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도서 3 장


1. 정사(=통치자)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라(1)는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정부시책에 대한 반대나 파업을 하지 말라는 말인가?

    기본적으로 순종하라는 말이다(롬 13:1-7, 신 17:12-13): 불의한 정사나 권세 잡은 자에 관한 교훈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출 1:15-17, 1:22-2:3(=히 11:23), 단 3:13-18, 행 4:18-20). 순종적인 자세를 갖추지 않은 채 반대나 파업에 나서는 것은 근본적인 질서를 허무는 것이라서 대단히 위험하다. 가령, 아직도 대통령 선거가 일년도 넘게 남았는데 자기 당의 대통령 후보가 될 사람을 입에 담을 수 없는 표현을 써가며 비난하다가 그 중 한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면 그 분을 나라의 어른이라고 하겠으며 제대로 순종할 수 있을까?

2. 그리스도인은 ‘복종하며 순종하며 선한 일을 행하며 훼방(비방이나 악담)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해야’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을 기억함으로(5) = 저의 은혜를 힘입어(7): 과거에 우리가 어떤 존재이었는지 이제 우리의 신분이 무엇인지 장차 우리는 어떤 자가 되는지를 앎(=그리스도인의 정체성 확립)으로 이렇게 살 수 있는 근거를 가지게 된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이루어 진 것과 은혜로 하나님의 후사가 된 것을 기억하므로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눅 6:27-33에는 이보다 더 어려운 주문이 있다.

3.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하는 것이 어떤 일인지 예를 든다면?

    불행한 일이 이웃에게 닥쳤을 때 도울 준비를 미리 하는 것인데, 자신도 필요하지만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서 굳이 자동차에 점프케이블, 소화기, 기타 다른 장비를 싣고 다니는 것도 예가 될 수 있다. 이웃을 돕기 위해서 저축하는 것도, 구급 장비를 싣고 다니는 것이나 응급처치술을 배우는 것이나... 기회가 되면 잘 가르치기 위해서 미리 말씀을 공부하고 지식을 쌓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신은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서도 성냥을 꼭 가지고 다니는 친구도 있었다.

4. 전에는 우리도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단다. 설마? 난 안 그랬는데?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를 가리킨다. 아무리 인간적으로 선하고 의로운 삶을 살았다해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그 인생 자체가 악이다. 악에서 어떤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

5. 우리의 구원은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후사가 된 것은 하나님의 어떤 성품 때문인가?

    자비, 사랑(4), 긍휼(5), 은혜(7):

6.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삼위 하나님께서 각각 어떤 역할을 하셨는지 정리해보자.

    성부: 주체적인 역할(4), 우리의 구원을 계획하신 분이시다.
    성자: 촉매적인(중개자의) 역할(6), 성령이 실제로 역사하실 수 있도록 제물이 되어 주셨다. 우리 대신 값을 지불하심으로 성령이 역사하시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라는 말이다.
    성령: 도구적인 역할(6): 성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을 실제로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성령님의 인격적인 부분을 무시하는 듯해서 무리이긴 하지만 인간적인 방식으로 이해하기 쉽게 말하려는 것뿐이다.

    본문의 표현을 근거로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관점에서 본 이해일 뿐이다.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려는 의도일 뿐 역할의 중요성이나 서열이나 가치에 대한 표현은 절대로 아니다. 성부 하나님만 구주가 아니라(4) 성자 예수도 동일하게 구주이시다(6).

7. 사람들에게 아름다우며 유익한 것(8)이 무엇인가?

    선한 일에 힘쓰게 권면하는 것(=여러 것을 굳세게 말하는 것): 디도가 목회자로서 힘껏 전해야하는 말씀이 결국은 성도들로 하여금 선한 일에 힘쓰게 하는 것이다. 성도를 구비케 하는 것이다(약 1:4). 거짓 교사들의 허탄한 이야기에 맞서서 바른 복음(4-7)을 힘있게 증거하라는 권면이다.

8. 무익하고 헛된 것이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이다. 왜 이런 것들이 어리석고 헛된 것인가? 이런 비슷한 일이 우리 주변에도 있는가?

    하나님을 아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에 목숨을 걸기 때문이다: 논쟁에서 이기려고 하지 말고(=피하라) 사랑하라(=선한 일에 힘쓰라). 부부 사이에도 누가 옳은지 따지는 것은 무익하다. 누가 더 사랑하는지 생각해보는 것이 유익하다. 전도를 위해서도 논쟁이나 다툼을 벌이지 말라. 전도 대상자들이 논쟁에서 졌다고 항복하고 교회로 오는 것이 아니다.

9. 이단이 무엇인가?

    우리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끝이 다르다’는 말이다(異端). 초대 교회 당시에는 복음에 대한 다른 견해를 주장함으로써 분파나 당파를 만드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성경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것이 현대의 이단성 유무를 가리는 시금석이다. 어떤 인간을 하나님의 위치에 올리는 것이나 어떤 책에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더 따질 필요도 없는 이단이다. 생각이나 해석이 좀 다르다고 함부로 이단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말씀에 어긋남이 있는지 없는지를 면밀하게 살펴야 한다.

10. 예수님께서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의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는데(마 18:22) 아무리 이단에 속한 사람이지만 한 두번 훈계한 후에 멀리 하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 아닌가?

    우리 개인에게 저지른 죄와 하나님에 대한 죄는 경중이 다르다. 이단을 주장하는 자를 계속 용서하는 것은 다른 성도들을 위해서 불가하다. 이단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참고해야 한다(눅 9:5).

11. 우리말에 어리석기 그지없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로 ‘제 손으로 제 눈을 찌른다’는 표현이 있다. 이와 비슷한 표현이 본문에 있다면?

    스스로 정죄한 자(11): 이단을 따르는 자는 이와 같이 어리석은 자들이다.

12. 거짓교사들이 설치고 있는 곳에서 어렵게 목회하고 있는 디도를 자기가 있는 곳으로 불러들이면 그레데는 어떻게 하나?

    그래서 아데마나 두기고를 보내는 것이다. 디도를 불러야 할 이유가 있었지만 교회를 잠시도 비울 수 없어서 다른 사역자를 보낼테니 그들이 도착하거든 급히 오라는 것이다. 재미로, 니고볼리의 ‘니고’는 스포츠 용품의 상표에서 가끔 볼 수 있는 말이다. 니코보코, 나이키에 들어 있는데 승리라는 뜻이다. 볼리는 ‘폴리스’ 그러니까 니고볼리는 승리의 도시라는 뜻이다.

13. ‘교법사 세나와 및 아볼로를 급히 먼저 보내어’에서 ‘보내어’의 주어는 누구일까?

    디도: 아마도 세나와 아볼로가 바울을 편지를 가지고 디도를 방문했던 모양이다. 급히 돌려보내고 필요한 것을 도와주라는 당부이다. 초대 교회 시절이나 지금이나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는 전도자들을 돕는 것은 귀한 일이다.

14. 14절의 ‘우리 사람들’은 누구일까? 열매는 무엇일까?

    그레데의 성도들: 세나와 아볼로의 필요를 돕는 것(=헌금)을 디도가 혼자서 할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함께 감당하도록 가르치라는 당부이다. 헌금을 드리는 것도 성도가 마땅히 맺어야 하는 열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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