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후서 4


1. 살아있는 자를 심판하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죽은 자를 어떻게 심판하는가?

    살려내서: 사람의 생각으로는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기에 아무리 중죄인이라도 죽으면 더 이상 재판을 하지 않는다. 사법권이 미치는 것은 산 사람에게만 해당한다. 간혹 죽은 사람을 심판하는 일(부관참시)이 과거에 있기는 했으나 실질적인 심판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죽음이 끝이 아니다.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죽은 자도 부활시킨다. 영벌에 처하기 위한 심판이 있다. 이게 진짜 죽음이다.

2. 1-5절의 명령은 디모데에게만 해당하는 것일까, 아니면 모든 목회자에게 해당하는 말일까?

    목회자에게 하는 말이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5절의 ‘전도인’이란 일반 성도가 아니라 초대교회에 있었던 독특한 직분의 하나다(엡 4:11의 ‘복음 전하는 자’, 행 21:8의 ‘전도자’: 빌립을 위시해서 7명을 집사라고 부른 것은 우리가 편의상 붙인 말이지 원문에는 없다. 스데반이 분수를 넘어서 복음을 전하다가 죽은 것이 아니다. 정신없는 분이 스데반의 죽음에 대해서 ‘집사로 세웠더니 건방지게 설교를 하니 그렇게 된 것 아니냐?’고 하길래 하는 말이다. 스데반도 빌립과 같이 자신의 임무에 충실한 전도자였다). 또 다른 이유는 여기서 ‘말씀을 전파하라(케뤽손)’는 말은 ‘설교하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아래 영역본 참고). 디모데가 사역해야 하는 대상은 이미 믿은 성도들이다(2-4). 단순한 전도가 아니라 설교하라는 명이기 때문이다. ‘항상 힘쓰라’는 말도 ‘항상 준비하고 있으라’는 뜻이다.

    [NKJV] Preach the word! Be ready in season and out of season. Convince, rebuke, exhort, with all longsuffering and teaching.
    [NIV] Preach the Word: be prepared in season and out of season: correct, rebuke and encourage--with great patience and careful instruction.

3.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라는 말씀은 상대방의 형편을 고려하지 말고 무조건 말씀을 전하라는 뜻일까?

    아니다: 형편을 고려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나의 입장일뿐 상대방의 입장은 최대한 고려해줘야 한다. 어떻게 말씀을 전하면 효과적인지조차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어떻게든지 말씀을 전할 기회를 찾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라는 뜻이다. 상대방의 입장을 너무 살피다보면 말씀을 전할 기회를 놓치는 수도 있다. 그러나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용감한 태도는 득보다 실이 더 많아 보인다. 가뜩이나 교인들의 이런 태도에 거부감이 팽배한 시대에는 더욱 방법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 오래 참아야 할 때도 있다.

4. 왜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않고 허탄한 이야기를 따를까?

    사욕에 귀가 어두워서: 욕심을 가지고 있으면 듣는 것이 바르게 들리지 않는다. 그런 때가 언제일까? 특별히 그럴 때가 있는가? 말씀보다는 물질이 더 좋은 때가 온다는 말인가? 특정한 어떤 때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바울의 시대에도 그랬고, 그 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특별한 어떤 때가 아니라 그런 일이 항상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5. 전제는 희생제물 위에 부어서 드리는 제사의 한 방식이다. 바울은 자신의 죽음을 왜 전제에 비겼을까? 이어지는 표현대로 승리한 용사나 운동선수처럼 여겨도 좋은텐데?

    임박한 순교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일평생 복음을 위해서 살았던 바울이 여기서는 더 이상 그런 소망이나 희망을 표현하지 않는다. 스스로 순교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6. 우리말로 면류관이라고 번역된 말의 원어는 두 가지다. 스테파노스는 경기에서 이긴 자가 쓰는 것이고, 디아데마는 왕관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면 바울이 말한 것은 어느 것일까?

    스테파노스: 자신의 삶을 운동선수에 비겼으니 당연히 그렇다. 의로우신 그 분의 공의로운 판단을 기대할만큼 살았다. 이런 자신감을 그리스도인들이 누려야 하는 것 아닐까? 모든 성도들이 그렇게 살기를 바라면서 하는 말이다.

7. 이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10)은 위의 어떤 사람과 대조적인가?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사람(8): 이런 사람은 영원한 복을 추구하지만 이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현찰에 눈이 멀어 영생을 잃고 영벌에 떨어진 사람이다. 푼돈 벌고 큰돈 잃는 사람이다. 아무리 많은 소규모 전투에서 이겨도 전쟁에 지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8. 갈 사람은 가고, 보낼 사람은 보내면서 디모데는 왜 오라고 하는 걸까? 외로워서?

    아마 마지막으로 디모데에게 특별히 당부해야 할 일이나 격려해야 할 일이 있지 않았을까? 그런 일과 겸해서 겉옷도 가져오고 책도 가져오라는 것이다. 마가에게 특별히 당부할 일이 있었을 수도 있다.

9. 마가를 데려 오라고? 한 때 마가를 버린 적이 있었는데?

    1차 전도여행 때 중도에 돌아가버린 일 때문에 2차 전도여행을 시작할 때 바나바와 싸우게 만든 장본인이다. 누가 먼저 돌아섰을까? 어쨌거나 바울이 로마 감옥에 있을 때 마가는 함께 있었다(골 4:10, 몬 1:24). 후일에는 베드로와 함께 로마에 있었다(벧전 5:13). 그래서 후일에 마가복음을 쓰게 된다. 아마 젊은 날의 실수에 대해서 마가가 깊이 반성하고 바울을 찾았을 것이다.

10.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해를 많이 입혔단다. 이 인간을 어떻게 해야 하나?

    그냥 주님께 맡겨버렸다: 이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내 손으로 원수를 갚든지, 아니면 내 눈으로 망하는 꼴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제대로 믿지 않는 사람이다.

11. 변명이 뭐야? 무슨 잘못을 했길래?

    재판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차라리 변증이라고 하지 왜 이렇게 번역을 해서 헷갈리게 하나?

12. 로마 법정에서는 죄수 옆에 동료가 함께 하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그런데 바울이 재판을 받을 때 옆에 아무도 없었던 모양이다. 이게 누구의 잘못인지 모르겠지만 바울로서는 참으로 힘든 일이었던 모양이다. 어떻게 이겨냈을까?

    친구는 없었어도 주님께서 곁에 계셨음을 믿었다: 복음을 전하라고 주님께서 나를 무죄로 구해주셨단다. 그러면 1차 투옥 때의 일이다. 왜 갑자기 먼 옛날 얘기로 돌아갔지? 로마를 중심으로 복음을 위해서 살았던 자신의 생애를 간단하게 정리하는 셈이다(16-18).

13. 왜 겨울 전에 오라는 걸까? 겨울 옷이 필요해서일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겨울이 오면 항해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이게 제일 중요한 요인일 것이다.

14. 누가만 함께 있다고 해놓고 여기서는 여러 사람이 함께 있네?

    11절은 동역자를 의미하고 21절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는 것이 로마 교회의 교우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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