가버릴 허망한 것이다. 이 땅의 좋은 것이라고 말하여지는 것들은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것임을 잊지 말자.

10. 실제로는 악인이 번성하고 의인이 고난당하는 현실을 많이 볼 수 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욥이 그랬고, 하박국도 그랬다. 그런 생각이 들 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심판이 있다: 겨가 바람에 날리는 것은 단순한 자연현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추수 때 까불리는 것을 말한다. 날기 싫어도 날아야 한다. 악인의 번성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하나님의 원리에 위배되는 것 같아도 우리 스스로 결론을 내릴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패배한 것 같아도 패배가 아니다. 만사를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가! 겨는 모양은 비슷하지만 알맹이가 없는 것이다. 소득이 2만불을 넘어가면 오히려 불행해진단다. 행복해 보여도 불행한 사람이 많다. 그게 바람에 날리는 겨다.

11. 악인은 똑똑하고 꾀 많고 힘도 센데 무엇이 부족한가?

    하나님의 인정: 여호와께서 인정하지 않는 똑똑함, 꾀는 망하는 길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들이다. 수능 잘 치고 대학 떨어지는 학생이나 돈을 엄청나게 많이 벌어도 고민하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12. 결국 우리 앞에는 몇 가지 길이 있는가?

    오직 한 길: 두 가지 길이 있는 것 같아 보이나 악인의 길은 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즐거워하며 걷는 길만이 참된 길이다. 이 길을 기꺼이 걸어가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다. 하나님의 율법을 진정으로 기뻐하신 분이시다. 온전한 순종의 본을 보여주셨고, 그 분에게는 열매가 풍성하다. 우리도 그 분의 뒤를 따라 풍성한 열매는 맺어야 한다.

13. 결국 어떤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인가?

    형통한 자, 의인들의 모임에 든 자,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자: 환경의 변화와 상관없이 복된 사람들이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이 한 마디에 예수님은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다. 하나님의 인정은 이런 것이다. 정말 사랑하고 존경하는 그 분의 한 마디라면 화약을 지고 불 속이라도 뛰어들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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